이 시대의 아벨 (고정희 시집)

이 시대의 아벨 (고정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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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바다에서 태어나 산으로 사라진 시인, 그가 남긴 삶의 치열한 여백, 시편들
새롭게 살아난 고정희 시의 정수, 『이 시대의 아벨』
올해(2019년)는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의 품속에 안긴 지 어느덧 28년이 된 해다. 시인의 마지막은 그가 시작(詩作)으로 좇았던,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에 가닿아 있다. 세상의 만류와 주위의 우려를 뒤로 하고 한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한 사람은 악천후를 속에서 ‘산’을 오른다. 오름 끝에, 오름 중에 맞이할 죽음을 알고도, 또 모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 예수와 시인 고정희는 그 깊은 고독 속에서 구원을, 시를 마무리한다. 외로움을 지고 오르며 세상의/과 소통을 이룬다.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고정희 시인은 해남과 광주에서 잡지사 기자, 사회단체 간사, 문학동인?문학회 회원 등으로 사회활동을 하다가 스물일곱(1975)이 되어서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에 입학한다. 그해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 목요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작가회의) 이사 등을 지내며 ‘문학’과 ‘사회’를 아우른다. ‘또 하나의 문화’ 창립(1984) 동인으로, 『여성신문』 초대 주간(1988~89)으로 활동하며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데도 큰 몫을 담당한다. 1991년 6월 9일, 시인의 마음속에 신앙처럼 여겨온 지리산에 오르다 실족, 마흔다섯 해 동안의 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시인은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이후『실락원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등 11권의 시집을 남겼다.
저자

고정희

1975년『현대시학』을통해시단에나왔다.시집『누가홀로술틀을밟고있는가』『실락원기행』『초혼제』『이시대의아벨』『눈물꽃』『지리산의봄』『저무덤위에푸른잔디』『광주의눈물비』『여성해방출사표』『아름다운사람하나』,시선집『뱀사골에서쓴편지』,유고시집『모든사라지는것들은뒤에여백을남긴다』등이있다.대한민국문학상을수상했으며,1991년43세를일기로생을마감했다.

목차

시인의말

I.서울사랑
서울사랑-어둠을위하여
서울사랑-절망에대하여
서울사랑-두엄을위하여
서울사랑-각설이를위하여
서울사랑-죽음을위하여
서울사랑-말에대하여
서울사랑-침묵에대하여
서울사랑-다시핀꽃에게

II.이시대의아벨
박흥숙전
이시대의아벨
그해가을
망월리비명
망월리풍경
독주

III.벌거숭이산을위하여
청산별곡
풀어주소서나두려움에떨도다
벌거숭이산을위하여
회생
군무

현대사연구-1
한림별곡
디아스포라-슬픔에게
디아스포라-환상가에게
디아스포라-발에게
디아스포라-길에게
사랑을위한향두가

IV.상한영혼을위하여
상한영혼을위하여
객지
봄여름갈겨울
황혼일기
산지기를노래함
로스트로포비치의첼로
김춘수
히브리전서
서정민소전
가을편지

V.사랑법
사랑법첫째
사랑법세째
사랑법네째
사랑법다섯째
사랑법여섯째
사랑법일곱째

해설
고정희의의지와사랑ㆍ김주연

출판사 서평

자유로운거리에서도안전한통치를청탁하는시대,불쑥일어선시편들

고정희의시는짙은시대성으로어쩔수없이시가씌어진당대의세상을불러일으킨다.납작하게누워있던그세상은벌떡일어나이곳의사람들에게묻는다.살아지는지살아가는지,그리하여살만하신지안녕하신지……지금,당신들이바라는안녕은안전하게통치해달라는청탁이아닌지,사람들의다양한‘목소리’는인터넷댓글창의‘소리없는아우성’이아닌지……다양성의사회,하지만선택의여지는없는아이러니한세상.‘금지를금지하자’던반(反)권력의시대는가고이제,고소고발과청원이난무하는,권력에금지를청탁하는시대.또한기독교가더이상사회적구원이될수없는,세련된기복신앙의세상이기도하다.그렇기에,그럼에도,고정희시인의시편들이40여년이지난지금/여기에서호명되는이유는그치열함이만든여백이사람들의마음에빈틈을넓혀주기때문일것이다.그때의어느밤낮은지금의어떤날,그시대의어느골목은이곳의어느거리이다.호명됨으로써더욱새로워지고,소환됨으로써그때와지금을연결하는,틈을메우는여백,여백을채우는시.

[……]
유산없는한시대가저물고있었지
그러나친구여,나는오늘밤
오만한절망으로똘똘뭉쳐진
한사내의술잔앞에서
하느님을모르는절망이라는것이
얼마나이쁜우매함인가를
다시쓸쓸하게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등에업은행복주의라는것이
얼마나맹랑한도착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음미하면서,오직
내희망의여린부분과
네절망의질긴부분이
톱니바퀴처럼맞닿기를바랐다
[……]
?「서울사랑?절망에대하여」부분

참여의시,여성의시,내성(內省)의시,영원한‘이시대의아벨’의시

권력이사랑이시가배달되는시대,반성도사과도성찰도전시되는시대,지성은집단에서생산되고개인은그것을소비하는시대,스스로아벨이라고생각하지만사실은카인인,살아남은자의이중성,또는이기적모순의시대.1983년의『이시대의아벨』은아벨되기를갈망하는살아남은자의속죄이고실천이라면,2019년의『이시대의아벨』은살아남은자의손을내려다보게한다.그손에묻은피는누구의것인지,부드럽고말랑말랑한칼끝으로찌른그몸은누구의몸인지.
역사는과거를돌아봄으로써현재를진단하고미래를예측하지만,시는언어를넘어섬으로써미래에다가간다.당대의삶에천착하지만사회현상의깊은속으로흐르는저류를발견하는것은,(당대의)언어로는불가능하다.그때의언어를넘어서는언어는지금의언어에닿아있고,언어를넘어선그무엇,즉,시에닿아있다.고정희시인의시가,‘참여’로만머물렀다면그의시는이미지난세기에박제되었을것이다.참여의시로서,또한여성의시로서시대를관통하는목소리는밖으로만향해있지않고자신의내면을돌아나가는경로를지닌다.자신을성찰하는내성(內省)의시는고정희시의밑바닥을흐르는힘이다.유연한폭력에내성(耐性)이생긴이시대의‘카인’에게‘당신은아벨이아님’을성찰케하고그아픔을자각하게한다.그리하여‘영원한’이시대의아벨이되라고한다.

상한갈대라도하늘아래선
한계절넉넉히흔들리거니
뿌리깊으면야
밑둥잘리어도새순은돋거니
충분히흔들리자상한영혼이여
충분히흔들리며고통에게로가자

뿌리없이흔들리는부평초잎이라도
물고이면꽃은피거니
이세상어디서나개울은흐르고
이세상어디서나등불은켜지듯
가자고통이여살맞대고가자
외롭기로작정하면어딘들못가랴
가기로목숨걸면지는해가문제랴

고통과설움의땅훨훨지나서
뿌리깊은벌판에서자
두팔로막아도바람은불듯
영원한눈물이란없느니라
영원한비탄이란없느니라
캄캄한밤이라도하늘아래선
마주잡을손하나오고있거니
?「상한영혼을위하여」전문

강한의지와생명에대한사랑이야말로고정희의시를지탱하고있는두개의축이다.그는몹쓸인간과악덕의현실에분노하고,삶의허무함에좌절하고,때론인간으로서의어쩔수없는고독에쓸쓸해한다.그것은인간을황폐하게하는문명의근본적죄악으로부터오기도하며정치적?사회적상황이원인이되기도한다.그러나어떤경우에있어서든지그는결코쉽게절망하지않는다.그의지는“상한갈대라도하늘아래선/한계절넉넉히흔들”린다는의식이그의생각깊숙이단단히자리잡고있기때문이다.상한갈대가한계절흔들릴수있는것은사실이지만,이시에서중요한것은“하늘아래”에서라는생각이다.하늘아래아니라면,어디서상한갈대가한시인들버틸수있으랴.결국아무리버림받고핍박받은,혹은소외되고,상처입은영혼이라도하늘을제대로바라볼수있는올바른정신만갖고있다면,결코절망하지않는다는것이다.
?김주연,「고정희의의지와사랑」시집초판(1983)해설에서

시집속으로

설흔두살의늦가을
징그러워라
설흔두살여자의독기와슬픔으로
설흔두해뿌리내린머리를깎았다
나치수용소의유대여자들처럼
나는내땅에서삭발했었다
자수성가세대의아픔을헤집고
즈믄강물휘도는소리
간간이들으면서
유대여자처럼거울을보았다
파르스름한벌거숭이산위에
튼튼한원목들쿵쿵쓰러지고
거센마파람맨발로몰려와
열두번도더추위를덮었다
모자를쓰고거리로나왔다
모자속에서너를바라보았을때
세상은어김없는빈집이었다
허천들린외로움의세상을
타는목젖으로벌컥벌컥들이키며
유대여자처럼나는걸었다
(하느님도침묵하신잘익은땅이여)
껄끄러운입안에서아직
단내가풍기지만그래도
푸른신호등이잘보이는두눈에
철철넘치는총명한눈물,

설흔두해뿌리자르고나서도
그리움하나만은끝내지못했다
종말론적벼랑에서너를바라보았을때
우리는이제어둠의꽃이었다
단발령의격문이었다.
―「그해가을」전문

너희아벨은어디에있느냐

너희고통을짊어진아벨
너희족보를짊어진아벨
너희탐욕과음습한과거를등에진아벨
너희자유의멍에로무거운아벨
너희사랑가로재갈물린아벨
일흔일곱날떠돌던아벨을보았느냐?
아흔아홉날한뎃잠을청하던아벨을보았느냐?

이제침묵은용서받지못한다
돌들이일어나꽃씨를뿌리고
바람들이달려와성벽을허물리라
지진이솟구쳐빗장을뽑으리라
바람부는이세상어디서나
아벨의울음은잠들지못하리
―「이시대의아벨」부분

시집초판뒤표지글(시인의글,1983)
시쓰는행위가곧신념의도구가되어야한다고는생각하지않지만그렇다고시와행동은분리되어야한다고구변을늘어놓는사람들에대해서도용납되지않는다.나의시가관심하는문제는삶자체이지결코이념의문제가아니라고생각해왔다.
우리의삶의영역은모든것을포괄하고있다.정치·경제·사회·문화·전통의문제들이곧우리삶의현장이며그것들과내삶이부딪는장소에서우리는인간이무엇인가,어떻게살아야하는가를질문하게된다.나의시는그러한삶의현장에서의고뇌의궤적외에다른것이아니다.나는정치가도사회학자도경제학자도아니지만개개인의삶이어떠한경우에도그것들의규제아래놓여있다는것을고통스럽게생각해왔다.그러한제도적억압의굴레를극복하려는힘,그것이자유의지라고말할수있다면나의시는항상자유의지에속해있는하나의에너지였다.

시집초판시인의말(1983)
두번째시집『실락원기행』(1981)이후에발표된2,3년동안의작품을제5부로묶었다.올해5월에상재한장시집『초혼제』가그1부에속한다면이시집은제2부에속한다고말할수있다.그리하여1년에두권의시집을묶는다는사실이외형적으로내게상당한부담이되어왔지만그러나기왕에정리된작품들을단지출판일을늦추기위해서갈무리해두는것은나로서는무의미하다는결론에도달했다.허물은제때에벗어야하기때문이다.
이시집을통해서보다견고한자기점검의기틀이마련되기를자숙하고싶다.
1983년9월20일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