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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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맑고도 끈끈한 부정의 얼룩들”
기록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어둠을 나누는 시간
올해로 등단 19년을 맞은 이영주 시인의 네번째 시집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번으로 출간되었다. 『차가운 사탕들』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이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유희와 우화적 상상력”(문학평론가 김용희)이 돋보이는 시, “아름답게 악행을 퍼트”리며 “아름다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찬란한 착란의 시간”(시인 김소연)을 펼쳐놓는 시를 통해 이영주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시구가 곧바로 자신의 몸으로 체험되는”(문학평론가 황현산) 언어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의 이러한 독특한 시 세계를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 무엇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붙박여버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불가능의 얼룩들이 번진 이야기 속에는 매듭지어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사건들이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 그 사건들에서 부서져 나온 파편들과 버팀목이 되지 못한 허약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그리하여 입이 닫혀버린 화자들과 그럼에도 비어져 나오는 신음 같은 발화들이 시집 전반에 떠다닌다.
이영주의 언어적 상상력은 앞서 밝힌 바처럼 “자신이 쓰고 있는 시구가 곧바로 자신의 몸으로 체험되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부분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그곳’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없이 추락하고, 타인과의 소통조차 단절된 ‘그곳’이자 ‘이곳’에서, 시인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시선으로 ‘비현실’ 혹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이 장벽 앞에서 시인은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까?
저자

이영주

1974년서울에서태어나명지대학교문예창작학과박사과정을졸업했다.2000년[문학동네]로등단했다.시집으로『108번째사내』,『언니에게』,『차가운사탕들』,『어떤사랑도기록하지말기를』,『여름만있는계절에네가왔다』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십대
첫사랑
방화범
숲의축구
기념일
교회에서
여름에는
개와나
빈노트
숙련공
소년의기후
은,멈추지않는소년
유리공장
양조장
해변의조우
아침
여름의애도

2부
집들이
영혼이있다면
폭염
손님
우유급식
단어들
독서회
한밤의독서회
없는책
문장연습
오래전홍당무
게스트하우스
친구를만나러
축구동호회

3부
외국여행
유광자원
잔업
육식을하면
슬픔을시작할수가없다
광화문산책
4월의해변
광화문천막
해바라기
북해도
우물의시간
목수일기
무한
엄마의과일청
여름
열대야
이집트소년

4부
낭만적인자리
녹은이후
영토
박쥐들의공원
결혼
병속의편지
아침식탁
아홉걸음
휴일
북해도여관
독립
빈화분
친구의집
연대

해설
기록할수없는―공포와부정의이야기조재룡

출판사 서평

불가능성의가능성

각자의말들로서로를물들일수있을까

나는그의어둠과다른색

오래전이동해온고통이여기에와서쉬고있다

어떤불행도가끔은쉬었다간다

옆에앉는다

노인이지팡이를내려놓고태양을바라보고있다

흰이를드러내며나는웃고

우리의혼혈은어떤언어일지생각한다
-「외국여행」전문

고통은시간이지난다고끝나지않는다.단지“어떤불행도가끔은쉬었다”갈뿐이다,그렇게“오래전이동해온고통이여기에와서쉬고있다”.시인은그옆에앉아생각한다.이렇게각자의고통이있고,그색이서로다른데소통은어떻게가능한가,그건어떤언어로말해야하는가,그고통의혼혈은어떤언어인가.그러곤곧깨닫는다.“아무도이이상하고슬픈순간은기록할수없는거”(「유광자원」)라고.

그런데정말그럴까?

이렇게깊고깊게파고드는날이면연필을깎고또깎습니다.저는이제편지를쓸사람이없네요.제게는도착할편지가없습니다.너무미안해서아무에게도쓸수가없는걸까요.너무미안해서죽이고싶은걸까요.다른세상은없으니까.다른너도없으니까.미안하면미안한채로이를갈며뜬눈으로잠이들어야하니까.[……]흑심은제마음에없어요.단한번도쓰지않은편지안쪽으로뭉개져서계속깊어지고있습니다.다른세상은없는데도말입니다.사람은사람이상도이하도아닙니다.그저사람일뿐인데그것도진실은아니지요.그것을자꾸되새기면서비참해질필요는없어요.아름다운연필은늘손에서손으로건네집니다.재의단어를나누어가지고우리는가까워지지않기위해가만히손을잡습니다.[……]죽음을들키지않는삶.새벽에는편지를쓰지만그손은투명하고제게는손이없습니다.
―「우유급식」부분

이시에서화자는“연필을깎고또깎”지만편지를쓸대상도,쓸말도,자신에게도착할편지도부재한상황이다.이부재와불능의원인은시에서드러난“미안해서”를통해짐작해볼수있을뿐이다.그리고결국이부재와불능의끝에서확인할수있는것은“죽음을들키지않는삶”이다.죽음을밟고선지금도삶이이어지고있다는이자각은,부정의끝에서다시한번더부정함으로써,시인으로하여금불가능성의가능성을타진하는말로채울수밖에없는,기록할수없는투명한손으로기록이가능한편지를쓰게만든다.그렇게이영주는‘기록할수없음’그자체를기록하는행위를통해불가능성의가능성을타진해나간다.

말하지않으면서말하는방식

이세계는상실의슬픔으로가득하지만,이것은오롯이기록될수없다.죽음도죽음으로기록되지못하는이러한실종과상실이이시집의도처에서참혹의혹한처럼차오르고,뜨거운불꽃처럼작렬한다.그러나시인은비극-죽음을보고나묘사의형태로함부로재현하지않는다.시인은“입을벌리지않고”(「빈노트」)비극과죽음의기록할수없음을끝내기록의문턱으로끌고온다.말하지않으면서말하는방식으로.표현할수없으며함부로재현해서도안될사연과절망을,시인은백지위에긁고새기듯,필사를한다.

시는각기다른시간의흔적들로지금-여기를찌르는능동적인사유와날선감각을선보이면서,개인적이고도내밀한기억으로저장되고솟구쳐,우리에게,너에게,나에게,꿰뚫고들어오며,세상의모든‘삼인칭’을지워내는일에몰두한다.[……]행위를부추기는진술은어김없이시구석구석에서낯선감정을새겨넣으면서일종의‘추임’의형식을취하지만,그것을기술하는시점은벌써‘나-너-그’가번갈아활용되는곳에서변주된다.이렇게문장하나하나에기이하고도고유한하중이실린다.‘나-너-그’는여기서제경계를취하고,가장주관적인상태에서,‘씀’-‘쓰다’-‘기록’의불가능한가능성을쏘아올린다.
―조재룡해설,「기록할수없는―공포와부정의이야기」부분

이번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조재룡은이영주가“이와같은방식으로밑바닥에내려가타자의목소리를듣고,그목소리를자기자신의것으로전환해내며,그렇게기록되지않는것,저밑바닥물에젖은무언의말들을발화하고,할수없음과쓸수없음을,너-나-그의목소리로필사하듯새기는데성공한다”고밝히고,그리하여이영주의시가“불행과비극의상실을바라보는외부의소실점을오로지나를통과하여당도할내부의사건으로전환해내면서,마침내타자의입술에내차가운슬픔을달아놓고,혼자만의중얼거림을너의중얼거림으로치환하는어려운일을수행한다”고평한다.

온통할수없음에대한시들로채워진이시집의마지막에이르러얼굴을드는질문은비극과죽음과슬픔으로가득한이불능의세계에서연대란무엇이고어떻게이루어지는가,하는것이다.

어둠이쏟아지는의자에앉아있다.흙속에발을넣었다.따뜻한이삭.이삭이라는이름의친구가있다.나는망가진마음들을조립하느라자라지못하고밑으로만떨어지는밀알.옆에앉아있다.어둠을나누고있다.
―「연대」전문

고통과슬픔의끝은장식하는시에서시인은“어둠을나누고있”다고말한다.불행옆에같이앉아혼혈의언어를생각하던그모습으로(「연대」).기록되지않는것을결국은그자체로기록한이번시집에서,시인은낯선어휘를통해알리바이로제공된사건들을원체험,원시간으로복원하려한다.그것이“어둠을나누”는시간이자지금우리의연대방식인것이다.

이시집의이야기들은이렇게‘이름만바꾸면바로당신의이야기’,그러니까,이름만바꾸면나-너가모두주인인이야기이며,입을다물수없는경악과충격이후,세계가상처의모습을하고,지고,피고,떠다니고,열리고,스며들고,출렁거리고있는지금-여기의이야기들이다.
―조재룡해설,「기록할수없는―공포와부정의이야기」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