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인칭의 자리 (윤해서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 (윤해서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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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디에도 없는 너를 당신, 하고 부를 때
내가 부르는 것은 너인지, 나인지, 그인지”

누구의 자리도 아닌 위치에서
모두의 자리를 조감하는 시선
시적 사유와 유려한 문체로 주목받아온 윤해서의 첫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문학과지성사, 2019)가 출간되었다. “엄청난 독립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문학과지성사, 2017) 이후 꾸준히 쓰고 다듬은 장편으로, 저마다의 자리에서 필멸의 생을 견디는 인물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조감한 작품이다. 윤해서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이 가능한 서사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유하며 헤매는 일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한 무형의 지도를 작가가 이끄는 방향으로 함께 창안하는 작업이며, 그로 인해 누구도 쉽사리 이르지 못했을 언어적 시공간에 가까스로 도달하는 경험이다. “무엇을 찾으려 하지 말고, 무엇도 찾을 것이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는 “생각하는 나마저” 지워버려야만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0인칭의 자리』는 개별적인 생의 한순간, 불안과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들의 초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낱낱의 사건과 감정이 종국에는 우리 모두의 공통 감각이자 미래의 전망으로 수렴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의 이야기가 곧 너의 이야기가 되고, 다시 그와 그녀의 이야기에 겹쳐지는 독서 경험은, 책장을 덮을 즈음 내가 나를 범람하는 방식으로 흐르다가 끝내는 다시 나의 자리에서 맺히는 듯한 몽환적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1인칭, 하나였을까. ‘나’에 대해 말하는 ‘나’는 어쩌다 하나뿐인 1인칭이 되었을까. ‘나’는 하나도 둘도 아니고, 때로 ‘나’는 하나와 둘에도 턱없이 모자라고, ‘나’는 0인칭이나 무한 인칭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 ‘나’는 1인칭이 되어서 혼자인가. 어떤 ‘나’도 하나는 아닌데. (p. 140)
저자

윤해서

2010년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으로등단했다.소설집『코러스크로노스』(2017),소설『암송』(2019)이있다.

목차

0인칭의자리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제가찾고싶었던것은바로그날그자리,
거기없던어떤것이었겠죠”

윤해서의소설속인물들은어떤한계의상황과맞닥뜨리곤한다.그들은앎을찰나적으로목격하지만그것을정확하게인식하지는못한다.그저대상을영원히파악할수없으리라는예감만을어렴풋이지니고있을뿐이다.

제가어머니의눈에서보았던응시.저는그것을다시발견하고싶었던거같아요.그건말할수없는어떤것이죠.그사진에남아있는어머니의눈빛만이그것을나에게끊임없이던질뿐이에요.[……]저는그것이무엇인지알고싶었어요.그래서더많은사람이던지는눈빛을,더많은사람의삶을담고싶었던것일지도몰라요.(pp.29~30)

어린시절,카메라속어머니의눈에서“말할수없는어떤것”을발견한남자는성인이되어서도그것을찾아헤맨다.사람들을만나고이야기를듣고무수한눈빛을프레임에담는다.하지만그런과정을통해남자가알게된것이무엇인지는끝내밝혀지지않는다.마치앎에다다르기직전에암전되는영화의엔딩처럼『0인칭의자리』에서윤해서는세계에대한인식의한계를반복적으로묘사한다.

눈을부릅뜨고어둠속을바라보았다.반짝,반딧불이가나타나기를바라면서.어둠을계속바라보았다.아무것도보이지않는데계속보고있는건뭘까.아무것도보이지않는데도보고있다고믿는건뭘까.어둠속에서.이렇게새까만어둠속에서.내가이토록기다리고있는건.(p.75)

애인과함께찾아간반딧불이숲에서날아다니는빛은커녕“완전한암흑,진짜어둠”을경험한여자는이것이바로“죽음”이아닐까생각한다.그리고빛이아닌어둠을통해서,삶이아닌죽음을통해서갑작스레자유로움을느낀다.무의미에서의미가도출되는순간.어쩌면윤해서는인식의불가능성을경유해야만삶의가능성을발견할수있다고말하는지도모른다.

“그러므로당신,당신은무인칭,
당신이없는모든곳에당신이있어”

그렇다면윤해서가발견한삶의가능성은무엇일까.그것은『0인칭의자리』가씌어진형식과관련있을것이다.무수한사람이겪는,얼핏보기에는무관한에피소드의나열.그리고곳곳에삽입된,정체를알수없는화자의목소리까지.전통적인독법으로는도무지의미를가늠하기어려운이형식은나와너,그와그녀의이야기를비차별적으로배치함으로써인물간의경계를지우는역할을한다.

나를바꾸고싶어.단조에서장조로.한없이밝게,가볍게.투명한음에서더투명한음으로.어둠과망각과시는그대로두고.나만.오로지내가기억하지못하는.기록할수없는.나만.(p.98)

이러한작업은문학이궁극적으로추구하는‘타자가되어보기’라는불가능한임무를언어의시공간에서구조적으로축조해내기에이른다.페이지를넘길수록,인물과에피소드가누적될수록우리는이모든이야기가잘게부서진편린이아님을,하나의거대한조감도의일부임을깨닫게된다.그러므로『0인칭의자리』는텅빈이야기인동시에이세계전체를품고자하는서사적야심과모험이라할수있다.또한경계를지우는유동성,“0과1사이”의위치에서무한히흔들리는진폭상태만이새로운가능성의길임을일깨워주는드물고귀한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