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팔레트 - 문학과지성 시인선 540

밤의 팔레트 - 문학과지성 시인선 540

$12.00
Description
“내가 너의 용기가 될게”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곁에서 기꺼이 함께 흔들리는 시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강혜빈의 첫 시집 『밤의 팔레트』가 출간되었다. “블루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어떤 시절의 기분과 세계”(박상수)에서 출발한 이 시집은 시인의 삶 전체를 기록한 세심한 수기이자 또렷한 선언 혹은 무수한 고백이다.
『밤의 팔레트』에는 다른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에 이물감을 품어온 한 사람의 혼란과 우울이 담겨 있다. 아프지만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슬프지만 슬픔에서 벗어나 끝내 스스로를 사랑하려 애쓰는 강혜빈의 시들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 되어 ‘나’를 닮은 누군가에게 “울 권리”와 “힘껏 사랑”함을 전해주려 한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커다란 구름을 만들고, 희미한 빛들이 모여 어둠을 밝게 비추듯, 가까이 들여다보면 스펙트럼으로 읽히는 무지갯빛 진심이 당신에게 가닿아 용기가 되길 바란다.

이 세계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우리’가 이렇게 많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소속감과 연결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슴 뛰는 체험. 나는 강혜빈의 첫 시집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서로를 연결하고 용기를 나눠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우울, 자기 정체성의 부인과 인정 사이에서 고투하던 한 인간이 죽음에서 사랑으로 건너오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시를 통해 기록하고 발산하고 끝까지 ‘파란 피’를 지켜내었다는 것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 ‘파란 피’는 다른 정체성의 표지이면서, 슬픔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시를 쓰고 여전히 이곳의 삶을 살아가는 한 예술가의 유일무이한 상징이다.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저자

강혜빈

시인강혜빈은2016년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밤의팔레트』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드라이아이스
커밍아웃
너는네,대신비,라고대답한다
이름없음
필름속에빛이흐르게두는건누구의짓일까
언더그라운드
감정의꼬리
여기너말고누가더있니
미니멀리스트
라넌큘러스
꽃을든사람의표정이무엇인가잘못되었다
흰나무는흰나무다
dimanche
마녀는있지
일곱베일의숲
네온웨하스
Bonnenuit
108개의치치

2부
열두살이모르는입꼬리
뱀의날씨
ghost
괄호속에몸을집어넣고옅어지는발가락을만지는중입니다
그림자릴레이
팬지의섬
하얀잠
바깥의사과
가려운일요일
물고기아파트
엄마와캉캉을
가만히얼음칸
나,마사코는생각합니다
언덕위의목폴라소녀들
등헤엄
돌아오려면어디서부터잘못된이야기
벤다이어그램
셀로판의기분
밤의팔레트

3부
거울의시니피에
몇시의샴
무지개판화
타원에가까운
워터라이팅
언니의잠
오모homo를발음하면옹on이되는
홀로그램
요절한여름에게
빙하의다음
핑퐁도어
닮은사람
결과적인검정
매그놀리아
여름서정
무지개가나타났다

해설
웃음소리는먼미래까지전해진다-박상수

출판사 서평

블루의세계
―“있잖아,보통이란뭘까”

언제나솔직한일기를썼으나언제나빼앗겼다.
선생님은빨간펜을들었고모르는친구들이일기장을돌려읽었다.
그런기분으로시를썼다.
―2016년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수상소감에서

내가나인게어떻게쉬울수있죠?
―「무지개가나타났다」에서

색감이풍부한시집『밤의팔레트』에서가장두드러지는색‘블루’는정체성의상징이며화자와공존하게된우울을의미하는듯하다.유년시절,남과다른제정체성을맞닥뜨린화자는스스로에대해“눈알이파랗게바래”고속으로울면서“비밀을키우는”토끼가되어버렸다고적는다.빨간눈의여느토끼,빨간피가흐르는보통사람인척자신을감춰도보지만나에게‘파란피’가흐른다는사실을누구보다내가잘알고있다.사람들은파란나에게자주“빨간펜”을들이댔고작은악의를쉽게던졌다(“내컵을쓰기전에혈액형을알려줄래?”,「커밍아웃」).“나의기형은내가나인것”(「그림자릴레이」)에서비롯되었으니,자신을드러내지않기위해“아주옅은방식으로숨을쉬”(「몇시의샴」)었다.누구도‘날짜가지난물컹한토마토’같은“축축한비밀”을어떻게“보관”해야할지알려주지않아서(「커밍아웃」),혼자“오랫동안/찢어진마음에골몰”(「미니멀리스트」)할수밖에없었다.감추지도드러내지도못한채“옥상에서떨어지기직전”(「시인의말」)이되어서야겨우“나는내가되고싶어”(「몇시의샴」)졌다.1부와2부에걸쳐세심하게펼쳐져있는자신을죽이는방식에서사랑하는방식으로의전환과정을거쳐,마침내“옷장에서알록달록한비밀”(「커밍아웃」)이흘러나온다.그리고숨기고싶었던,나를나로만드는그색깔과물기를무기로삼아시인은다른싸움을시작한다.

아이의싸움
―“언니,이도시는추한표정을숨기고있어”

건강해지기위해굳어가는것들은아무래도지겹습니다
―「등헤엄」에서

자신이다르다는것을받아들이고순간적인상태가아닌지속적인삶으로서이다름을껴안으며살아가는것.내가나라는(너무나당연한)사실을증명하기위한이싸움의상대는강혜빈의시에서“덩어리”로불리는주류-다수다.“자기가싼말을치우지않고”“그냥서로가서로를복사”하며“그냥서로가서로를오려주는손가락”으로(「꽃을든사람의표정이무엇인가잘못되었다」)“악의없는악”(「흰나무는흰나무다」)을쏘아대는존재들.이미딱딱하게굳어버려다른사람의말을들으려하지않는자들.“누구나어릴적이있었고/다옛날일”(「벤다이어그램」)이라고말하며쉽게‘누구나’‘다’에함몰되기를자처하는무표정한어른의얼굴.강혜빈시의화자가아이같다는인상을자주받게되는이유는시인이이‘덩어리’가되는일을경계하며덩어리에저항하고있어서가아닐까.주류-다수에맞서기위해서는동료가필요하다.“같아보이지만서로다르고,다르지만하나의무지개로아름다움을만들어”내는“우리”(박상수)말이다.아이는천진하기때문에강하다.유연하기때문에뒤섞여‘우리’가될수있다.흔히부정적으로쓰이는“물컹”하고“축축”하다는표현은,강혜빈의시에서섞일수있는가능성으로재해석된다.‘물컹한표정의토마토’가지닌‘축축한비밀’은그렇게새로운의미를얻는다.

우리들은조금도겹쳐지지않습니다.무지개의꿍꿍이를눈치챘나요?촉촉한물방울들이문틈새로탈출합니다언제어디서다른색깔의울음이발견될지모릅니다
―「괄호속에몸을집어넣고옅어지는발가락을만지는중입니다」에서

사랑의미래
―“눈부신여름안에서/다만조용한사랑이지속되었다”

잘봐//그것이우리가사랑하는방식
―「몇시의샴」에서

한걸음더내딛어본다.“인사를건네려고펼친손가락이욕이되는곳에서//나같은사람이둥글게모여있는곳으로”(「거울의시니피에」)가기위해서.똑같아보이지만모두다른물방울이닿으면햇빛의백색광에숨어있던빛들이제색을띠듯이,‘나’와닮은얼굴들에표정을더해주기위해강혜빈은차이를짚어내개성을부여한다.이시집의해설을맡은박상수는그것을“구분하면서뒤섞기”라고일컫는다.비슷해보이는것들이세세히구별되거나전혀반대의것들이뒤섞이는이런방식은주류(덩어리)가“자신에게강제한부정적규정을용도변경해내려는의지”에서시작된저항방법일것이다.시인은애달프고절절하게삶과죽음,사랑을말하면서‘우리’를위해싸운다.
3부에서는그지난한싸움의끝에도달하려는곳이드러나있다.“한사람은한사람의곁에서/잠들고싶답니다그뿐이랍니다”.사랑에허락을구할필요가없고(“우리는/사랑합니다사랑해도,/괜찮지요사랑해도/괜찮아요?”,「무지개판화」)“내가나를증명하지않아도될때”(「미니멀리스트」)까지강혜빈은“당연한것에질문을던지는일.사람을생각하는일.곁을바라보는일”(수상소감)을멈추지않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