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12.00
Description
데뷔 30년,
허연은 이제 허연의 이야기를 한다
올해 데뷔 햇수로 30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다섯번째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대 초입, 「권진규의 장례식」 외 일곱 편의 시로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장한 허연은 도시생활자 개인의 욕망과 공포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1995년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온 뒤 “해설을 쓴 평론가는 죽었고 시를 쓴 시인은 사라졌다”라는 소문이 오래도록 무성했고, 수많은 불온한 청춘들이 이 시집을 필사하며 허연을 앓았다. 그가 13년의 긴 침묵을 깨고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시단에 돌아온 이후에는, 시인 특유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와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까지 연이어 화제작을 출간했다. 이 여정에 대해 시인은 이번 시집 발문을 쓴 시인 박형준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술했다.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소주병을 깨서 세상의 옆구리를 한번 찌르는 심정으로, 두번째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돌아온 탕자처럼 내가 다시 시로 돌아왔다는 선언, 세번째 『내가 원하는 천사』는 이제 시와 대결하지 않고 시를 끌어안겠다는 화해, 네번째 『오십 미터』는 내가 결국 시 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포기였지. 이번 시집은 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세상에 그냥 있었던 거구나 하는 인정…… (p. 151)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발견한다. 생활 속에서 어른대는 시, 자연스러운 시들이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날카로워서 사물의 핵심을 간파해낸다. 한없이 허무로 뻗어온 허연의 시였지만 그 중심은 결국 이 세계의 낮고 비루한 땅 위에 있었다. 더러운 거리와 가난한 사람들, 병듦과 죽음을 한껏 끌어안고 북회귀선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시인. 그가 이제 더욱 진솔하고 담백한 언어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허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시집이 가닿을 당신에게 노래 될 시간을 마련하며.
저자

허연

1966년서울에서태어났다.집다락방과학교근처도서관에서손때묻은고전들을꺼내읽으며어른이됐다.고전을만나면서세상이두려운것만은아니라는진리를깨달았고,지금도‘독서는유일한세속적초월’이라는말을책상머리에붙여놓고있다.연세대학교에서「단행본도서의베스트셀러유발요인에관한연구」로석사학위를,추계예술대학교에서「시창작에서의영화이미지수용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다.일본...

목차

시인의말

1부
트램펄린/세상의액면/어떤거리/십일월/만원지하철의나비/슬픈버릇/상수동/이장/그해대설주의보/교각음화/해변/기억은나도모르는곳에서바쁘고/구내식당/무반주/새벽1시/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우리의생애가발각되지않기를/시월/초봄/빵가게가있는풍경/전철역삽화/북해/바닷가풍습/열대

2부
어느사랑의역사/24시해장국/두려운방/누구도그가아니니까/강물에만눈물이난다/트랙/애인에게는비밀로하겠지만/역전스타벅스/절창/발인/80년대/경원선부고/소년記/당신의빗살무늬/내뒷모습/죽은소나무/눈의사상/용궁설렁탕/이별의서/환멸의도서관/세상의액면2/산새/산31번지

3부
이별은선한의식이다/생은가엾다/흡혈소년/눈물이란무엇인가2/무방비도시/무반주4/무반주3/나일강변/시어들/추억,진경산수/해협/지옥에관하여/21세기/침대의시/상하이올드데이즈/시립화장장/계시/패배/강변비가/하얀당신/독/중심에관해/남겨진방

발문이곳에선모든미래가푸른빛으로행진하길-박형준

출판사 서평

자발적으로도피에실패한니힐리스트

천성이허무주의자인허연은초기시에서세상에대한복수감을가감없이드러내곤했다.괴팍하고불친절한칼잡이처럼‘세상의옆구리를한번찌르는심정’으로썼던시절,그의시는차마발딛을수없는세상으로부터의도피를희구했다.미학으로의강한열망과더불어죽음으로서의자유를꿈꿨던젊은그의시「무반주無伴奏」가이번시집에서같은제목의연작으로등장했지만전혀다른톤으로풀려나오는지점에서그의변모된태도를알아볼수있다.

에릭사티는사람이었다에릭사티는돈을벌고싶어했다에릭사티는알코올중독자였다에릭사티는은행엘가지않았다에릭사티는죽었다자유는죽음처럼죽음은자유처럼에릭사티는사막엘가고있었다모래바람으로가고있었다
?「無伴奏」부분(『불온한검은피』,세계사,1995)

행복하냐고물을때마다
바닥에침을뱉는

골깊은얼굴들
재개봉관에서나와
수줍은밥집에모여
백반을먹고

밤이오면
금이간보안등아래
어깨없는아이들이
그림자놀이를한다

[……]

자정이되면
다행스럽게
그날의신神이태어나고

종주먹을쥔아이들은
한손에빵을들고코피를닦는다

이곳에서희망은
목발을짚고집으로돌아온다
?「무반주」부분

이제허연의세계는모래바람으로사라지지않는다.무감한일상,폭력과어둠속에서도매일신이태어나목발짚은희망으로되돌아온다.이렇게그의시가점차단단해지고빛을더하게된이유가꾸준한공부와독서에서온자기확신에서비롯했다고시인은밝히기도하였다.그간고전을넓고깊게탐독하여이와관련한다수의에세이를집필해온허연이기에독자들에게도낯선사실이아닐터다.스승에게시를배우지도않았고타인의텍스트를모사하지도않았던,단지외삼촌의서가에꽂힌영시집들을읽어가며작은파장으로큰물결을만드는시의언어에빠져들어독자적인스타일을구가했던허연.시를앓고,시로성장해온그가다섯번째시집에이르러보여주는자기세계는어떤완성을향해부단히가고있다.

냉소하고식었다해도,끝내노래로기억될‘어느사랑의역사’

돌진하는건재미없는게임이야.잘생각해.너는중독되면안돼.

중독되면
누가더오래살까?이런거걱정해야하잖아.

[……]

그러니까다시는가슴덜컹하지말기.
이별의종류는너무나많으니까.또생길거니까.

너무많은길을가리키고서있는표지판과
너무많은방향으로날아오르는새들과
너무많은바다로가는배들과
너무많은돌멩이들

사랑해.그렇지만
불타는자동차에서는내리기.
?「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부분

세속도시의냉소주의자허연이지만불타본자만이식을수있고(「이별은선한의식이다」),날아오른자만이떨어질수있음(「트램펄린」)을알고있기에이번시집에서도사랑을정면으로응시하는시인으로우뚝선다.매순간최대속도로달음박질할수는없다는사실을받아들이지만,그래서불타는자동차에서는내려야하지만,그래도누군가에게나비가되어줄사랑을또다시해내고야만다.가장충실하게사랑을겪어낸자만이할수있는그의이야기는,읽는이를노래로이끌어부지불식간시에온전히녹아들도록한다.언제나눈치보지않는솔직한이야기로우리를만나는허연이그의깊은사랑과무한한깨달음으로당신을만날채비를마쳤다.장맛비처럼쏟아질시인의노래가이제여기에왔다.

-

■본문에서

트램펄린에날던지면서말한다
“말해줘가능하다면내가세상을고르고싶어”

생각이있으면말해주리라믿었지만
트램펄린은그냥
나를떨어뜨리고
미워하지도않으면서나를떨어뜨리고
그러면내처지도최선을다해떨어지고

세상에서트램펄린이모두사라졌으면좋겠다

그렇지만아쉽다
날아오르는몇초가달콤했기때문에
?「트램펄린」부분

어린시절.
큰물이쓸려간아침,
교각밑에살던거지소녀가떠내려갔을까봐
숨도안쉬고달려갔던교각
마음졸이며달려갔던,
그슬픈음화가생각났다.

병에걸린걸까.
엉겨붙은눈꼽에
눈도제대로못뜨는고양이들이
짝짓기를한다.
세상에다시오지않을거니까
적어도그것만은알고있으니까
공룡뼈같은교각아래서
고양이들은생을불태운다.

교각밑을걷다보면
모든것이이상하게음화淫?로바뀐다
녹물이눈물처럼흘러내린교각에는
설익은유서들이있고
누군가의투항이있고
어린나이에생을마친친구들과
그을린맹세들이있다.

스프레이로쓴억지스러운구호몇개가
중년의날위협하고
이따금씩덜컹대는상판에서는
콘크리트가루가축복처럼쏟아졌다.

트랙처럼뻗어있는한강다리밑에숨겨놓은
그비밀스러운음화를지울수가없다.
내가음화였음을.
?「교각음화」전문

중심을잃는다는것
어디서나타났는지모를회전목마가
꿈과꿈이아닌것을모두싣고
진공으로사라진다는것

중심이날떠날수도있다는것
살면서
가장막막한일이다

어지러운병에걸리고서야
중심이뭔지알았다

중심이흔들리니
시도혼도다흔들리고
그리움도원망도다흔들리고
새벽에일어나
냉장고까지가는것도어렵다

그동안내게도중심이있어서
시소처럼살았지만
튕겨나가지않았었구나

중심을무시했었다
귀하지않았고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없어야한없이날아오를수있다고생각했으니까

이제알겠다
중심이있어
날아오르고,흐르고,떠날수있었던거구나
?「중심에관해」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