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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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물 위를 걷는 말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
말갛게 비어 있는 생의 진실을 향하여
무한히 걸음을 내딛는 시인의 운명
일상을 다독이는 언어와 자연의 숭고를 담아내는 시선으로 많은 독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해온 김용택의 열세번째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되었다. 김용택은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를 이룬 첫 시집 『섬진강』(1985)을 비롯하여 그동안 다수의 시집을 출간하며 전통 서정시의 경계를 꾸준히 넓혀왔다.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도 시적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말하는 이와 보이는 대상의 구체성을 모두 지우는 방식으로 또 한 번의 확장을 도모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무런 것이 될 때/그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돌아갈 때 편안하다”(「기적」)라는 구절처럼 시적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던 기존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미를 텅 비움으로써 열리는 무한 가능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하여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는 시인의 원숙하고 관조적인 시선을 따라 부지불식간에 어떤 깨달음과 마주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의미에서 해방된 시어들이 언어의 가장 순수한 차원으로 돌아가는 신비 속에서 일상의 낯섦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어떤 위안이 있어 희망을 말하기는 쉬운 일이다. 어떤 대결도 없이 절망에 가닿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알게 된다. 위안도 대결도 모두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희망과 절망의 자리 아래 말갛게 고이는 생활이라는 것. 군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지직거리는 형광등 아래 묵은 김치를 꺼내다 문득 창에 핀 눈꽃을 바라보는 순간으로도 한 세계를 지우고 또 한 세계를 들이는 신비가 이 시집 속에 있다. 신용목 (시인)
저자

김용택

1948년전라북도임실에서태어났다.순창농고를졸업하고임실덕치초등학교교사가되면서책을읽기시작했다.책을읽다가떠오르는생각을글로썼더니,어느날시를쓰고있었다.1982년시인으로등단했다.그의글속에는언제나아이들과자연이등장하고있으며어김없이그들은글의주인공으로자리잡고있다.정년퇴직이후고향으로돌아가풍요로운자연속에서시골마을과자연을소재로소박한감동이묻...

목차

시인의말

어린새들의숲/날개곁으로/너와상관있는말/나비가날아오르는시간/산문시,그리고아이/아침별/지나간것들은이해되어사라져간다/노란꾀꼬리의아침/고요를믿다/서정시/아버지가돌아가시고이듬해봄,그러니까1985년/참새들이소풍나간집/내가사는집뒤에는달과밤이한집에산다/아름다운산책/너무멀리가면돌아올수없다/풀밭위의시간/나비가숨은어린나무/봄날의어떤자세/도리없는고양이의봄/슬픈놀이/꽃도안들고/달이식으면어떻게해요/어머니도집에안계시는데/비와혼자/방랑/심심해서괴로울때/지금이그때다/나의현실은직접빛나요/내소식은두고가세요/이詩를드려요/나는정지에서풀려났다/일어설수있는길/침묵의유리벽/아슬아슬가을/그어떤이전의풍경/기분좋은내손의가을/내눈에보이는것들/눈오는강에나가서는날에는/바람을달래는강물소리/사람들이버린시간/기적/양식이네집마당/하루의강가에이른나무/눈이쌓인다다음문장으로가자/꿈을생시로잇다/언젠가보았던그별/나는이바람을안다/그계절의끝/당신이서있는그나무는살구나무랍니다

발문
시인은‘다음문장’으로간다·신용목

출판사 서평

“어느날은다르고어느날은또다르다”

『나비가숨은어린나무』를읽다보면문득이것이누구의목소리인지의문이들게된다.내용정황상시인김용택의발화라여기기쉬우나씌어진단어와행간을주의깊게살펴보면목소리주체가고정되어있지않고은연중에변화함을알수있기때문이다.

마을을걸어나온몇개의길이
바람만바람만바람을따라굽이굽이모여들어한길로바다에이르렀다
생각이있어서,차마버릴수없는생각들이가슴까지차올라서
그말을하려고누구는,그누구도
바다로나간길까지출렁출렁생각을채워걸었을것이다
우리나라서쪽바다순한파도가철썩이며들어왔다
뒷걸음질로차르르자갈굴려나가는바닷가에는,누가앉아있다
―「내가사는집뒤에는달과밤이한집에산다」부분

인용시전문은4연으로나뉘어있고1연은시인이딸에게서받은문자메시지와그에대한감상으로채워져있다.그러므로우리는자연스레화자를시인으로삼아이작품을따라읽게되는데,마을풍경을묘사하는2연을지나3연에이르면불현듯그의존재가사라짐을알수있다.마을을걸어나온‘몇개의길’이한길로바다에이르렀을때,차마버릴수없는생각들을채우며걸었을‘누구’가홀연히등장하고,그누구는바닷가에앉은또다른‘누군가’를목격하기때문이다.이러한작법은시적주체뿐아니라대상까지모호한불특정성으로지우면서이빈자리에읽는이의기억과체험을직접기입하도록이끈다.그리하여김용택의시는“모은생각들을내다버리고서쪽산에걸린뜬구름”(「내눈에보이는것들」)처럼곳곳이비어있는동시에읽는이의개별적이고구체적인경험들로가득채워지기를매번성공하는것이다.


“이쪽나무에서저쪽나무잎새로나는건너서,가요”

그렇다면다채로운해석이열려있는이번시집에서시인이궁극적으로이루고자하는바는무엇일까.그것은시집속을유유히가로질러날아다니는나비의이미지를쫓아가봄으로써헤아릴수있다.

아침이아침으로밤이밤으로그리하여너를지나드디어내가돌아가고,돌아가고,돌아가는그곳,모든이들이알고있는,모든이들이다가는,모든것들의곁,바람같은봄날이나비나는봄날을지나산제비꽃핀몇개의무덤을지나검은바위넘어바람이쉬는날개곁으로
―「날개곁으로」전문

이시에서화자는“나비나는봄날을지나”“몇개의무덤”과“검은바위넘어”“모든이들이다가는,모든것들의곁”으로날아간다.그곳은어디일까.“아침이아침으로밤이밤으로”복귀하듯이아마도“내가돌아가고”자하는곳은생의기원일것이다.“내가디딘발자국을가만가만되찾아디뎌야집에닿을수있”(「너무멀리가면돌아올수없다」)듯이시인이종내이르고자하는곳은시의근원이자새로운도약을위한출발점이다.그러므로『나비가숨은어린나무』는한세월을통과하며생의진실을깨달아버린시인이기꺼이원점으로돌아가또다른삶을향해나아가려는끝없는저력을담고있다.시인으로서지난40년간깊이있고도널리사랑받는시세계를펼쳐온김용택.오늘도그는미지의방향으로한발더나아가고있다.

첫문장에오래머물러내등에
눈이쌓이는구나
평행을이루려는눈발의각도를잡아다닌다
눈이쌓인다다음문장으로가자
―「눈이쌓인다다음문장으로가자」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