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빛 (김수온 소설집)

한 폭의 빛 (김수온 소설집)

$14.00
Description
“더 살아가기 위해 과거의 기억 정도는
조금 덜어내도 괜찮을 거라 믿었다”

테두리만 남은 과거의 흔적을 감각하는 김수온의 첫 소설집!
현재와 과거 사이 불안한 시차를 살아내는 사람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수온의 첫 소설집 『한 폭의 빛』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김수온의 등단작 「( )」는 동생이 실종된 뒤 가족들의 눈앞에 계속해서 비어 있는 괄호가 등장한다는 상상력을 전제로 한 소설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소설가 은희경과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소설을 지배하는 아득한 슬픔의 정조”가 “투명한 감각을 선사”한다고 평하며, 애도의 정서를 마치 수채화와 같이 스며들고 퍼져나가는 이미지로 구현해낸 김수온의 작품에 기대를 표했다.
작가의 이번 소설집에는 등단작을 포함해 총 9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여자, 아이, 물, 햇빛, 도시, 먼지 등의 반복된 재료를 바탕으로 이미 잊힌 과거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일에 몰두한다. 여기서 작가가 과거를 그리는 방식은 지난날의 기억을 재현하거나 지워진 자리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기억을 환기하지 않은 채 과거는 도처에서 풍겨오는 냄새로, 썩어가는 과일의 검은 반점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빈 괄호의 모양으로 소설 곳곳에 기척처럼 남아 그 빈자리를 증명한다.
비어버린 과거의 흔적들에 발목이 묶인 채로도 소설 속 화자들은 앞으로 진행되는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에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현재라는 시차 사이에서 작가는 앞으로 향해 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지난날을 짊어지고 계속해서 정면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사라져가는 기억의 테두리만 남은 흔적을 손에 쥐고 쉽게 작별하지도, 온전히 되살리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시간의 감각을 톺아보는 진심 어린 글쓰기가 김수온의 첫 소설집에 담겨 있다.
저자

김수온

2018년『한국일보』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나의마르멜로
한폭의빛
()
행렬
음,
애프터눈티
푸른열대어
얼굴없는밤의초상화
한겹의어둠이더
해설|진심의시계ㆍ홍성희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여기놓고잊은거겠지.어쩌면다신찾지않으려고.”
뒤를‘뒤’로만들기위해전방을주시할수밖에없는사람들

연인은호수를끼고시계방향으로돈다.그들의오른편엔언제나아름다운호수가있다.그렇기에그들은항상같은방향으로고개를돌려호수를바라본다.왼편에선남자는오른편에선여자의뒷모습만을본다.오른편에선여자는왼편에선남자의얼굴을잊었다.손을잡고있지만서로가서로를떠나고있다.그들은호수를떠나지못해서남겨져있다.시간이흘러구름이걷히고호숫가에서서히빛이들어찬다.처음과같은양의빛이호수를비추고있다.어느새연인은사라지고어디에도없다.그들이있던자리에빛이유일하게남아있다.
_「한폭의빛」

호수를시계방향으로돌고있는연인은서로를마주보지않는다.마주보기위해선오른편에선여자가왼쪽을봐야한다는의미인데,시계방향에서왼쪽은시간을거스르는일이기때문이다.연인은오른쪽으로,시계방향으로,오로지시간의‘앞’으로정해진숙명을받아들이고걷는다.김수온의이번소설집에서는이처럼닥쳐오는‘앞’,즉전방만을주시하면서나아가는일에몰두하는이들이자주등장한다.그네를타는‘나’와‘너’는설사지상으로내려올지라도다시발을굴려앞으로올라가고(「나의마르멜로」),‘나’를비롯한수많은사람들은어딘지모를곳을향해계속해서걸어간다(「행렬」).여기서중요한것은무언가가있기때문에전방을보는것이아니라오직시간의뒤에남아있는것에서등을돌리기위해‘앞’에몰두한다는점이다.“앞은언제나뒤를동반하고,뒤를뒤로만들기위해앞이발명되고수행된다.앞에대한집착은그렇게등지고싶은것들에대한완고한거부와다르지않다”(홍성희문학평론가).
「행렬」의마지막장면에이르러‘나’는걸어가기를주저하며비로소행진하는이들을바라본다.나를뒤로한채멀어진이들을보면서전방으로만향한시선이보지못한것들이무엇인지를조용히묻는다.다른시선들혹은종종드리워지는‘한폭의빛’은누군가떠나간자리에남겨진흔적들을보이게하고들리게한다.다만이흔적들은이미지워지고사라진뒤에남아있는것들이므로,김수온의소설은지난날을증명하는기척들로자꾸만가득해진다.


“조금도가까워질수없는마음으로당신과멀어지고있어.”
뒤를돌아보는즉시사라져버리는기척들

조금전과는정반대의방향으로살며시몸을돌리자이불이다시원상태로돌아온다.여태그래왔던것처럼이불은여자의몸언저리에축늘어진다.방금까지이불을쥐고있던것이흔적도없이말끔히사라지고눈앞엔텅빈허공만이남아있다.다만이불끝자락에살짝주름이져있을뿐이다.

달아나버렸어.
단지뒤를돌아보아서.

_「한겹의어둠이더」

표제작「한폭의빛」에는서로다른세개의장면이포개어져있다.먼저,요람의이불안에누워있는아이를돌보는여자가있고,그여자의집을찾아오는어머니가있으며,마지막으로숲의끝에서있는검은모포를두른사내가있다.창문곳곳에서아이의손자국,즉아이의흔적은발견되지만소설이끝날때까지아이는하얀이불아래몸을감추고있을뿐실제모습을드러내지않고,자신의딸과그의아이를살피러온어머니조차아이가머물고있는방앞에서는들어서기를머뭇댈뿐문을여는데까지나아가지못한다.한편“들어가도됩니까./들어가면안됩니까”(p.44)라며허락을구하는말을반복해서중얼대는사내의대사는사뭇상징적이다.곳곳에기척으로만남은세계의한복판으로들어가기보다기척의주위를서성대는인물들의모습과겹쳐보이기때문이다.
「한겹의어둠이더」에서여자는이불로몸을가린채앞방향으로만걸어가는데계속해서뒤쪽에서자신의이불을잡아당기는기척을느낀다.뒤로돌아기척이있는쪽을바라보는것은뒤를‘앞’,정면으로만드는일이기에여자가“뒤를돌아보”는즉시흔적은“달아나버”린다.때문에함부로기척에다가갈수없다.기척들,나의‘뒤’에남아있는흔적을계속해서붙잡아두기위해온힘을다해내앞에주어진정면을바라볼뿐이다.그렇게나의앞과뒤라는이거리감을좁히지도해소하지도않은채로그저붙들고있는것이다.“사라지는것과그것을잃지않으려는마음사이의거리가가까워지지않는만큼더멀어지지도않는다는것,그저멈출수없이이루어지는일들사이의간극이내내지속될따름이라는사실”,김수온의소설이말하려는것은어쩌면이작은사실하나일지도모른다(홍성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