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의 문으로

상아의 문으로

$14.00
Description
“이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일상을 지속하라.”
꿈과 현실,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며 내달리는 구병모의 문장들!
2009년 첫 책을 출간함과 동시에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팬층을 단번에 확보한 작가 구병모의 새 장편소설 『상아의 문으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등단 이후 꾸준히 신작을 발표해온 그가 2021년 연말을 앞두고, 계간 『문학과사회』(2020년 가을호~2021년 여름호)에 연재했던 소설을 묶어낸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등에 등장하는 ‘상아로 만든 문’과 ‘뿔로 만든 문’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빌려왔다. 이들 서사시에서 말하길, 상아의 문으로 흘러든 꿈들은 거짓된 것이고, 뿔의 문으로는 진실된 것들만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두 가지 문 중 ‘상아의 문’으로 향해 갈 것이다. 이 문을 지나면 그 뒤에 등장하는 감각,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나’ 자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명확한 논리, 의지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사라진 문장들 사이에는 오로지 지금 명멸하는 사태만이 있다.

때문에 『상아의 문으로』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려는 의지를 담보한 채 매 순간 등장하는 새로운 문장들을 맞이할 때에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면 문장을 가로질러 섣불리 결말을 찾고자 하는 시도보다는 하나의 문장을 읽을 때 살짝 켜졌다 다시 사그라드는 눈앞의 사태에 집중하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할 것이다.
저자

구병모

1976년서울에서태어났다.경희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고편집자로활동하였다.2009년『위저드베이커리』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제2회창비청소년문학상을수상한『위저드베이커리』는신인답지않은안정된문장력과매끄러운전개,흡인력있는줄거리가높은평가를받았다.

데뷔작『위저드베이커리』는기존청소년소설의틀을뒤흔드는,현실로부터의과감한탈주를선보이는작품이었다.청소년소설=성...

목차

상아의문으로

미주?참고문헌
추천의말

출판사 서평

꿈과현실을구분할필요가없는도시
현실을가격하는꿈증상의시작

이증상이시작된뒤로는매순간이직전순간에대한분석과다음순간에대한예기(豫期)의도구가되며그행위는종결되지않을것이다.들여다본거울안에는뒤편의수건걸이에비뚜로걸린붉은수건이영원히교차되지않는건널목의신호처럼비칠뿐진여자신의상은찾아볼수없으며,이제그런모습에……모습이나타나지않는데익숙해진진여는수도꼭지를돌려있는지없는지모를양손에물을받아역시있는지없는지모르겠으나통상얼굴이붙어있으리라고여겨지는자리를향해물을던지듯이하여씻는데이같은동작과얼굴에닿는찬물의감각이진여가거기있다는사실을알려준다.
(p.10)

아침에일어나세수를할때에차가운물을느낄수있는것은보통‘나’라는사람이있기때문에가능한것이지만,『상아의문으로』에서는이당연한사실을부정하는것으로시작한다.거울안에서‘진여’는자신의모습을발견할수없다.얼굴이붙어있어야할자리에습관적으로물을끼얹는다.얼굴이있을거라짐작되는곳에서느껴지는차가운감각만이‘내’가있다,라는것을감지하게해준다.이소설에서는이처럼현실이아닌것같은상황을“증상”이라고부른다.24시간불이꺼지지않는도시사람들사이에서시작된이‘증상’은잠을자는것도아니고잠에서깬것도아닌상태를만들면서,꿈이“무시로현실의급소를가격”(p.199)하는지경으로몰아간다.
“꿈과현실을구분할수없는공간이됐다기보다는,그둘을구분할필요가없는”(p.29)공간으로서의도시에서하나하나숨겨진의미를발견하거나,일관된논리를생성하는일따위는들어설수없다.고정되지않는세계에서우리가할수있는최선의방어는이러한사태가“우리가태어나기전부터”“우주에속해있었을지모른다고받아들임으로써”(p.32)서로의모습이고정되어있다는사실부터의심하는것뿐이다.그러니우리가계속해서읽게되는것역시하나의고정된목표점이나지향점을향해가는여정이라기보다는,거울에조차비치지않고실체도불분명한‘진여’의눈앞의사태,액체처럼모든것의경계를지우며순간에충실한문장들일것이다.


일상과질서가파괴된세상속
비연속적으로단절된순간을만들어내는문장

볼품없어보이는반복이야말로의외로유일한진실일때가있지요.의미는인식의기착지가될지는몰라도종착지는되지않습니다.때로의미가두드러져보이는순간도있겠지만그것이허상임을알때인식의궁극적인목적은의미에있지않게됩니다.이모든것은무엇을말하는지,우리는무엇에대해이야기하는지,그무엇에집착하고무엇인지모를무엇에대해이야기하는동안우리가놓치고있는것이무엇인지,저는그것이중요하다고생각합니다.
(p.191)

“규정되지않는미래”와“고착되지않은과거”(p.33)사이에수많은가능성들이열리기마련이고,이가능성을품은채‘진여’는예측할수없는현재를살아낸다.어디로출근하는지알수없지만늘그렇듯출근을하고,어디로가는지모르지만타던대로열차에오른다.분명어제는학교선생님이었던것같은데,오늘은학생이되어있다고하더라도놀랄것은없다.과거에일어난사태는오늘을담보해주지않는다.하나의이야기를만들어내는것은일관된질서를생성할수있는세계에서가능한이야기일뿐,일상도질서도파괴된등장인물‘진여’에게서가능한일이라생각하기는어렵다.때문에우리는끝내‘진여’라는인물의실체를파악하는일에실패할지도모른다.읽는일이,진여의행동을관찰하고그의실체를머릿속에서상상하는일이바로뒤문장에의해해체되고,그다음문장에의해무력화된다.소설은계속해서확실하게말해질수있는모든가능성을지우며파편화된순간의사태에몰두한다.믿어왔던것들을의심할수밖에없는,어제와오늘,‘너’와‘나’를구분할수없도록집요하게몰아가는구병모의문장들을그저묵묵히따라가는것만이우리가할수있는유일한것이다.
이책을다읽었을때,우리가이책에서발견할수있는것은무엇일까.어쩌면책속에서,무언가를발견하겠다는발상이야말로이책밖의질서가갖춰진세계에서만통용되는상식인것은아닐까.거울속에비치지않는존재‘진여’를좇아가는일은의미를찾겠다는일반상식을무너뜨리는일에다름아닐것이다.앞선인용했던문장을다시한번옮겨적어본다.“이것은‘이야기’가아니다.요약할수없는글,그러니까메시지를섬멸한,[……]문장들이다”(조재룡문학평론가).지금읽고있는문장만이그다음문장을불러오는출구없는미궁을헤치며페이지를넘길때비로소구병모작가가열어보이는새로운독서체험을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