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이라는 칼 -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낫이라는 칼 -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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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딘가 숨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시”
‘사물을 성찰하는 시인’ 김기택의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환한 세계를 향한 발걸음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궁구하는 시적 상상력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탁월한 시적 묘사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준 김기택 시인의 신작 시집 『낫이라는 칼』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번으로 출간되었다. 현대인의 일상을 포착해 그 안에 내재된 소외와 단절을 성찰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를 허물고 사물의 고유한 상태만이 남은 환한 세계로 나아가는 데 몰두한다. 늘 보이지 않는 틈을 비추는 김기택의 문학적 상상력은 이번 시집을 이끄는 힘이 된다.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지 못한 채 순한 얼굴을 한 아기와 강아지 몰티즈의 시선에 부끄러워하다가도 시인은 그 시선을 오지 않을 슬픔을 들여다보는 휠체어를 탄 사람으로 옮긴다. 이는 인간을 사물과 다름없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더는 “인간의 편에서 사물은 사물의 사태, 그 자체로 온전히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체득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사물주의자로서 삶을 성찰해온 시인의 겸손함을 독자들은 이번 시집에 묶인 66편의 감각적인 시에서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물의 편은 견고한 고정관념으로 인식한 삶의 가치와 사물에 대한 판단을 무화시킨다. 소외를 양산하는 ‘지금-여기’, 노동하는 삶과 쓸모 있는 사물을 다시, 최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본의 교환가치에 짓눌린 삶과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너머 다른 삶과 다른 가치의 사물을 시원의 자리에서 탐색한다. 사물의 편에서 삶과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을 수행하고 다른 삶의 가치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택 시인은 지금까지 사물에 의한, 사물을 위한, 사물의 편에서 올곧이 사물의 시를 써온 사물주의자이다.
-송승환, 해설 「사물주의자의 틈」에서
저자

김기택

1957년경기도안양에서태어나중앙대학교와경희대학교대학원을졸업했다.1989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당선되어시인으로활동하기시작했다.시집『태아의잠』,『소』,『껌』등7권,동시집『빗방울거미줄』,그림동화『꼬부랑꼬부랑할머니』등을펴냈다.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등여러문학상을받았다.

목차

1부
구석
강아지가꼬리를흔드는힘
야생2

어미고양이가새끼를핥을때
아기앞에서
아기는엄마라는발음으로운다
강아지는산책을좋아한다
털이날리고지저분해지기에

2부

오지않은슬픔이들여다보고있을때
눈먼사람
앉아있는사람
위장
또재채기세번
화보사진찍기
깜빡했어요
무단횡단2
부음
실직자2
너무
머리가목에붙어있는일에대하여
노인이된다는것
노숙존자
뒤에서오는사람
아랑곳하지않고
유족
5인실
진동
여탕에서목욕하기
자가격리
폭주
용문에는용문사람들이산다
사무원기택씨의하루

3부
혓바늘

변기
돋보기안경
죽은눈으로책읽기
첫흰머리카락
가죽장갑
연필
일인용소파
유기견
치킨고로케
멧돼지가온다
비둘기에대한예의
꽁치구이
방광은터질것같은데
뜨거운커피
베개
손톱
스마트폰
중독성
카톡!
낙지
공원의의자

4부
겨를
물방울이맺혀있는동안
매몰지
외투입은여름
참새구이
개나리울타리
꽃지고난후의연두
물긷기
여러번버렸으나한번도버려지지않은것들

해설
사물주의자의틈·송승환

출판사 서평

손가락만으로도가려지는틈에서
길을잃고,헤매이고,나아가는세계

다열려있지만손과발이닿지않는곳
비와걸레가닿지않는곳
벽과바닥사이로들어가나오지않는곳
하루종일있지만하루종일없는곳
한낮에도보이지않는곳
흐르지않는공기가모서리세워박힌곳
―「구석」부분

이번시집의시적공간을표명하는‘구석’은평소인지하지못했던장소와사물을나타낸다.이곳은한낮에도다른사물들에가려져부재하는것처럼보이는사물들의거처이자사람들이더는나아갈수없는모서리가박힌곳이다.하지만이작은틈을후벼보고,긁어보고,빨아보는아기에게‘구석’은더없이안전한공간이기도하다.“아직제가태어나지않은것같은표정으로”(「아기앞에서」)스스로를방어할어떤몸짓도하지않고편한자세로앉아있는아기앞에서시인은이내자신의두려움을들키고만다.그와동시에“구석에숨어있는구석마다콧구멍을들이대”(「털이날리고지저분해지기에」)며자신의풍성한털을찾는몰티즈의눈빛에서알수없는가련함을느끼기도한다.아기가손가락으로탐미하고,몰티즈가콧구멍으로감지하는‘구석’이라는공간은발견은커녕쉬이상상하기도어려운곳이다.타인에게둘러싸인이세계에서인간이가장두려워하는것이바로소외이기때문이다.이‘구석’을상상하는일은순간순간튀어오르는호기심을억누르고,고유함을내재한사물의형태를비트는것만으로이루어지지않는다.그것은사물을,식물을,동물을,인간을배척하며자기안의모서리를세우는일에불과할뿐이다.이시집의사물주의자는막연히세계의끝이절벽이라여겨온독자에게틈을통해틈너머의세계와교감하는일이야말로사물들의세계가도래하는것이라말한다.그리고이모든것이자기자신과의화해라고덧붙인다.

오지않는슬픔을들여다보고있을때
시인은기꺼이사물주의자가된다

똑똑눈이땅바닥을두드린다
팔에서길게뻗어나온눈이땅을두드린다
땅속에누가있느냐고묻는듯이
곧문을활짝열고누가뛰어나올것만같다는듯이

눈은공손하게기다린다
땅이열어준길에서한걸음이생겨날때까지
―「눈먼사람」부분

사물은자신의주위를에워싼공기의투명함마저번거로워하고,고양이는제몸의털가죽이답답한나머지벗어던지려한다.이렇듯시에서의사물은태초의모습으로회귀하려하는데,오로지사람만이가만히멈춰선채로더많은것을갈망한다.이때강아지와고양이그리고아기의천진함에아무런주석도붙이지못했던시인은휠체어를탄사람을바라본다.그가모두가지난자리에서서아직닥치지않은슬픔에관하여염려하기때문이다.모서리에아슬아슬하게서있는사람이무언가가만히들여다보고있을때,그게자기자신의슬픔과닮아있을때시인은기꺼이사물주의자가된다.이때시인이재창하는것은사물에대한공경과예의로돌아가자는것이다.“눈이닿은자리,오직눈이만진자리만을”(「눈먼사람」)보는사람은자신의몸가짐을정돈하고한평생의체중이실린걸음을힘겹게내디딘다.인간보다먼저길을두드리는지팡이의말에귀를기울이듯단한발자국만열리는길을향하여나아가는일.여기에는눈앞의사물을볼수만있을뿐감각하지못하는사람에게는존재하지않는공손함이깃들어있다.“스스로일어설수없어서/서지못하고앉아있”(「공원의의자」)는네다리의의자역시머리가없기에명상에잠겨있다고말하는시인은,자신이본것을단언하기보단일상속우연에기대어독자들에게보여주는것을택한다.
대부분의사물이화자가되는김기택의시에담긴시선은미덥기만하다.타인이구축한지배질서의세계가아닌모두가자신만의고유함을되찾는평등한사회를지향하기때문이다.이때시인은사물로부터구원받는순간을공손히기다리는일을수행한다.충분히들여다보고,기다리고,그자리에머물렀음에도시인은“아직쓰지않은시,어딘가숨어나를기다리고있을것같은시”에대해생각하다“시가부끄러워지는순간”(‘시인의말’)에대해상상한다.사물주의자가토로하는부끄러움이란사물이사물답게,인간이인간답게살아갈이시대의희망이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