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 문학과지성 시인선 578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 문학과지성 시인선 578

$11.62
저자

이기리

2020년김수영문학상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그웃음을나도좋아해』『젖은풍경은잘말리기』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여백발화
흙비
번식하는잠
무언가를적는손
꽃꽂이
아포스트로피
극세사
컵이서로붙으면
헛것을보는
모노레일
수양버들
춘수春愁
오지말아요
히치하이커
우린아무사이도아니다

2부
만약이루어졌을세계였어도
나는
반감
갈변하는과일속안온함
손을풀자연주를시작하자
버금가는날들
유월의일들
불꽃
죽은곁
환상충돌
블록꽃
불순물
나란한조명
어제오늘
상쇄
독립생활

3부
증오
열매는못봤지만
유산
버리러오는춤
여는기쁨
역광
서른네장면
자리를박찰때의자를뒤로세게밀지말기
일회용품에관한딜레마
병원갔다오는길
엄마의입맛
회복하는자유
아주그만두는축소
일상적배치
이제다지나갔다남은것은단하나
안식이온다면
유력한사람
여백화자
다시는이제부터

해설
총체적으로이해하기·김정빈

출판사 서평

“풍경이우리를가두었다.이탈할수도없다”
한번들어서면눈속에오래담기는순간의편린들

아무리떠올리려해도떠올릴수없는불가능한얼굴과함께당신은있다.나는방금찍은풍경을다른각도로바라본다.다른풍경이다.
―「우린아무사이도아니다」부분

시집전반에가장많이씌어진단어는‘풍경’이다.시인내면에담긴여러모습의자아가각각의심상이반영된순간을포착하고,그것을잘정돈된하나의풍경으로그려낸것이다.처음‘풍경’이란단어가등장하는시는「아포스트로피」다.이시의화자는모두가방관하는,생사여부조차불분명한아이에게이입하는유일한존재다.아이가풀밭에쓰러져있지만주변에있는사람들은평온하기만하다.호흡은있지만위독해보이는아이의“닫힌눈꺼풀”대신화자의시선이등장하며“날개가왜버려져있지묻는대신/날개를누구에게주면되지,묻”는다.「컵이서로붙으면」의‘풍경’속에는또다른얼굴의화자가등장한다.상대방의뜻에따라억지로수목원을걷는화자는“오롯이혼자이고싶은”상태다.그럼에도상대에게“식은밥으로만든볶음밥”을만들어먹이며최선을다하지만“두컵이서로붙어떨어지지않”는것을보며“바닥에내던지”고싶다.「반감」의화자는정체불명의음료를“한번만마셔달라”는여학생의말에한입머금은불순물을화장실로가뱉어내는데,훗날‘탄산수’를마시며“목넘김이묘하게불편하여중독성이강하다”며다시불쾌한기억을소환하기도한다.“야간자율학습”을마치고“사랑한다는건기어이끝장내겠다는것[……]안일한나날을등지고폐허를개척하겠다는것”(「갈변하는과일속안온함」)이라며반항적인면모를보이는화자또한앞선시들과는다른모습이다.이는시인의다양한시도가엿보이는대목이기도하지만내면의복잡다단한이야기를화려한치장으로감추지않고여러각도로펼쳐보인결과물이기도하다.

“우리의사랑이엉키고나약해지는춤기꺼이추겠어”
더많이젖기위해조금씩진솔해지는언어

잘게부서진노을조각들이각자의뺨에묻어있다아무도털어주지않고옷에붙은하루를끄려다가더번지기전에벗어버리고빌어먹을결말때문에
우리는누군가를죽을각오로사랑한적있지요?
―「불꽃」부분

“부디시간을거꾸로돌리지말자”(「여백발화」)다짐했더라도여전히시작(詩作)이란내면깊숙한고통이방황을불러오는것임을시인은시집곳곳에서담담하게밝한다.“책임감없는상태로돌아가자”는선언은이내다시“돌아가는게좋겠”(「흙비」)다는말에순응하며전복되기도하고,“어서시간이다지났으면”하다가그렇다면“우리는정말무엇이든할텐데”(「안식이온다면」)라며어그러지는마음을탄식하기도한다.“아무기분도없는하루를언제쯤살아볼수있을까”(「독립생활」),고단한걱정또한계속된다.그러나“계단을오르기”시작한이상시작점으로돌아갈수없고공연이시작된이상“표를사기전으로돌아갈수없”으므로(「모노레일」)마지막시에서“지금부터기차를기다리는몸”(「다시는이제부터」)이라며어떻게든앞으로나아가야함을다시금피력한다.“끝을내기위해시작하겠”다는전언은결국‘방황’을끝내려면‘다시사랑’해야한다는의미일것이다.“위도와경도를무시하”면서까지원하는바를향해달려가는화자는“하나도남김없이으스러지도록꽉안아주겠”(「유력한사람」)다고다짐하고,더큰혼돈이두려워다시만나지않기를바랐던‘첫사랑’이막상꿈에나타나자키스를퍼부으며이렇게말한다.“파티를하자!우리의첫사랑을위해!”(「오지말아요」)

특히‘꿈’4부작에는이시집이가진폭발하는에너지가유감없이담겨있다.「오지말아요―꿈속이기」「버금가는날들―꿈변명하기」「아주그만두는축소―꿈흐지부지하기」「이제다지나갔다남은것은단하나―꿈미련하기」가그것이다.‘꿈’이라는현실과분리된공간을솔직하고대담한언어로발화하기에최적화된배경으로설계한다.“총17층”짜리“거대한한옥들이위로겹겹이쌓인듯한구조물”은기어이찾아온‘첫사랑’에대한감동포인트이자총성이울리고‘첫사랑’이연기처럼사라진후다시는찾기어려워보이는장소이기도하다(「오지말아요」).“펑펑울면서당신의발바닥을핥”으면서“무엇이든해줄게[……]더비참해질게”(「이제다지나갔다남은것은단하나」)라고하는‘나’의직설적인고백이자연스럽게들리는이유다.

다만시속‘사랑’의대상을애인,사람으로만한정짓기에는시인이가진스펙트럼이무한하다.이시집의화자들이그리워하는건시인의내면에담긴‘소중한모든것’이다.여과없는사랑을받을만한시적대상과그것에시선을두게된과정,그주변을에워싼배경과온도,그밖의총체인것이다.그러므로「젖은풍경은잘말리기」는소중한것을둘러싼무수한요소가운데어떤편린도잃을수없는시인의섬세한집념으로가득차있다.그래서과거로부터빠져나오겠다는선언은자꾸만번복되는것처럼보인다.그럼에도시인의젖은풍경들이잘마르는중인까닭은,앞선선언이또사랑해서상처받지않겠다는다짐이아니라더많이사랑하기위해지난상처를아물고자하는행위이기때문일것이다.이것이“뒷굽이진흙탕에움푹박히도록”“달려가는”(「유력한사람」)이기리시인이그리는오늘의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