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보낸 메일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0

그저께 보낸 메일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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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떻게 되살려낼까
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흐린 기억을 비집고 솟아올라
만물을 비추는 시의 형상을 되짚는 나날

본질을 꿰뚫는 투명한 마음가짐, 김광규 열두번째 시집 출간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후 편안하고 부드러운 서정과 문명의 이기를 살피는 날카로운 지성으로 풍부한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이며 녹원문학상(1981), 김수영문학상(1984), 편운문학상(1994), 대산문학상(2003),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화상(2006), 이산문학상(2007), 이미륵상(2008), 정지용문학상(2018) 등을 수상한 바 있는 김광규 시인의 열두번째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직전의 시선집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5년 만이다. 2016년 봄부터 2022년 겨울까지 일곱 해 동안 발표한 60편의 시를 묶었다.
현실 그 자체를 가열하게 몰아세우는 정직의 세계(김주연), 유기적 공감이 빚어낸 우주적 화합의 장면들(이숭원), 일상적 진실과 본원적 가치를 파고드는 예리한 시선(우찬제), 간결하고 명징한 문장에 담긴 시대적 고찰(김우창)로 일컬어진 김광규의 시 세계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품은 자연의 온기를 전하고, 투명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필연의 변화와 마주하여 이에 적응하며 삶을 살아가는 시인과 만날 수도 있고, 인위의 변화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시인과 만날 수도 있다.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네 인간의 삶에 여일하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것들과 함께하며 자족의 삶을 사는 시인과도 만날 수 있다”(장경렬). 김광규의 시는 흘러가는 삶 그 자체로서 움직인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들이 고이고 맺힌 자리를 기민하게 포착한 시인이 안타까운 마음을 덧댈 때, 시간이 정지한 듯한 고요가 입을 벌린다. 소리 없이 진동하는 행간에 몸을 기대었다가 태연히 흐르는 시와 다시금 마주할 때, 우리는 생의 다음 국면을 엿본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김광규 시인의 전언傳言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의미가 없거나 없어 보이는 것이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향해 심안心眼을 열어야 하는 이가 시인이다. 존재의 무의미함을 뛰어넘어 그 의미를 스스로 구현하고자 하는 진지한 실존적 인간이 그러하듯. -장경렬, 해설 「변한 것 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에서


잠든 의식과 영혼을 일으키는
끈질긴 순수의 도정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기 마련
의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
- 「그 짧은 글」 부분

김광규 시에서 화자는 “가물거리는 그저께 기억/수첩을 꺼내 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났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그저께 보낸 메일」)는 매일을 마주한다. 연기처럼 퍼지는 기억을 곱씹고 간신히 떠오른 편린을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다. “소나무 우듬지 위로 커다란/열기구처럼 떠오르는 보름달/눈에 띈 순간 저절로 탄성이/터져 나왔다 그렇지!/ㄷ으로 시작되었어/그다음에 ㅁ이 뒤따랐지!/달…… 마…… 로 이어지는 그 이름” 석 자를 찾아 헤매는 동안 “평생 배우고 간직해온 온갖 이름들”(「달맞이」)도 덩달아 각각이 지닌 의미의 무게가 무색하게 풀썩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참 동안 궁리하다 못해/식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단기 기억상실증이니/스스로 생각해보라고 타박만 받”(「혼자서 잊어버리기」)는다. 매일같이 펼쳐지는 이 외딴 소동 속에서, 화자는 쉬이 분개하거나 묵묵한 슬픔에 휩싸이는 법이 없다. 다만 그립고 익숙한 것들이 뿌려두고 간 흔적을 되밟으며, 조각 난 의미를 그러쥔 채 지난날을 조근조근 모사模寫한다.

사박사박사박 낙엽 밟는 작은 발자국 소리…… 놈이 아직도 뒷마당에서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자는 동안 밤새 소리 없이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은세계로 바뀐
겨울 아침이면, 국화빵처럼 생긴 발자국이 뒤뜰 여기저기 남아 있는 때도 있다.
평생 살던 곳 떠나지 못하고, 놈은 아직도 우리 집 마당을 바장이고 있는가.
- 「개 발자국」 부분

이때, 화자가 취하는 방식은 고통이나 슬픔 등 심정적 결과 대신 대상의 동선을 좇아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을 다루지도 않을뿐더러 철저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술하지도 않는다. 화자의 진술이 둘러싼 중심을 파헤치면 심심하리만치 일상적인, 나 아닌 다른 생이 있다. 생의 부재가 있다. 시인이 이미 40여 년 전 데뷔작에서 선보인 ‘있음과 없음’의 세계(「有無」 연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가 유장히 흐른다. 머물다 간 개별 존재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닌데 광막한 울림을 주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대상의 존재 의미를 부풀리는 것은 진술 주체의 비만한 자의식을 부각할 뿐이다. 반면 김광규의 시에서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 독자의 이입을 어렵지 않게 끌어내고, 담담한 묘사로서 영혼의 겸양과 진실을 산뜻하게 드러내기에 감동적이다. 어제 혹은 그저께의 존재가, 오늘인 듯 생생한 풍경으로 돌연 눈앞에 나타날 때 생과 사, 실재와 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아늑한 정감이 흘러넘친다. 기억의 끈질긴 힘에 의지해 시인은 안갯속 혼란을 버티고 오늘, 이 순간의 생기를 가다듬는다.


곡선을 그리는 그윽한 유머와
중력에 굴하지 않는 너른 기세

영웅전을 제외한 문학작품은 대부분이 패배한 자들이나 애석하게 죽은 이들이 남긴 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나는 성공담보다는 슬픈 실패담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문학의 숙명이며 본질이 아닐까. -뒤표지 시인의 산문에서

김광규의 시 세계는 필연적으로 생몰을 거치는 존재의 애사哀史에 바치는 다정한 기록이다.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미물의 양태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진실로 감탄하고 격 없이 소통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시적 어조에 묻어나 때로 그윽한 유머를 낳는다. 화자는, 귀성하는 기숙사생들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한바탕 놀고 나면 모조리 잊어버리고/기숙사 생활도 새삼 낯설어질걸”(「내일은 평일」) 하고 짓궂게 말을 걸거나, 어미의 고생은 나 몰라라 그악스럽게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비둘기들을 관찰하며 쓴소리를 건네기도 한다(“첫째 놈이 받아먹으면 둘째 놈이/왜 나는 안 주느냐고/어미의 등에 올라 어미 머리 쪼아대고/둘째 놈이 받아먹으면/첫째 놈이 어미 머리 쪼아댄다/불효자식들 같으니라구”-「비둘기 세 마리」). “옆집 담”을 타고 들어가 매달린 “연두색 호박”을 지켜보며 몰래 “따 먹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자 “옆집 영감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피할 수 없을걸/요즘도 호박 도둑이 있는 모양이여……”(「호박 그 자체」) 하고 지레 상황을 예견하며 스스로 마음의 제동을 걸기도 한다. 이렇듯 세밀한 관찰에서 비롯된 발화는 드넓은 공감의 저변을 드러내며 그 어떤 위화감도, 불편도 초래하지 않고 미소를 자아낸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장경렬의 말처럼 “오래 생각하고 깊이 짚어본 사람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언”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과 눈으로 삶과 삶의 주변에 눈길을 주고 이를 향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김광규의 시가 도달하는 지점은 불완전한 삶의 변수를 대하는 겸허함이다. 화자는 산속에서 “나를 힐끗 쳐다보고 유유히/길 건너 동네쪽 언덕길로 사라”진 “멧돼지”를 떠올리며 “어떻게 하나 요즘도 거기 지나갈 때면/혼자 속으로 생각”(「멧돼지 생각」)한다. “약속한 필름을 보내주지 않”고 사라진 “사진사”와 우연히 재회했지만 그가 “다시 한번 사진 보내주겠다/약속하고 십수 년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다만 “언젠가 또 만나면 어떻게 하나”(「그녀 생각」) 생각할 뿐이다. 남은 생이 기약 없듯 만남도 기약이 없다. 그렇기에 어렴풋한 기억 속 그네들의 심중을 헤아리며 안부를 전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공동체적 연민을 담아.


수백 번의 조탁을 거친
심안이 그려낸 인생 조감도

어둠을 헤치고 낮은 계단을 더듬더듬 올라가 현관문을 노크했다.
한참 만에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토치가 없어서 성냥으로 가스 불을 켰다.
어둠이 차츰 물러가는 방 안을 화초 나무 몇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고무나무와 사철나무, 벽오동과 게다리선인장이 소리 없이 눈을 비비며
밤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일천삼백만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는 도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한 시간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불면증을 모르고 살아온
70년 동안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고요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수도꼭지가 제대로 잠기지 않아, 가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뿐, 인간과 사물 사이의 온갖 언어와 음향이 사라진
정일한 시공 속에서 아무런 용건도 없이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송과선 여사의 부군이 침묵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나. 얼마 전에
나온 시집을 한 권 전하고 말없이 속세의 캄캄한 밤 속으로 되돌아 나왔다.
어두운 기억 속에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 「송과선 여사댁」 전문

김광규의 시는 수백 번의 조탁을 거친 단순한 어휘로 깨달음을 전한다. 단순성 너머엔 세계와의 화해를 향한 의지와 소통을 이끄는 매혹이 자리 잡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이 지배한 사회의 윤리적 문제를 꼬집는 정치한 견해마저 부드러운 노랫말 같으며(「로봇 한 마리」), 뇌 속 내분비기관의 노후로 인한 불면의 고통마저 신비로운 전설처럼 그려진다(「송과선 여사댁」). 그의 시편들은 어느 한 방향에서 대상을 바라보거나 명명하지 않고, 대상의 기원과 내력에 대한 수많은 추측을 포괄하며 조심스레 작성된 조감도鳥瞰圖다. 일상의 한 자락에서 출발해 유감없이 펼쳐 보이는 인간사의 희노애락. 김광규의 시 세계는 삿된 편견 없이 세상 만물에게 넉넉한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간 이들의 뒤를 단정하게 따르는 이가, 훗날 그 자리를 이어받을 이들의 고독을 한 줌 덜어내기 위해 쓴 안내서로서 깊은 울림을 준다. 나고 드는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오늘 이 순간을 있게 하는 문학의 원초적인 힘. 우리가 김광규의 시를 읽는 이유다.
저자

김광규

시인김광규는1941년서울에서태어나,서울대및동대학원독문과를졸업하고,독일뮌헨에서수학했다.1975년계간『문학과지성』을통해등단한이후1979년첫시집『우리를적시는마지막꿈』으로녹원문학상을수상했고,1983년두번째시집『아니다그렇지않다』로김수영문학상을,1990년다섯번째시집『아니리』로편운문학상을,2003년여덟번째시집『처음만나던때』로대산문학상을,2007년아홉번째시집『시간의부드러운손』으로이산문학상을,2011년열번째시집『하루또하루』로시와시학작품상을,2016년열두번째시집『오른손이아픈날』에수록된「그손」으로정지용문학상을수상했다.그밖에시집『가진것하나도없지만』『물길』『좀팽이처럼』『크낙산의마음』,시선집『희미한옛사랑의그림자』『누군가를위하여』『안개의나라』,산문집『육성과가성』『천천히올라가는계단』,학술연구서『귄터아이히연구』등을펴냈다.그리고베르톨트브레히트시선『살아남은자의슬픔』,하인리히하이네시선『로렐라이』등을번역소개하는한편,영역시집FaintShadowsofLove(런던,1991),TheDepthsofaClam(버펄로,2005),독역시집BotschaftenvomgrunenPlaneten(괴팅겐,2010),불역시집Ladoucemaindutemps(파리,2013),중역시집『模糊的?愛之影』(베이징,2007)등을간행했다.독일예술원의프리드리히군돌프문화상(2006)과한독협회의이미륵상(2008)을수상했으며현재한양대명예교수(독문학)로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부끄러움없는날

부끄러움없는날
모래내언덕길
태어나지못한
줄지어기다리는사람들
소리없는힘
담쟁이의봄
수로공사
설거지하는남자
호박그자체
낯선고향
여름날새벽
법고法鼓소리
이안류離岸流II
풍차風車로가는길목
일요일에도자라는나무

2부그저께보낸메일

그저께보낸메일
바로그런사람
그짧은글
지킴이나무
베네치아일기II
베네치아일기III
로봇한마리
파르티타I
뉴욕행
사라진냄새골
미래식未來食
바늘잎소리
아침아홉시
늦가을마당
그대의두발

3부달맞이

달맞이
창밖의나무
멧돼지생각
무정한마음
한여름
고요한순간
오래된동네
내일은평일
시인의유족
조선닭
비둘기세마리
혼자서잊어버리기
안국역에서
숨쉬기힘든나날
시를읽는사람들

4부서서잠든나무

서서잠든나무
가랑잎
송과선여사댁
청송오리
개발자국
시인이살던동네
우표없는엽서
폐품주이할배
겨울맞이
그녀생각
마가목주
파르티타III
남몰래흘리는눈물
앞서간친구
장례식장가는길

해설

변한것또는변하는것과변하지않은것사이에서·장경렬

출판사 서평

잠든의식과영혼을일으키는
끈질긴순수의도정

드넓은산하무수한잡초들도
저마다이름이있기마련
의미없는존재가어디있겠나
온세상모든사물에스며들어
혼자서귀기울이고중얼거리며
그속에숨은뜻가까스로불러내는
그런친구가곧시인아닌가
─「그짧은글」부분

김광규시에서화자는“가물거리는그저께기억/수첩을꺼내보지않으면누구를만났는지얼른떠오르지않”(「그저께보낸메일」)는매일을마주한다.연기처럼퍼지는기억을곱씹고간신히떠오른편린을종이위에꾹꾹눌러쓴다.“소나무우듬지위로커다란/열기구처럼떠오르는보름달/눈에띈순간저절로탄성이/터져나왔다그렇지!/ㄷ으로시작되었어/그다음에ㅁ이뒤따랐지!/달……마……로이어지는그이름”석자를찾아헤매는동안“평생배우고간직해온온갖이름들”(「달맞이」)도덩달아각각이지닌의미의무게가무색하게풀썩떠올랐다사라진다.“한참동안궁리하다못해/식구들에게물어보았지만/단기기억상실증이니/스스로생각해보라고타박만받”(「혼자서잊어버리기」)는다.매일같이펼쳐지는이외딴소동속에서,화자는쉬이분개하거나묵묵한슬픔에휩싸이는법이없다.다만그립고익숙한것들이뿌려두고간흔적을되밟으며,조각난의미를그러쥔채지난날을조근조근모사模寫한다.

사박사박사박낙엽밟는작은발자국소리……놈이아직도뒷마당에서
돌아다니는것아닐까.
우리가자는동안밤새소리없이눈이내려,세상이온통은세계로바뀐
겨울아침이면,국화빵처럼생긴발자국이뒤뜰여기저기남아있는때도있다.
평생살던곳떠나지못하고,놈은아직도우리집마당을바장이고있는가.
─「개발자국」부분

이때,화자가취하는방식은고통이나슬픔등심정적결과대신대상의동선을좇아과정을집약적으로보여주는것이다.특별한사건을다루지도않을뿐더러철저하게시간의흐름에따라진술하지도않는다.화자의진술이둘러싼중심을파헤치면심심하리만치일상적인,나아닌다른생이있다.생의부재가있다.시인이이미40여년전데뷔작에서선보인‘있음과없음’의세계(「有無」연작,『우리를적시는마지막꿈』,문학과지성사,1979)가유장히흐른다.머물다간개별존재에대단한의미를부여하는것도아닌데광막한울림을주는것은어떤연유에서일까.대상의존재의미를부풀리는것은진술주체의비만한자의식을부각할뿐이다.반면김광규의시에서화자와대상간의거리는매우가까워독자의이입을어렵지않게끌어내고,담담한묘사로서영혼의겸양과진실을산뜻하게드러내기에감동적이다.어제혹은그저께의존재가,오늘인듯생생한풍경으로돌연눈앞에나타날때생과사,실재와허구의경계는모호해지고아늑한정감이흘러넘친다.기억의끈질긴힘에의지해시인은안갯속혼란을버티고오늘,이순간의생기를가다듬는다.

곡선을그리는그윽한유머와
중력에굴하지않는너른기세

영웅전을제외한문학작품은대부분이패배한자들이나애석하게죽은이들이남긴소문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신나는성공담보다는슬픈실패담이우리를감동시키는것은문학의숙명이며본질이아닐까.―뒤표지시인의산문에서

김광규의시세계는필연적으로생몰을거치는존재의애사哀史에바치는다정한기록이다.주위의시선에는아랑곳없이미물의양태에진지하게몰두하며진실로감탄하고격없이소통하는태도는고스란히시적어조에묻어나때로그윽한유머를낳는다.화자는,귀성하는기숙사생들을먼눈으로바라보며“한바탕놀고나면모조리잊어버리고/기숙사생활도새삼낯설어질걸”(「내일은평일」)하고짓궂게말을걸거나,어미의고생은나몰라라그악스럽게먹이를받아먹는새끼비둘기들을관찰하며쓴소리를건네기도한다(“첫째놈이받아먹으면둘째놈이/왜나는안주느냐고/어미의등에올라어미머리쪼아대고/둘째놈이받아먹으면/첫째놈이어미머리쪼아댄다/불효자식들같으니라구”―「비둘기세마리」).“옆집담”을타고들어가매달린“연두색호박”을지켜보며몰래“따먹고싶은욕심”이일어나자“옆집영감이투덜거리는소리를피할수없을걸/요즘도호박도둑이있는모양이여……”(「호박그자체」)하고지레상황을예견하며스스로마음의제동을걸기도한다.이렇듯세밀한관찰에서비롯된발화는드넓은공감의저변을드러내며그어떤위화감도,불편도초래하지않고미소를자아낸다.

시집의해설을맡은장경렬의말처럼“오래생각하고깊이짚어본사람의지극히자연스러운발언”으로,“지극히인간적인마음과눈으로삶과삶의주변에눈길을주고이를향한자신의속마음을드러”냄으로써김광규의시가도달하는지점은불완전한삶의변수를대하는겸허함이다.화자는산속에서“나를힐끗쳐다보고유유히/길건너동네쪽언덕길로사라”진“멧돼지”를떠올리며“어떻게하나요즘도거기지나갈때면/혼자속으로생각”(「멧돼지생각」)한다.“약속한필름을보내주지않”고사라진“사진사”와우연히재회했지만그가“다시한번사진보내주겠다/약속하고십수년지나도록소식이없”으니다만“언젠가또만나면어떻게하나”(「그녀생각」)생각할뿐이다.남은생이기약없듯만남도기약이없다.그렇기에어렴풋한기억속그네들의심중을헤아리며안부를전한다.“어떻게할”수없는운명에대한공동체적연민을담아.

수백번의조탁을거친
심안이그려낸인생조감도

어둠을헤치고낮은계단을더듬더듬올라가현관문을노크했다.
한참만에조용히문이열렸다.안은바깥보다더어두웠다.
토치가없어서성냥으로가스불을켰다.
어둠이차츰물러가는방안을화초나무몇그루가지키고있었다.
고무나무와사철나무,벽오동과게다리선인장이소리없이눈을비비며
밤에찾아온손님을맞이했다.
일천삼백만인구가밀집해살고있는도시라고는도저히믿어지지
않을만큼조용한시간이어둠속에멈춰있었다.불면증을모르고살아온
70년동안한번도느낀적없는고요가거기에머물러있었다.
수도꼭지가제대로잠기지않아,가끔물방울떨어지는소리가
들려올뿐,인간과사물사이의온갖언어와음향이사라진
정일한시공속에서아무런용건도없이나혼자서있는것같았다.
송과선여사의부군이침묵한지벌써몇해가흘렀나.얼마전에
나온시집을한권전하고말없이속세의캄캄한밤속으로되돌아나왔다.
어두운기억속에나는여전히혼자였다.
─「송과선여사댁」전문

김광규의시는수백번의조탁을거친단순한어휘로깨달음을전한다.단순성너머엔세계와의화해를향한의지와소통을이끄는매혹이자리잡고있다.첨단과학기술이지배한사회의윤리적문제를꼬집는정치한견해마저부드러운노랫말같으며(「로봇한마리」),뇌속내분비기관의노후로인한불면의고통마저신비로운전설처럼그려진다(「송과선여사댁」).그의시편들은어느한방향에서대상을바라보거나명명하지않고,대상의기원과내력에대한수많은추측을포괄하며조심스레작성된조감도鳥瞰圖다.일상의한자락에서출발해유감없이펼쳐보이는인간사의희노애락.김광규의시세계는삿된편견없이세상만물에게넉넉한자리를내어준다.앞서간이들의뒤를단정하게따르는이가,훗날그자리를이어받을이들의고독을한줌덜어내기위해쓴안내서로서깊은울림을준다.나고드는숨결처럼자연스러운,오늘이순간을있게하는문학의원초적인힘.우리가김광규의시를읽는이유다.

■시인의말

열두번째시집이다.

2016년봄부터2022년겨울까지일곱해동안발표한
시편들을모았다.‘어제오늘’이나‘오늘내일’보다는
‘그저께’쓴작품들이주로실려있다.

나날의삶속에서보고느낀구체적사연들을되도록
짧은글에담았다.여기서한발짝더나가면
아마도보이지않는침묵이있을것이다.

늦게만난독자들에게아쉬운인사를전하며……

2023년새봄에
김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