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내성적인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1

거침없이 내성적인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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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2019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자켓의 첫 시집.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시 속의 일원이 되”어버린다는 심사평과 함께 등장한 이자켓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시의 세계를 비틀지 않고 정면으로 직진한다. 축구장, 영화관, 이발소와 같은 생활의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화자 역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가는 데만 집중한다.
이자켓이 펼쳐 보이는 시의 세계는 한밤에 도로를 질주하는 라이더의 재킷처럼 그 무게가 가볍고 행동거지가 가뿐하기만 하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의 낯섦을 연기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애써 끌어다 쓰지 않는다. 부를 나누지 않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40편의 작품은 아주 오랫동안 질주하던 사람이 자기가 오래전에 떠나온 길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걷는 것처럼 정직하기만 하다.
저자

이자켓

시인이자켓은2019년대산대학문학상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축구를사랑해서
제일멋질오늘
프랑스에서영화보기
그것이문제라면
떠나기전에묻기
복어가요
그러고보니
나를써요
에차
말고라는고양이
어느재규어의키스
멍청이들
양초를빚고빛나게하지
혹은요
타운칠링
피우지말고태우라
거침없이내성적인
가쿠는그런사람이아니다
용된장
Rinsing
노란날들
고쳐쓰기
아시안훌리건
더있어도돼
회신바람
와줘
유니버스진화
당신의수백가지갈색동물
배타요
그러다보니
가는버스
너바나
카토크CarTalk

미라빌리스

개별적놀라움
C/O
세상의절반
고쳐쓰기

해설
이자켓착용설명서·이희우

출판사 서평

그가그리는사랑의관계혹은성적인관계에는단독성이나고유성이없고,단단한결속이나동거를위한끈질긴협상이없다.이자켓의시를관류하는정서가있다면,이러한관계의불안정함과찰나성,어긋남에서비롯되는어떤동시대적외로움을꼽을수있을것이다.여기에는관계의변화,대립,이별,갈등해소같은서사적전개가없다.교훈이나주장도없다.이자켓의텍스트는‘리버시블’,즉뒤집어입을수있는옷이다.어제는어둠속에잠겨있었던옷의안쪽이오늘은세상밖에드러나빛을받을것이다.
_이희우,해설「이자켓착용설명서」에서

어딘가로가는사람들
그끝에서사라지는연인들

합정까지걸을까?
추운데
목도리빌려줄게
너는?
난추위잘안타
-「복어가요」부분

이미객석은가득차있는데배우는연기하지않는다.이자켓시의화자는모노드라마주인공처럼홀로서있다.물이팔팔끓고담배필터가끝까지타들어가는동안그는멀뚱히서서“방어태세의복어만큼부풀어”(「복어가요」)있다.드문드문이어지는말들은“소파가죽”이내는“맥빠진소리”(「축구를사랑해서」)처럼기운이없다.저멀리버려진배에서도“맥빠진소리가뿌―”(배타요)하고들려온다.한사람이질문하면,다른사람이대답한다.분명두사람이나누는대화임에도이자켓의시에서는다른사람의존재가느껴지지않는다.볼수도,만질수도,느낄수도없다.더는서로를추억하지않는연인처럼,이미오래전에헤어진사람처럼.그들이연인이었다는사실만을감각할뿐이다.이러한거리감은시에서보여주는관계의단절이사적인영역을넘어서동시대의외로움으로까지확장된다.자신이아닌이국의관객에게머리를기대는연인에게“이젠가야해,/영화는잊고/이제가야해요”(「프랑스에서영화보기」)라고읊조리는화자의목소리는쓸쓸하기만하다.

다시나타나는이웃들
거침없이내성적인시인

있잖아,옆도시엔도와시가없대
2지구부터4지구까지만있대
모두트럭을타고다닌대
적재함에는각얼음이깔려있고
얼음속에서빈병이흔들린대
막부딪친대

옆도시의교차로에선
세단을탄대드라이브를한대
단독주택이많고집마다사랑이있대
응……거짓말
-「말고라는고양이」부분

명동에있는호텔로비에서명함을주고받은“오키나와아저씨슈”(「거침없이내성적인」)“위층사는주민퐁카”(「제일멋질오늘」)당최겁이라곤없는“복서영감”(「너바나」)까지.낯선이웃들의등장에도화자의시선은덤덤하기만하다.이자켓이그리는시세계는우리가사는곳과멀지않고곳곳마다“집마다사랑”이떨고있다.화자는이웃들과악수를하고서로안부를묻고이내어디로가는지까지꼼꼼하게묻는다.말투는까칠하고행동거지도다정한구석이라곤찾기어렵지만,그속에는어떤교훈이나주장도없다.모든것이다괜찮고“누구의탓”도아닌시세계에서는거침없이상대에게로다가가가만가만이야기를들어주면된다.자주가던이발소에앉아“절반만사는듯”한기분을느끼는시인에게이웃들은“안고있으면시원한늦여름”처럼시원한그늘이되어주기도한다(「세상의절반」).시속에서도사랑했던연인,우연했던이웃,잘모르는예보를뒤로하고떠나는시인은“설명서는한마디더얹지않”(「시인의말」)겠다고힘주어말한다.뒤표지시인의글에서“연결후,흔들리도록느슨하게풀어두”라고다시한번당부하는걸보면이자켓에게관계는결속이아닌연결이고그가말하는사랑은마침내각자의세계로해체되는게아닐까.거침없이내성적인그의세계에남아있지않은여지가,그쓸쓸함에대해자꾸만말을걸고싶게한다.

■시인의말

설명서는
한마디더얹지않고
한마디없거나참지아니하고
2023년3월
이자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