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래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3

기억의 미래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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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더 낯선 시인가?”

반백 년 시력의 자장 안에서
세계의 틈을 응망하는 관찰자

과거에 새겨진 미래의 기억, 이하석 열네번째 시집 출간
학』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시력 50여 년을 넘어선 시인은 그간 갈고닦은 세월만큼 담담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이 세계의 음지陰地를 응시한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조합한 제목 “기억의 미래”에서 그간의 시 세계를 잇고 확장하는 동시에 여전히 스스로를 갱신하고자 하는 시인 이하석의 낯선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2015년 『연애 間』(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며 ‘기억’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한 시들을 묶어낸 바 있다. 기억의 흔적을 되짚고 반추하는 시편들은 지나간 과거를 지우려 노력할수록 그 얼룩은 더 선명해지기 마련이라는 성찰을 담아낸 한편, 기억을 기록하는 이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정확한 문장으로 응시하는 시인의 원숙한 내면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2023년의 봄날, 시인은 한층 넓어진 시선과 깊어진 사유로 ‘기억의 미래’를 노래하고자 한다. 과거에 갇혀 있는 ‘기억’의 한계를 넘어 그다음의 날들을 꿈꾸고자 한다. 그것은 애정을 갖고 무언가의 과거와 현재를 가만히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왜 서로 낯선 시인가? 언어여,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말을 비틀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비시적이면서 가련한 존재인가? 다만, 봄날 저녁의 보랏빛과 붉은색, 노란색이 뒤섞인 노을이 꽃 핀 산딸나무를 물들이는 걸 있는 그대로 본다. 바람이 나무를 흔든다. 거기 앉아 지저귀는 후투티의 목청은 애틋하게 쉬어 있다.
-‘뒤표지 글’ 부분
저자

이하석

1948년경북고령에서출생하여6세때대구로이주,쭉대구에서살아오고있다.1971년『현대시학』지추천으로등단했다.시집『투명한속』『김씨의옆얼굴』『우리낯선사람들』『측백나무울타리』『금요일엔먼데를본다』『녹』『것들』『상응』『연애간(間)』등과시선집『유리속의폭풍』『비밀』『고추잠자리』『부서진활주로』『환한밤』등이있다.대구문학상,김수영문학상,도천문학상,김달진문학상김광협문학상,대구시문화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밝은교신/페트병/갈대/폭포의시/봄현수막/솔방울/산넘어가기/산넘어가기의성찰/바위/블루콤마/조협?莢/종이컵들/비닐봉지/대비사/유리바다/가비야운,나비/마스크/틈만나면/최소2미터거리를유지해주세요↑/우포늪/송사리의노래

2부
분꽃/민들레골목의시/겨울새/개/제비꽃/방천시장/문학관/숟가락/해안/빨간건물/‘마주보고있는사슴’에게질문하다/푸른문

3부
가창댐아래서/가창댐/구절초/파문/제비꽃역사/세워지다/호명1/호명2/서로/코리아의시/자장가/5월/두툼한손

4부
누워있는여자/불탄뒤/금붕어/패랭이꽃/통영/푸른색/낙화에대하여/손/여뀌꽃/봄/마애란磨崖蘭/직지사/정취암/이별이있고나서무성해졌다/입원중

5부
뒤늦은처음/서울,더그레이/산딸나무일기/낯선,시/시선의기척/수니

해설
응시의풍경과음지陰地의시학·김문주

출판사 서평

“거기앉아서,나도내다보는자,”
보는것이아니라보여지는것들

블루콤마의주인도내다보는자에속하지만,자주카페밖으로나가강변풍경이되어서담배를피운다.크게숨을들이쉬고내쉬는데,그럴때마다연기가급히그의몸을부풀리다가위축시킨다.제생을제대로왜곡시킬줄아는것같다.나도카페의손님들도그모습을멍하니내다본다.하지만결국,서로빤히들여다보이는느낌이다.가끔눈이마주치면서로울컥해진다.
-「블루콤마」부분

강변카페인‘블루콤마’의손님들은유리창안쪽에앉아풍경을내다본다.때로는이카페의주인마저“강변풍경이되어”전망된다.그가담배를피우며숨을쉴때,연기가“그의몸을부풀리”고“위축시”키는장면은‘연기’에독자적인시선을불어넣음으로써이시의주체와객체를또다시전도한다.이번시집의해설을맡은문학평론가김문주는이러한점에착안해“시를구성하는존재들이모두보는주체이자대상으로세계에참여하고있”음을설명한다.“인간중심의위계적감수성이사물의시각에자리를내어줌으로써”“풍경의세계에평등하게참여하고있”다는말이다.

흙속에그의씨가숨겨졌고,
그건나의지금으로피어난다.

봄이그걸밝힌다.

이당연한역사가
제화사한응시의그늘을드리운다.
-「제비꽃역사」부분

우리가이세계를보고사유하는것이아니라,세계의사물각각이스스로를보여주고있다는인식의전환은문명비판적사유나생태적상상력에국한하지않는이하석의시세계를짐작게한다.이는현실의구체적인고통을아름다운언어로좌시하지않으려는노력의일환일것이다.특히,이번시집의3부는한국현대사의역사적풍경을집중적으로그려낸다.1950년일어난‘대구가창골민간인학살’(「가창댐아래서」「가창댐」),5.18민주화운동(「자장가」)등을추모하고기념하는시편들은해방이후와한국전쟁시기의비극앞에서“고스란히눈뜨고”(「호명2」)자하는시인의단호한결의를증언한다.

“버려진것들은늘더버려져,있다.”
어둠이내리면들려오는소리

밤이낮은소리들로만정밀하게얽혀짜입니다.

쌓아놓은도서관의책들에서
말들이부식되어뭇시간들에녹아들듯
오래펼쳐져펄럭이는늪은새로말문을틉니다.

내가부르는소리들은동심형으로늪을확장하지만,
매번수면과가시연잎의틈이더조밀해집니다.
-「우포늪」부분

이하석의시에서‘깊은밤’은주체가된사물이율동하는시간이다.밤이찾아오면우포늪의생명들이새로말문을튼다.“낮은소리들”이“수런대는고요속에”자리한우포늪의‘틈’은생명들이오가고부대끼는길로서활력을불어넣는다.소리의파장이커질수록생명들의사이는긴밀해진다.또다른어느밤엔목줄이풀린개가“어둠을향해으르렁댄다”.모두가잠든밤쓰레기장을뒤지는개는“이동네가버린어둠들”(「개」)을발각해낸다.버려진사물들의종착지인쓰레기장에“가로등불빛을뒤집어”쓰고나타난개의우짖음은그곳을외면하려는‘나’에게비릿한공포감을유발한다.
시인은흔히생명을빨아들이는존재로인식되는늪과더럽고음습한쓰레기장에생명들의‘소리’를채우며어떤‘틈’을마련해낸다.삶의뒤편에숨겨진고요한곳,달리말해쓸쓸하고적적한곳들을부러찾아가그곳의숨겨진생기를들춰낸다.이는시인이오랫동안천착해온“폐허의적요가피우는꽃”(뒤표지글,『것들』)이되어삭막한음지를밝힌다.이러한시인의자성은“사랑은시로할수밖에없는것”(「낯선,시」)이란오랜깨달음으로이어진다.그것은환하고따뜻한사랑이아닌,“캄캄한뜨거운네속에서나를응시하며”(「뒤늦은처음」)일구는사랑일것이나,“아직도,간절히,‘말’하고싶은”(뒤표지글)시인은한껏주름진얼굴로“그런음지陰地지.사랑은”(「낯선,시」)하고읊조릴수밖에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