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대명사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5

없음의 대명사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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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

‘웃음’과 ‘울음’이 나란히 놓이고
‘무표정’으로 ‘표정’을 지을 때
‘없다’와 ‘있었다’ 사이에서 떠오르는 ‘잃었다’의 자리
시인 오은의 여섯번째 시집 『없음의 대명사』가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85번째로 출간되었다. 전작 『나는 이름이 있었다』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라 반가움이 크다. 오랜만의 새 시집이긴 하지만 그사이 시인은 다양한 앤솔러지와 산문집, 청소년 시집 등을 출간했을 뿐 아니라 2018년 4월부터 2023년 현재까지 온라인 서점 예스24의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오은의 옹기종기’를 맡아 현재까지 진행해오고 있으니, 읽고 쓰고 그에 대해 나누는 일을 게을리한 적은 없다.

2002년 4월, 스무 살에 시인이 되었다. 올해로 데뷔한 지 20년을 꽉 채우고 21년째에 접어들었다.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2009년에 나왔으니, “등단한 순간과 시인이 된 순간이 다르다고 믿는”다는 시인이 쓴 약력처럼, 이르게 등단하여 천천히 시인이 되었다. 1부부터 ‘말놀이 애드리브’라는 부제를 달고 거침없이 언어유희를 보여주며 경쾌하게 전복적이었던 첫 시집은 큰 주목을 받았다. 오은은 이를 한때의 신드롬으로 끝내지 않고, 이후 14년 동안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간의 간격이 짧은 적도, 긴 적도 있지만 2~3년에 한 권꼴로 나온 셈이다. “시인은 직업이 아닌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또 다른 시집에 시인이 쓴 약력처럼, 오은은 ‘시인의 상태’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그 과정에서 고유의 시 세계가 더욱 단단해졌음은 물론이다. 시인이 되고 나서, 오은은 시와 멀어진 적이 없다.
오은은 주황이다. 빨강과 노랑의 중간 색. 그에게 빨강은 “모든 익는 것들의 종착지”(『너랑 나랑 노랑』, p. 16)이고, 노랑은 “한없이 밝아”지게 하는 천진난만한 색이다(같은 책, p. 11). 거침없이 정열적인 청년과 해맑고 환한 아이가 함께 있다. 하여 그의 시는 끝내 빨강으로 치우치지 않았고, 기어이 노랑을 놓지 않았다. 오은은 원색은 좋아했지만 원색적이었던 적은 없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라고 했던 시인은 이제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이름”을 가린 “대명사”로. ‘있었다’가 ‘없음’으로 가는 길에는 ‘잃었다’가 놓여 있다(“‘잃었다’의 자리에는 ‘있었다’가 있었다”-‘시인의 말’). “‘앓는다’의 삶이 끝나고 ‘않는다’의 삶은 살고 있는 중이”(「않는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 p. 97)라고 했던 시인은 ‘잃었다’를 거쳐 ‘없음’ 앞에 당도했다. 그 슬픔을 능히 짐작하면서도 시인은 ‘없음’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그에게 “시 쓰기는 무언가를 여는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면서 시작”(「나의 시를 말한다」, 『현대시』 2023년 5월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쏟아지는 대명사들.

텅 빈 대명사 속의 특별한 이야기
대명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말 또는 그런 말들을 지칭하는 품사로, 지시대명사와 인칭대명사로 나뉜다. 『없음의 대명사』는 총 두 개의 부로 나뉘는데, ‘1부 범람하는 명랑’에는 지시대명사, 2부 ‘무표정도 표정’에는 인칭대명사를 제목으로 한 시가 놓였다. 「그곳」이라는 제목의 시 3편, 「그것들」 6편, 「그것」 16편, 「이것」 1편과 「그들」 9편, 「그」 9편, 「우리」 9편, 「너」 4편, 「나」 1편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 평론가는 “누구보다도 언어의 물성 및 자기 지시성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작법을 만들어”온 오은에게 “대명사는 말이 말을 가리키는 세계, 말들에 대한 말이 숲을 이루는 왕국의 입구로 삼기에 맞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라는 텅 빈 대명사 하나를 던져놓고 신나게 변죽을 울려 우리로 하여금 꽉 찬 의미를 낚아 올리게” 한 다음 “‘그곳’에 데려다 놓”는 식이니 말이다.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 수 없”이 대명사가 “제목의 자리에 놓”여 있는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이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떠올리지 않은 채 말과 말이 모여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열면 그것들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잊어도 있겠다는 듯이, 있어서 잊지 못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잊으려고 열었다. 있으면 생각나니까, 나타나니까, 나를 옥죄니까. 잊지 못하니까.
있지 않을 거야, 있지 않을지도 몰라, 있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들은 있었다. 잊지 못할 거야,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르지,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들은 바깥에 있었다. 안에서는 모르는 곳에. 안은 안온해서, 평이해서, 비슷해서 알 수 없었다. 속사정은 여간해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몸을 웅크려 농밀해지기만 한다.
평생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열 마음과 여는 손만 있다면. 없어도 계속 생각날 것이다. 머릿속에 나타날 것이다. 가슴을 옥죌 것이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
닫으면 그것들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야. 눈을 감기가 미안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그것들이. 계속 생각나면 계속 생겨나는 그것들이. 열어도 닫아도. 열지 않아도. 닫지 못해서.

있다.
-「그것들」, p. 16

『없음의 대명사』를 읽다 보면, 독자의 시선도 시인의 시선을 따라 ‘그것’이 ‘있었던’ 자리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선을 붙든 장면, 불시에 찾아든 감정, 무시로 젖어드는 상상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비록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질지 모르지만,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선이 채워나가는 이야기는 주로 상실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속사정”이다. “여간해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그 사정 속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디디는 일이 오은의 시 쓰기인 것이다. “웃음의 대명사”로 불리며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 부서지고 마모되어 사라져버린 ‘그’, 혹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붓고 있”는 ‘그’가 여기 있다.

그는 맞춤법에 약했다 첫 직장에 입사할 때까지 ‘이래라저래라’가 ‘일해라 절해라’인 줄 알았다 한번은 사내 메신저를 통해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김 과장님은 나한테 맨날 일해라 절해라 하신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동료는 한동안 답신을 하지 않았다 메신저에서도 존칭과 경어를 쓰는 게 딱딱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농담할 줄도, 침묵을 참을 줄도 몰랐다 동료는 한참 뒤에 ‘이래라저래라’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했고 한동안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창피한 나머지, 알아서 잘 못하고 있었다 26년 동안 뿌리 깊게 믿고 있던 어떤 체계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저 표현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김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수그려 인사했다 김 과장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동료 역시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농담할 줄도, 침묵을 참을 줄도 몰랐던 그는 임기응변에도 젬병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깊디깊었다 황급히 메신저 창을 닫는데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차질 없이 발주發注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 공들여 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 이도 ‘우리가 하는 건 발주가 아니라 수주受注야’라고 일갈하는 이도 없었다 ‘일해라 절해라’ 말고는 일절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다가 상사가 지나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절하라는 거 아니었어? 그는 그런 줄 알았다 매일 일하고 절했다
퇴근 무렵, 김 과장이 회식하자고 했다 “내일 쉬는 날이지? 오랜만에 부어라 마셔라 어때” 호탕한 그의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회식하기 싫어서였다 “이렇게 갑자기요? 데이트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도 “내일 건강검진 예약을 해두어서요”라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이도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들은 회식하느니 일하고 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 과장의 말이 ‘일해라 절해라’에 사로잡힌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일해라 절해라 부어라 마셔라…… 발주하는 사람은 갑이고 수주하는 사람은 을인가? 그는 평생 을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하고 절하고 붓고 마시다 보면 회사의 숙주宿主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붓고 있었다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잘하고 싶었다
-「그」, p. 94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문제 삼으면서 농담처럼 떠도는 맞춤법 실수 이야기가 오은의 시에 와서 웃지 못할 속사정을 가진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다. “매일 일하고 절”하는 삶에서 비롯된 오해. 하여 그것이 자신의 무지인 것을 깨달았을 때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은 절망. 그리고 거기에 남겨진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잘하고 싶었”던 마음. 오은은 일찍이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고 “다만 낄낄거릴 따름”인 늙은 돼지가 되는 것이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호텔 타셀의 돼지들」)이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잘못 소리 내어 웃는 대신 무표정으로 표정을 지으며 웃음 옆에 울음을 나란히 놓고 있다.

지금-여기 ‘없는’ 것들의 자리
시인은 “들여다보면 웃음은 울음의 결정적 양상일 때가 많다”(「나의 시를 말한다」)고 고백한다. 이번 시집이 여전히 주황의 따뜻함을 지녔으면서도 그 속에서 깊디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서시에서 마주한 저 “범람하는 명랑” 때문이다.

“아빠, 나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그곳」, p. 9

비록 현실은 “내 앞에서도/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나」)지만,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은 “명랑”이다.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하여 잃었음을 확인하는 자리, 시인은 봇물처럼 터지는 슬픔을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과 같은 자리에 둔다.
“‘없다’와 ‘있었다’ 사이의 시차와 간극을 메우는 것이 우리의 슬픔이”라는 오연경 평론가의 해설은 이 시집을 더없이 정확하게 꿰뚫는다. 잃어버리고, 지금-여기 없는 것들을 시인은 대명사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시인의 대명사는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다시’ 있게 한다. 이것은 오은이 시를 사는 방식이다. 시인 오은이 시를 통해 ‘없음’을 ‘대표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놀이가 아니다. 오은은 말놀이의 대명사이지만 말놀이라고 알려진 어떤 시작법의 기표가 아니다. 그는 말의 사태와 존재의 사태가 하나로 모아지는 매 순간의 삶을 살아내려 애쓴다. 그 순간은 우연도 작위도 아닌, 오직 말로 존재를 살고 존재로 말을 재는 집요한 삶의 의욕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오연경, 해설 「전방위의 슬픔, 전속력의 명랑」에서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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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은

등단한순간과시인이된순간이다르다고믿는사람.누가시켜서하는일은정말이지열심히한다.어떻게든해내고말겠다는마음때문에몸과마음을많이다치기도했다.다치는와중에몸과마음이연결되어있다는사실을깨닫기도했다.삶의중요한길목은아무도시키지않았던일을하다가마주했다.누가시키지도않았는데,아니오히려그랬기에계속해서무언가를쓰고있었다.쓸때마다찾아오는기진맥진함이좋...

목차

시인의말

1부범람하는명랑
그곳9
그곳10
그곳12
그것들13
그것들16
그것들18
그것들20
그것들22
그것들25
그것28
그것30
그것32
그것34
그것37
그것38
그것40
그것41
그것44
그것46
그것48
그것51
그것52
그것54
그것56
그것58
이것59

2부무표정도표정
그들63
그들66
그들67
그들68
그들70
그들72
그들74
그들77
그들78
그80
그82
그86
그89
그92
그94
그97
그100
그102
우리105
우리106
우리108
우리110
우리113
우리116
우리118
우리120
우리122
너124
너127
너130
너132
나134

해설
전방위의슬픔,전속력의명랑·오연경136

출판사 서평

텅빈대명사속의특별한이야기

대명사는사람이나사물의이름을대신나타내는말또는그런말들을지칭하는품사로,지시대명사와인칭대명사로나뉜다.『없음의대명사』는총두개의부로나뉘는데,‘1부범람하는명랑’에는지시대명사,2부‘무표정도표정’에는인칭대명사를제목으로한시가놓였다.「그곳」이라는제목의시3편,「그것들」6편,「그것」16편,「이것」1편과「그들」9편,「그」9편,「우리」9편,「너」4편,「나」1편이담겨있다.
이번시집의해설을쓴오연경평론가는“누구보다도언어의물성및자기지시성에관심을가지고자신만의고유한시작법을만들어”온오은에게“대명사는말이말을가리키는세계,말들에대한말이숲을이루는왕국의입구로삼기에맞춤한것이”라고말한다.“‘그것’이라는텅빈대명사하나를던져놓고신나게변죽을울려우리로하여금꽉찬의미를낚아올리게”한다음“‘그곳’에데려다놓”는식이니말이다.“무엇을지시하는지알수없”이대명사가“제목의자리에놓”여있는이번시집에서독자들이“어떤구체적인대상도떠올리지않은채말과말이모여특별한이야기가되어가는현장을목격하게”되는이유가여기에있다.

열면그것들이있었다.보란듯이.잊어도있겠다는듯이,있어서잊지못할거라는듯이.그러나잊으려고열었다.있으면생각나니까,나타나니까,나를옥죄니까.잊지못하니까.
있지않을거야,있지않을지도몰라,있지않으면얼마나좋을까.그것들은있었다.잊지못할거야,영영잊지못할지도모르지,잊을수만있다면얼마나좋겠어.어김없이있었다.
그것들은바깥에있었다.안에서는모르는곳에.안은안온해서,평이해서,비슷해서알수없었다.속사정은여간해선바깥출입을하지않는다.몸을웅크려농밀해지기만한다.
평생있을것이다.그것들을열마음과여는손만있다면.없어도계속생각날것이다.머릿속에나타날것이다.가슴을옥죌것이다.없음은있었음을끊임없이두드릴것이다.
닫으면그것들이사라졌다.감쪽같이.눈에보이지않는다고해서없는것은아니야.눈을감기가미안했다.보이지않는것과보지않는것사이에그것들이.계속생각나면계속생겨나는그것들이.열어도닫아도.열지않아도.닫지못해서.

있다.
―「그것들」,p.16

『없음의대명사』를읽다보면,독자의시선도시인의시선을따라‘그것’이‘있었던’자리에머물게된다.‘그곳’에아무것도없을지라도“눈에보이지않는다고해서없는것은아니”라고시인은말한다.시선을붙든장면,불시에찾아든감정,무시로젖어드는상상이빚어내는분위기는비록오래머물지못하고희미하게사라질지모르지만,“없음은있었음을끊임없이두드릴것이”기때문이다.이러한시인의시선이채워나가는이야기는주로상실하고상처받은이들의“속사정”이다.“여간해선바깥출입을하지않는”그사정속으로성큼발걸음을내디디는일이오은의시쓰기인것이다.“웃음의대명사”로불리며사람들의입방아속에부서지고마모되어사라져버린‘그’,혹은“누가뭐라고하지도않았는데목구멍이붓고있”는‘그’가여기있다.

그는맞춤법에약했다첫직장에입사할때까지‘이래라저래라’가‘일해라절해라’인줄알았다한번은사내메신저를통해동료에게메시지를보낸적이있었다‘김과장님은나한테맨날일해라절해라하신다.알아서잘하고있는데.’동료는한동안답신을하지않았다메신저에서도존칭과경어를쓰는게딱딱해보였을지도모른다그는농담할줄도,침묵을참을줄도몰랐다동료는한참뒤에‘이래라저래라’라고메시지를보내왔다그는인터넷검색을했고한동안아무말도,아무일도할수없었다창피한나머지,알아서잘못하고있었다26년동안뿌리깊게믿고있던어떤체계가흔들리는것같았다다시는저표현을쓸수없을것같았다

때마침김과장이사무실로들어왔다그는자리에서벌떡일어나고개를푹수그려인사했다김과장은당황한기색이었다동료역시그를이상하게쳐다보았다농담할줄도,침묵을참을줄도몰랐던그는임기응변에도젬병이었다머리를긁적이며자리에앉았다의자가깊디깊었다황급히메신저창을닫는데거래처에서전화가걸려왔다“네,차질없이발주發注하겠습니다.”수화기를붙잡고연신고개를숙여댔다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이었다그가가장공들여하는일이었다‘무슨일이야’라고묻는이도‘우리가하는건발주가아니라수주受注야’라고일갈하는이도없었다‘일해라절해라’말고는일절다른생각이나지않았다열심히일하다가상사가지나가면자리에서일어나깍듯하게절하라는거아니었어?그는그런줄알았다매일일하고절했다

퇴근무렵,김과장이회식하자고했다“내일쉬는날이지?오랜만에부어라마셔라어때”호탕한그의말에모두가얼어붙었다회식하기싫어서였다“이렇게갑자기요?데이트있어요”라고당당하게말하는이도“내일건강검진예약을해두어서요”라고완곡하게거절하는이도있었다사무실에있는모든이들은회식하느니일하고절하는게낫다고생각하고있었다그는김과장의말이‘일해라절해라’에사로잡힌자신을놀리는것같았다일해라절해라부어라마셔라……발주하는사람은갑이고수주하는사람은을인가?그는평생을의신세에서벗어날수없을것같았다일하고절하고붓고마시다보면회사의숙주宿主가될수도있을것이다
누가뭐라고하지도않았는데목구멍이붓고있었다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이었다그는그것을잘하고싶었다
―「그」,p.94

젊은세대의문해력을문제삼으면서농담처럼떠도는맞춤법실수이야기가오은의시에와서웃지못할속사정을가진특별한이야기가되었다.“매일일하고절”하는삶에서비롯된오해.하여그것이자신의무지인것을깨달았을때삶을송두리째부정당한것같은절망.그리고거기에남겨진“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을“잘하고싶었”던마음.오은은일찍이“너무늙은나머지꿀꿀거리지못하”고“다만낄낄거릴따름”인늙은돼지가되는것이“이렇게나추하고무서운일”(「호텔타셀의돼지들」)이라했다.그리고시간이흘러,잘못소리내어웃는대신무표정으로표정을지으며웃음옆에울음을나란히놓고있다.

지금-여기‘없는’것들의자리
시인은“들여다보면웃음은울음의결정적양상일때가많다”(「나의시를말한다」)고고백한다.이번시집이여전히주황의따뜻함을지녔으면서도그속에서깊디깊은슬픔이느껴지는것은,서시에서마주한저“범람하는명랑”때문이다.

“아빠,나왔어!”봉안당에들어설때면최대한명랑하게인사한다.그날밤꿈에아빠가나왔다.“은아,오늘은아빠가왔다.”최대한이터질때비어져나오는것이있었다.가마득한그날을향해전속력으로범람하는명랑.
―「그곳」,p.9

비록현실은“내앞에서도/노력하지않으면웃을수없”(「나」)지만,“최대한이터질때비어져나오는것”은“명랑”이다.있었지만지금은없는,하여잃었음을확인하는자리,시인은봇물처럼터지는슬픔을“전속력으로범람하는명랑”과같은자리에둔다.
“‘없다’와‘있었다’사이의시차와간극을메우는것이우리의슬픔이”라는오연경평론가의해설은이시집을더없이정확하게꿰뚫는다.잃어버리고,지금-여기없는것들을시인은대명사로불러들인다.그렇게시인의대명사는잃어버린것을‘대신’하는것이아니라지금-여기‘다시’있게한다.이것은오은이시를사는방식이다.시인오은이시를통해‘없음’을‘대표하는’사람의자리에서는이유이다.

그러니까이것은말놀이가아니다.오은은말놀이의대명사이지만말놀이라고알려진어떤시작법의기표가아니다.그는말의사태와존재의사태가하나로모아지는매순간의삶을살아내려애쓴다.그순간은우연도작위도아닌,오직말로존재를살고존재로말을재는집요한삶의의욕으로성취하는것이다.
―오연경,해설「전방위의슬픔,전속력의명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