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대명사속의특별한이야기
대명사는사람이나사물의이름을대신나타내는말또는그런말들을지칭하는품사로,지시대명사와인칭대명사로나뉜다.『없음의대명사』는총두개의부로나뉘는데,‘1부범람하는명랑’에는지시대명사,2부‘무표정도표정’에는인칭대명사를제목으로한시가놓였다.「그곳」이라는제목의시3편,「그것들」6편,「그것」16편,「이것」1편과「그들」9편,「그」9편,「우리」9편,「너」4편,「나」1편이담겨있다.
이번시집의해설을쓴오연경평론가는“누구보다도언어의물성및자기지시성에관심을가지고자신만의고유한시작법을만들어”온오은에게“대명사는말이말을가리키는세계,말들에대한말이숲을이루는왕국의입구로삼기에맞춤한것이”라고말한다.“‘그것’이라는텅빈대명사하나를던져놓고신나게변죽을울려우리로하여금꽉찬의미를낚아올리게”한다음“‘그곳’에데려다놓”는식이니말이다.“무엇을지시하는지알수없”이대명사가“제목의자리에놓”여있는이번시집에서독자들이“어떤구체적인대상도떠올리지않은채말과말이모여특별한이야기가되어가는현장을목격하게”되는이유가여기에있다.
열면그것들이있었다.보란듯이.잊어도있겠다는듯이,있어서잊지못할거라는듯이.그러나잊으려고열었다.있으면생각나니까,나타나니까,나를옥죄니까.잊지못하니까.
있지않을거야,있지않을지도몰라,있지않으면얼마나좋을까.그것들은있었다.잊지못할거야,영영잊지못할지도모르지,잊을수만있다면얼마나좋겠어.어김없이있었다.
그것들은바깥에있었다.안에서는모르는곳에.안은안온해서,평이해서,비슷해서알수없었다.속사정은여간해선바깥출입을하지않는다.몸을웅크려농밀해지기만한다.
평생있을것이다.그것들을열마음과여는손만있다면.없어도계속생각날것이다.머릿속에나타날것이다.가슴을옥죌것이다.없음은있었음을끊임없이두드릴것이다.
닫으면그것들이사라졌다.감쪽같이.눈에보이지않는다고해서없는것은아니야.눈을감기가미안했다.보이지않는것과보지않는것사이에그것들이.계속생각나면계속생겨나는그것들이.열어도닫아도.열지않아도.닫지못해서.
있다.
―「그것들」,p.16
『없음의대명사』를읽다보면,독자의시선도시인의시선을따라‘그것’이‘있었던’자리에머물게된다.‘그곳’에아무것도없을지라도“눈에보이지않는다고해서없는것은아니”라고시인은말한다.시선을붙든장면,불시에찾아든감정,무시로젖어드는상상이빚어내는분위기는비록오래머물지못하고희미하게사라질지모르지만,“없음은있었음을끊임없이두드릴것이”기때문이다.이러한시인의시선이채워나가는이야기는주로상실하고상처받은이들의“속사정”이다.“여간해선바깥출입을하지않는”그사정속으로성큼발걸음을내디디는일이오은의시쓰기인것이다.“웃음의대명사”로불리며사람들의입방아속에부서지고마모되어사라져버린‘그’,혹은“누가뭐라고하지도않았는데목구멍이붓고있”는‘그’가여기있다.
그는맞춤법에약했다첫직장에입사할때까지‘이래라저래라’가‘일해라절해라’인줄알았다한번은사내메신저를통해동료에게메시지를보낸적이있었다‘김과장님은나한테맨날일해라절해라하신다.알아서잘하고있는데.’동료는한동안답신을하지않았다메신저에서도존칭과경어를쓰는게딱딱해보였을지도모른다그는농담할줄도,침묵을참을줄도몰랐다동료는한참뒤에‘이래라저래라’라고메시지를보내왔다그는인터넷검색을했고한동안아무말도,아무일도할수없었다창피한나머지,알아서잘못하고있었다26년동안뿌리깊게믿고있던어떤체계가흔들리는것같았다다시는저표현을쓸수없을것같았다
때마침김과장이사무실로들어왔다그는자리에서벌떡일어나고개를푹수그려인사했다김과장은당황한기색이었다동료역시그를이상하게쳐다보았다농담할줄도,침묵을참을줄도몰랐던그는임기응변에도젬병이었다머리를긁적이며자리에앉았다의자가깊디깊었다황급히메신저창을닫는데거래처에서전화가걸려왔다“네,차질없이발주發注하겠습니다.”수화기를붙잡고연신고개를숙여댔다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이었다그가가장공들여하는일이었다‘무슨일이야’라고묻는이도‘우리가하는건발주가아니라수주受注야’라고일갈하는이도없었다‘일해라절해라’말고는일절다른생각이나지않았다열심히일하다가상사가지나가면자리에서일어나깍듯하게절하라는거아니었어?그는그런줄알았다매일일하고절했다
퇴근무렵,김과장이회식하자고했다“내일쉬는날이지?오랜만에부어라마셔라어때”호탕한그의말에모두가얼어붙었다회식하기싫어서였다“이렇게갑자기요?데이트있어요”라고당당하게말하는이도“내일건강검진예약을해두어서요”라고완곡하게거절하는이도있었다사무실에있는모든이들은회식하느니일하고절하는게낫다고생각하고있었다그는김과장의말이‘일해라절해라’에사로잡힌자신을놀리는것같았다일해라절해라부어라마셔라……발주하는사람은갑이고수주하는사람은을인가?그는평생을의신세에서벗어날수없을것같았다일하고절하고붓고마시다보면회사의숙주宿主가될수도있을것이다
누가뭐라고하지도않았는데목구멍이붓고있었다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이었다그는그것을잘하고싶었다
―「그」,p.94
젊은세대의문해력을문제삼으면서농담처럼떠도는맞춤법실수이야기가오은의시에와서웃지못할속사정을가진특별한이야기가되었다.“매일일하고절”하는삶에서비롯된오해.하여그것이자신의무지인것을깨달았을때삶을송두리째부정당한것같은절망.그리고거기에남겨진“누구에게보이지도않고누가알아주지도않는일”을“잘하고싶었”던마음.오은은일찍이“너무늙은나머지꿀꿀거리지못하”고“다만낄낄거릴따름”인늙은돼지가되는것이“이렇게나추하고무서운일”(「호텔타셀의돼지들」)이라했다.그리고시간이흘러,잘못소리내어웃는대신무표정으로표정을지으며웃음옆에울음을나란히놓고있다.
지금-여기‘없는’것들의자리
시인은“들여다보면웃음은울음의결정적양상일때가많다”(「나의시를말한다」)고고백한다.이번시집이여전히주황의따뜻함을지녔으면서도그속에서깊디깊은슬픔이느껴지는것은,서시에서마주한저“범람하는명랑”때문이다.
“아빠,나왔어!”봉안당에들어설때면최대한명랑하게인사한다.그날밤꿈에아빠가나왔다.“은아,오늘은아빠가왔다.”최대한이터질때비어져나오는것이있었다.가마득한그날을향해전속력으로범람하는명랑.
―「그곳」,p.9
비록현실은“내앞에서도/노력하지않으면웃을수없”(「나」)지만,“최대한이터질때비어져나오는것”은“명랑”이다.있었지만지금은없는,하여잃었음을확인하는자리,시인은봇물처럼터지는슬픔을“전속력으로범람하는명랑”과같은자리에둔다.
“‘없다’와‘있었다’사이의시차와간극을메우는것이우리의슬픔이”라는오연경평론가의해설은이시집을더없이정확하게꿰뚫는다.잃어버리고,지금-여기없는것들을시인은대명사로불러들인다.그렇게시인의대명사는잃어버린것을‘대신’하는것이아니라지금-여기‘다시’있게한다.이것은오은이시를사는방식이다.시인오은이시를통해‘없음’을‘대표하는’사람의자리에서는이유이다.
그러니까이것은말놀이가아니다.오은은말놀이의대명사이지만말놀이라고알려진어떤시작법의기표가아니다.그는말의사태와존재의사태가하나로모아지는매순간의삶을살아내려애쓴다.그순간은우연도작위도아닌,오직말로존재를살고존재로말을재는집요한삶의의욕으로성취하는것이다.
―오연경,해설「전방위의슬픔,전속력의명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