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17.00
Description
“세상 도처에서 평안을 찾았으나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책을 들고 구석진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도둑(책을 읽는 사람)과 도둑질(책 읽기)에 관한,
혹은 거듭re-태어나기naissance에 관한 키냐르의 문학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L’Homme aux trois lettres』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은 로마인들이 도둑fur을 지칭할 때 에둘러 사용하던 표현이다. 키냐르는 이 표현을 훔쳐 ‘독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키냐르에게 선재先在하는 세계를 훔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학 작품도 선행하는 것을 계승한다. 독서라는 소리 없는 절도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합병된다. 영혼이 ‘책의 하얀 두 지면’의 틈새로 파고들어 새로운 세계에 이르게 된다. 독자 저마다의 거듭-태어남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을 펼침으로써. 책 안에 거주함으로써. 책을 읽음으로써.

키냐르에게 앞으로 충분히 시간이 주어진다면 15권 내지 16권이 될 연작 기획물 ‘마지막 왕국’ 시리즈는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20년에 제11권에 이르렀다. 각 권은 우주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창窓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8권 『은밀한 생』은 ‘사랑’으로, 제9권 『죽도록 사고하다』는 ‘사고思考’로, 제10권 『잉골슈타트의 아이』는 ‘회화繪畫’로 열린 창이다. 제11권인 이 책은 ‘문학’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이다. 요컨대 문학론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 글쓰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독자’와 ‘글 읽기’에 대한 담론이다. 문학 연속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 문학 자체이다. 이따금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산문시 같은 철학적 에세이다.
저자

파스칼키냐르

1948년프랑스노르망디지방의베레뇌유쉬르아브르(외르)에서태어나,1969년에첫작품『말더듬는존재』를출간하였다.어린시절심하게앓았던두차례의자폐증과68혁명의열기,실존주의,구조주의의물결속에서에마뉘엘레비나스,폴리쾨르와함께한철학공부,뱅센대학과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의강의활동,그리고20여년가까이계속된갈리마르출판사와의인연등이그의작품곳곳독특하고끔...

목차


제1장지상낙원으로의여행
제2장간제에게보낸제아미의편지
제3장fur(도둑)
제4장바그다드의기사
제5장알프alf혹은알레프aleph의A
제6장재의수요일
제7장가에타에내걸린키케로의머리
제8장Benveniste의B
제9장문학이라는말에는기원이없다
제10장중국의새들
제11장어린애란무엇인가?
제12장Litterarumamor(문자애호)
제13장에페수스의헤라클레이토스
제14장정신분석
제15장마호메트에게나타난가브리엘천사
제16장녹색
제17장자서전
제18장타피스리
제19장잠의문을새벽이라한다
제20장그림자는시간속에서자라는꽃이기때문이다
제21장테네브레의딱딱이
제22장알페이오스설화
제23장대나무테라스들
제24장침대란무엇인가?
제25장이책이조판된가라몽서체에관하여
제26장알려지지않은악기,알려지지않은책
제27장가장감미로운놀이
제28장문인들의희귀함,등귀騰貴와실종
제29장VertumnumJanumqueliber...(베르툼누스와야누스성향의책……)
제30장낭만적인것들
제31장옛날의냄새
제32장페트라르카가키케로에게편지를쓴다
제33장시간도둑
제34장암고양이무에자
제35장역사상가장충격적인표절에대하여
제36장독자讀者인왕
제37장Y자에대하여
제38장사랑의신비로운본성

옮긴이의말·도둑과도둑질에관한,혹은거듭re-태어나기naissance에관한서사
작가연보
작품목록

출판사 서평

도둑(책을읽는사람)

T.S.엘리엇의말이다.“미숙한시인들은모방한다.원숙한시인들은훔친다.”(91쪽)

‘세글자로불리는사람’이란로마인들이도둑을지칭할때에둘러사용하던표현이다(라틴어로도둑을뜻하는명사는세글자fur이다).키냐르는이표현을훔쳐‘독자’를지칭하는데사용한다.키냐르에의하면‘문학’이란인간이온갖경험을소리없이(침묵)훔쳐서(읽거나쓰는행위)단어혹은기호의형태로환원시킨망망대해같은변화무쌍한공간이라할수있다.우리가키냐르를읽는행위,그것은그의경험과해박한문화지식을훔치는일이다.

키냐르는도둑에게서단독성,침묵,어둠,은밀함……등을읽어낸다.도둑의속성에담긴‘책을읽는사람’의은유를찾아낸다.일본전통가무극노能를완성한예능인으로,대단한독서가로꼽히는제아미가키냐르의은유에타당성을부여한다.다음은그가임종직전에토로했던말이다.

〔……〕나는내가읽은것을모조리훔쳤지.진짜도둑이란두근거리는가슴으로,사방팔방을경계하고,온몸을잔뜩긴장한채,노심초사하는눈빛으로,한밤중에전혀모르는집에혼자들어가는자일세.〔……〕나는혼자어둡고고요한집에들어갔지.지금혼자죽어가듯이,책을읽느라평생혼자였던것같네.(33쪽)

이책은‘독자’와‘글읽기’에대한담론이지만,키냐르는‘글읽기’와‘글쓰기’를,독자와작가를둘로나누지않는다.둘은동일한것이다.“글쓰기란침묵속에서계속글을읽는일”(157쪽)이기때문이다.작가는엄청나게책을많이읽은독자로서독서의연장선상에서글을쓰는것이므로글읽기와글쓰기는문학연속체로한데묶인다.키냐르에게작가와독자는그구분이사라지고,책을통해수없이많은다른삶들의도움으로자신의삶을증가시키는‘문인’이라는용어로수렴된다.결국키냐르는‘독자와독서’에대해말함으로써‘독자/저자’및‘글읽기/글쓰기’에대해,즉‘문학’에대해말하고있는것이다.‘독서예찬론’으로보이는이책이‘문학론’인이유이다.

열정적인독자(읽기)이며숨쉬듯끊임없이글을토해내는저자(글쓰기)인키냐르는자신의문학에대한열정은‘기쁨’에서비롯된다고말한다.그런의미에서이작품은가장자전적이다.

도둑질(책을읽는행위)

독서는소리없는절도이다.(41쪽)

우리는자신에게서스스로를만들어내는창조자가아니다.이미어머니의입에서언어를훔쳤고,아버지의성姓을훔쳤듯이타인을통해만들어지는존재이기때문이다.그러므로선재先在하는세계를훔치는것이키냐르에게는지극히자연스러운일이다.마찬가지로문학작품도어느것이나선행하는것을계승해야한다고주장한다.베르길리우스가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장서에서훔칠수없었다면단한줄의시도쓰지못했을것이라고고대인들은믿었다.키냐르의‘도둑질’은꿀벌들이꽃에서훔쳐꿀을모으듯이자연스럽고행복한일에속한다.

‘책을읽다’와‘훔치다’와‘날다’는순차적이아니라책을펼치는순간동시에발생하는사건이다.책을읽는사람의몸은여기에있으나정말로여기있지않으며,영혼은몸이있는장소를떠나아주먼곳으로날아가떠돈다.자신의정체성은다른정체성에합병되어무아지경이되고,시간은멈추거나다른시간을모조리사라지게하는주도적시간으로변한다.

르네상스-거듭태어나기

책이열린다.
독서는삶을향한통로를,삶이지나는통로를,출생과더불어생겨나는느닷없는빛을더넓게확장한다.
독서는자연을발견하고,탐색하고,희끄무레한대기에서경험이솟아오르게한다.마치우리가태어나듯이.(13쪽)

플라톤의동굴우화에서동굴밖의세계는이데아의세계였다.잭런던은플라톤의개념을훔쳐소설『화이트팽』에서동굴속의새끼늑대가앞발을내미는‘빛의벽’을만들어낸다.이번에는키냐르가잭런던의것을훔쳐‘책의하얀두지면’을만든다.영혼이이틈새로파고들어우리는새로운세계에이르게된다.독자저마다의부활이다.우리는옛날의그림자에잠겨살아가는대신빛의세계로한번더태어날수있다.이렇게아름다운존재의사건은어떻게가능한가?책을펼침으로써.책안에거주함으로써.책을읽음으로써.

제1의출생은수동적인것으로어머니의몸밖으로추방되는일이므로분리와상실과고통과울부짖음이뒤따른다.제2의출생은다른정체성속으로들어가태아처럼자리를잡는행위를통해어둠에서빛의세계로나아가는여행이다.자발적인re(거듭)-naissance(태어나기)이다.어둠에서빛으로의이행,그것이진정한출생이고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