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의 잠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6

두루미의 잠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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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발길 다다르는 곳마다 시를 피워낸 한 사람”

야생의 자연을 노래하고 생태를 관찰하며
40년 시심으로 쌓아올린 단순함의 미학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를 채록하는 사람 최두석의 여덟번째 시집
1980년 월간 시 전문지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태도로 우리 역사와 자연에 관해 이야기해온 최두석 시인의 신작 시집 『두루미의 잠』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86권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대꽃』(문학과지성사, 1984)에서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라고 말한 바 있는 시인은 1980년대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는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적 상상력을 궁구해왔다. 표제시 「대꽃 8」에서 4·19혁명기념일을 말할 때 역시 역사를 비약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군중을 대숲으로 치환하는 등 최두석의 상상력은 시대를 울부짖기보단 언제나 역사의 현장 가까이에 머물던 숨결에 가까웠다. 문단 데뷔 이후 분단 현실에 대해 한 사람의 일생과 역사로 맞서며 비판적 시각을 고수해왔던 그는, 초기 작품에서 김통정, 전태일, 서호빈, 권인숙과 같은 이름을 직접 호명함으로써 시를 객관적으로 대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꽃 이름을 되뇌듯 각각의 이름을 한 겹씩 불러모으던 시인은 이제는 꼭꼭 숨은 사람을 찾듯이 꽃과 새 그리고 흐르는 강에게 말을 건넨다. 이야기의 객관성을 유지하며 줄글로 씌어졌던 시는 선명한 행과 연의 구분을 이루고, 민중에게 향하던 시선이 만물로 옮겨간 지도 어언 40년이다. 이렇듯 자연에게로 가 박동하는 그의 시심詩心은 언제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 위에 지어졌으며, 순리에 따르는 삶에 대해 찬탄하는 시인의 태도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자신이 목도한 자연의 순수한 세계를 군더더기 없이 담아낸 최두석의 시선은 이번 시집에 묶인 66편의 간명한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로 가 또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시인은 자연 앞에서 인기척을 죽이며 자연이 스스로 나타나길, 자연의 숨결이 자신의 삶과 시에 저절로 와 닿기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자연의 항상성 앞에 욕망과 회한으로 출렁이는 마음을 내려놓는 의식의 수련을 수반한다. 인간의 삶에서 멀어진 야생의 자연을 부러 만나러 가는 시인의 행위는 이미 최두석 시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도회적 삶이 요구하는 인위의 가치들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순정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충만한 연결이야말로 우리가 최두석 시에서 만나게 되는 진정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박혜경, 해설 「시인과 자연이 함께 쓰는 시」에서

창문 밖에도 절벽 위에도
온몸으로 피우는 시에 대한 순정

강은 흘러야 강이고
꽃은 피어야 꽃이라고 말하는 듯
동강할미꽃 피네

수만 년 동안
강과 산이
밤낮으로 만나 빚은 절경
절벽을 수놓는 꽃

댐을 막아
절경을 수장시키려던 시절
때맞추어 세상에 나타나
아름다움의 가치를 증언한 꽃

강은 한없이 젊고
그리움은 늙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동강할미꽃 피네.
-「동강할미꽃」 전문

시인이 자신의 여덟번째 시집 『두루미의 잠』 원고를 다 엮었을 때, 강원도 정선과 영월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동강할미꽃이 피었다. 동강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온몸으로 피어나는 꽃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식물로 하늘을 향해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특징이다. 초봄, 그것도 열흘 남짓 꽃 피우는 동강할미꽃을 보기 위해 매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매번 화제가 되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꽃을 훼손하는 이들이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묵은 잎들이 죄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꽃의 영롱한 자태를 혼자만 보기 위해 아예 뿌리째 파낸 일도 있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절벽에 오른 자가 그 마음을 꺾고 짓밟는 것을 두고 시인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가/꽃도 함부로 꺾는다”(「꽃꺼끼재를 지나며」)며 꽃의 안위를 걱정했다. 한겨울 새벽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으로 피어난 성에를 처음으로 꽃이라 명명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역시 꽃의 이름을 꼼꼼하게 곱씹는다. 꽃이 필 때면 “부러 새삼스럽게/더 즐거운 일 찾지 않”고 “더 긴한 일 만들지 않”(「따사로운 봄날」)는다는 시인은 “떨군 꽃잎이/쓰레기가 되어 발길에 밝히는 게 싫”은 나머지 산 속에 사는 화자가 되어 “사람들의 번거로운 눈길에서 벗어나”(「산목련이 백목련에게」) 그윽하고 깊이 걷기만을 원한다. 시적 상상력과 비유를 삼간 채 자연의 생태만을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에는 인간의 마음이 아닌 꽃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순정만이 남아 고개를 숙인 채 절벽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꽃의 흔적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헤아리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 시인

영월 동강가 제장마을에 옻나무를 심어 가꾸던 이가 있었다. 그는 옻나무에 칼집을 내 상처에 고이는 진액을 채취하였다. 그는 칠장이였고 소중하게 모은 옻액을 걸러 옹배기에 담아두었다. 그런데 장난치며 뛰놀던 누렁이가 옹배기를 엎질러 칠액을 뒤집어썼다. 불같이 화가난 칠장이는 부지깽이로 개를 두들겨 팼다. 졸지에 검둥이가 된 누렁이는 산으로 도망쳤다. 개의 행방이 궁금한 칠장이는 개 발자국을 따라 산에 올랐고 바위 위에 검둥개가 앉아 있었다. 칠장이가 개의 곁에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니 동강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강이 백운산 자락을 휘감아 흐르며 굽이굽이 세워놓은 뼝대가 하늘 아래 절경이었다. 절경을 보며 개는 슬픔을 다스렸고 칠장이는 화를 다스렸다. 이후 칠장이는 개와 함께 이곳에 자주 올랐고 해가 바뀌자 검둥이는 다시 누렁이가 되었다. 칠장이와 누렁이가 나란히 앉아 있곤 했던 자리는 훗날 칠족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산 너머 문화마을로 가는 길도 그들이 처음 찾게 되었다.
-「칠족령」 전문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사라지고야 말 인위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이 채록한 영월 동강가의 설화를 담은 4부의 시 「칠족령」은 언뜻 보기에는 불같이 화를 내는 칠장이와 주인한테 맞고 검둥개가 되어버린 누렁이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의 주인공은 “훗날 칠족령이라 불리”는 자연이다. 이렇듯 최두석의 시는 “자연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호명해 새로운 능동성을 부여”(문학평론가 박혜경)한다. 자연이 보여주는 절경 앞에서 욕망이 뒤섞인 칠장이의 분노는 천천히 사그라들고 그 옆에 있는 누렁이의 슬픔 역시 고요해진다. 자연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개개인의 욕망은 자연의 일부로 자기 안의 헛된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야생의 자연을 노래하기 위해 시인은 숨을 죽이고 발꿈치를 들고 다시 걷는다. 한반도 곳곳을 누비며 시를 써온 시인의 시간은 “주로 야생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을 만나는 데 쓰이”(「시인의 말」)면서 독자들을 인위의 시간에서 벗어나 오롯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으로 초대한다.
수록된 작품 전반에 걸쳐 시인이 잃지 않고 고수하는 것은 고요히 생명이 움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가장 쉬운 단어와 명확한 문장만으로 오롯이 감탄하는 것. 자연의 생동력 앞에서는 그 어떤 사족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고집. 최두석의 시는 40년 동안 그렇게 묵묵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이야기했다. 자유와 혁명을 지나 자연으로 가 닿은 시인의 시는 우리가 다시 걸어야만 하는 오솔길처럼 길을 헤맬 필요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우리의 서정시가 오래도록 지켜온 겸손한 마음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정을 이 시집에서 오롯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최두석

시인최두석은1956년전남담양에서태어나서울대학교국어교육과와같은대학원국문과를졸업했다.1980년『심상』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으며,시집『대꽃』『임진강』『성에꽃』『사람들사이에꽃이필때』『꽃에게길을묻는다』『투구꽃』『숨살이꽃』과시론집『리얼리즘의시정신』『시와리얼리즘』을간행하였다.

목차


1부
따사로운봄날
동강할미꽃
개개비
휘파람새
물매화
동박새
뻐꾹채
꽃꺼끼재를지나며
바람꽃
호리꽃등에
노루귀와빌로오드재니등에
산호랑나비
할머니산수유나무아래에서
산수유나무
금강초롱
천마산에는미치광이가많다
도체비꽃

2부
새를본다
곤줄박이
두루미의잠
뜸부기
황새야,훨훨
먹황새
저어새
각시바위
물수리
백로와숭어
공릉천멧비둘기
알락꼬리마도요
파랑새
검독수리
독수리
검은머리물떼새

3부
새는무릎꿇지않는다
후투티
유부도
마름과흰뺨검둥오리
뿔논병아리
뿔논병아리가족
장다리물떼새
우포늪물꿩
때까치
비둘기조롱이
팔당호큰고니
플라타나스와멧비둘기
장릉원앙
기러기울음소리
임진강재두루미
참수리
꾀꼬리

4부
연령초
요선암에서
웅녀
칠족령
주목의환생
살구
쥐이야기
등칡
마포와여의나루사이
꿀도둑
운교역밤나무
깽깽이풀
설중복
엄천강수달
충주호
산목련이백목련에게

해설
시인과자연이함께쓰는시·박혜경

출판사 서평

창문밖에도절벽위에도
온몸으로피우는시에대한순정

강은흘러야강이고
꽃은피어야꽃이라고말하는듯
동강할미꽃피네

수만년동안
강과산이
밤낮으로만나빚은절경
절벽을수놓는꽃

댐을막아
절경을수장시키려던시절
때맞추어세상에나타나
아름다움의가치를증언한꽃

강은한없이젊고
그리움은늙지않는다고말하는듯
동강할미꽃피네.
―「동강할미꽃」전문

시인이자신의여덟번째시집『두루미의잠』원고를다엮었을때,강원도정선과영월에는예년과다름없이동강할미꽃이피었다.동강의깎아지른듯한절벽에서온몸으로피어나는꽃은우리나라에서만자생하는식물로하늘을향해꽃망울을터뜨리는게특징이다.초봄,그것도열흘남짓꽃피우는동강할미꽃을보기위해매년전국에서사람들이모여드는데매번화제가되는것은꽃의아름다움이아닌,꽃을훼손하는이들이다.바위틈에서자라는꽃이스스로를보호하기위해꼭필요한묵은잎들이죄다바닥에떨어져있었고,그뿐만아니라꽃의영롱한자태를혼자만보기위해아예뿌리째파낸일도있었다.꽃의아름다움을보기위해절벽에오른자가그마음을꺾고짓밟는것을두고시인은“사람에게함부로대하는이가/꽃도함부로꺾는다”(「꽃꺼끼재를지나며」)며꽃의안위를걱정했다.한겨울새벽버스안에서누군가의한숨으로피어난성에를처음으로꽃이라명명한시인은이번시집에서역시꽃의이름을꼼꼼하게곱씹는다.꽃이필때면“부러새삼스럽게/더즐거운일찾지않”고“더긴한일만들지않”(「따사로운봄날」)는다는시인은“떨군꽃잎이/쓰레기가되어발길에밝히는게싫”은나머지산속에사는화자가되어“사람들의번거로운눈길에서벗어나”(「산목련이백목련에게」)그윽하고깊이걷기만을원한다.시적상상력과비유를삼간채자연의생태만을포착하는시인의시선에는인간의마음이아닌꽃의마음을들여다보려는순정만이남아고개를숙인채절벽에서하늘을바라보는꽃의흔적을선연히기억하고있을것이다.

자신이살아보지못한
시간을헤아리다자연의일부가되는시인

영월동강가제장마을에옻나무를심어가꾸던이가있었다.그는옻나무에칼집을내상처에고이는진액을채취하였다.그는칠장이였고소중하게모은옻액을걸러옹배기에담아두었다.그런데장난치며뛰놀던누렁이가옹배기를엎질러칠액을뒤집어썼다.불같이화가난칠장이는부지깽이로개를두들겨팼다.졸지에검둥이가된누렁이는산으로도망쳤다.개의행방이궁금한칠장이는개발자국을따라산에올랐고바위위에검둥개가앉아있었다.칠장이가개의곁에다가가주위를둘러보니동강의비경이한눈에들어왔다.동강이백운산자락을휘감아흐르며굽이굽이세워놓은뼝대가하늘아래절경이었다.절경을보며개는슬픔을다스렸고칠장이는화를다스렸다.이후칠장이는개와함께이곳에자주올랐고해가바뀌자검둥이는다시누렁이가되었다.칠장이와누렁이가나란히앉아있곤했던자리는훗날칠족령이라부르게되었고산너머문화마을로가는길도그들이처음찾게되었다.
―「칠족령」전문

자연앞에서한낱인간의욕망은반드시사라지고야말인위의시간에지나지않는다.시인이채록한영월동강가의설화를담은4부의시「칠족령」은언뜻보기에는불같이화를내는칠장이와주인한테맞고검둥개가되어버린누렁이의이야기인것처럼보이지만이시의주인공은“훗날칠족령이라불리”는자연이다.이렇듯최두석의시는“자연을이야기의주인공으로호명해새로운능동성을부여”(문학평론가박혜경)한다.자연이보여주는절경앞에서욕망이뒤섞인칠장이의분노는천천히사그라들고그옆에있는누렁이의슬픔역시고요해진다.자연과의긴밀한연결속에서개개인의욕망은자연의일부로자기안의헛된욕심을내려놓았을때우리는비로소충만함을느끼게된다.여전히훼손되지않은야생의자연을노래하기위해시인은숨을죽이고발꿈치를들고다시걷는다.한반도곳곳을누비며시를써온시인의시간은“주로야생으로살아가는생명들을만나는데쓰이”(「시인의말」)면서독자들을인위의시간에서벗어나오롯이스스로그러한자연自然으로초대한다.

수록된작품전반에걸쳐시인이잃지않고고수하는것은고요히생명이움트는소리에귀를기울이는겸손한태도라할수있다.가장쉬운단어와명확한문장만으로오롯이감탄하는것.자연의생동력앞에서는그어떤사족도필요하지않는다는고집.최두석의시는40년동안그렇게묵묵히이시대에가장필요한것을이야기했다.자유와혁명을지나자연으로가닿은시인의시는우리가다시걸어야만하는오솔길처럼길을헤맬필요없이고요하기만하다.우리의서정시가오래도록지켜온겸손한마음과아름다운것을아름답다고말하는순정을이시집에서오롯이확인할수있을것이다.

시인의말

요즘나의시간은주로야생으로살아가는생명들을
만나는데쓰이고있다.꽃피우고열매맺는나무나
풀뿐만아니라그걸먹고살아가는새나곤충의생생한
모습을보며활기를얻는다.그들의숨결과맥박이시의
호흡속으로나도몰래스며들기를기원한다.

2023년6월
최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