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없이일렁이다지워지고비워지는
어슴푸레한둘레의시간
임종무렵의어머니는
지워지는둘레에골똘한가보았다
눈가묽어지는저물무렵
넋놓고잠겨드는바다처럼
반짝이는석양을켜들곤했으니
회상으로떠올리면
첫눈맞는갈참나무숲이
한참이나산자락을잡아두는까닭을
알것도같았다,땅거미
물고오는오늘의어스름속
희끗희끗섞이는눈발,
눈감아선연한회상이라해도
이내깜깜해질저런풍경을
어머니는도대체어디로담아가려하셨을까?
―「넋놓고잠겨드는바다처럼」전문
김명인의시에서수없이등장하는“둘레”는사전적의미에서유추할수있듯삶의흔적이담긴근방의물리적터전을가리키는동시에의식의바탕에그어진저지선이다.“임종무렵의어머니는/지워지는둘레에골똘하고”(「넋놓고잠겨드는바다처럼」),“배석을허락받아야가담하는둘레”(「저녁의둘레」)와“가라앉을듯가라앉은듯어둑한둘레”(「유령거미의시간)이있으며,“누군가의구름은둘레가가려지길기다”(「달의이행」)린다.「짙푸른슬픔이사는곳」에서“뭘풀칠하는줄도모르는/이웃과친족의둘레”는없는살림에작은도움이아쉬운모자母子로하여금외가댁으로향하는외출을끌어내지만길에서그들을맞이하는것은“일시에가시로곤두”서깊고날카로운슬픔인접시꽃군락이다.
화자는둘레를따라과거를회상하며장면을구체적으로시각화하고현재의질문을무심히던져넣는다.마치수묵화에서,종이에한점의먹을떨어뜨려번지게하는발묵潑墨기법을연상케한다.이러한독특한시적태도는세월의축적을고스란히전하면서경험을뛰어넘는예측불가능한형상을시바깥의독자로하여금화자와동시적으로관찰하게만든다.“이건비유를머금는것이지만형상을잃기까지/사물들은얼마나오래인내하는것일까?”라는질문앞에서“시간은둘러선구경꾼”같고인간의생은스스로일군역사를돌파하며“용도를다한”(「목관」)다.감히누구도헤아릴수없는신비를간직한채.
기다리는사람아,무릇진앙은
쓸개로치면몸이간직하는것,
미답의모서리에떨어진
운석이식으려면아직멀었다
우리는가혹한한때를지나가야하니
견디리라,맹하의뱀들이울어
캄캄한어둠속으로손디밀면
손등가득
독니로새긴핏발들이묻어난다
―「혹서기」부분
현실에서맞닥뜨린나와다른존재그리고측량할수없는에너지로팽창하는풍경들을일정한거리를갖고술회하는김명인의시는강인한어조를유지하면서도시시각각정신의물꼬를트는언어적실험을이어나가며예상밖의시공간으로독자를이끈다.회상을통한감각이단순한회한이나쓸쓸한정조에머물지않고현재시점에서여전히유효한물음으로이어지는것은오랜고투와담금질에도식을줄모르는의지가시의저변에짙게깔려있기때문일것이다.시인은“믿음안에서,믿음밖으로”흐르는생의참혹으로읽히는“혹독한여름”을견디며,신체에새겨진“핏발들”(「혹서기」)을세워“천만리저쪽까지생생한”“기억에도없는혈흔”(「구름척후」)을이곳에서쓴다.
고래같은생의지느러미를잡고
수평선을그리는구도자의기록
말을조직하고완결하는시의힘,그것은완성을지향하지만결코완성으로이끌리지못한다.그불완전함탓에질서를새롭게마련하려는수많은고투가나름대로의미를지닌다.시의끈질긴내력은실패로이어져오래인것이다.―뒤표지시인의산문에서
혼혈아,미군,양공주가일상의이웃으로거리를메운동두천에서교사로재직하다베트남전쟁에참전하기까지,고통으로얼룩진시절의한자락을그린첫시집『동두천東豆川』(1979)의「동두천東豆川」과「영동행각嶺東行脚」연작은한곳에정착하지못하는이방인의상처,바닷사람들의고단한속살을생생하게보여준바있다.거대한힘으로밀려드는운명의파도앞에서속수무책으로이곳저곳흘러간유랑자로서시인의정체성은일찍이그모습을드러냈다.
고향에자리잡은‘바다’는시인의오랜주제이자시적자아의원천이다.화자가생래적인결핍으로먼곳으로의도피를꿈꿀때,눈앞의바다는매시편에서생명이펄떡거리는자연그자체이면서존재의탄생과소멸을건드리는영혼의물결로작용해왔다.“파도는일생일대를제자리에돌려놓잖아!”(「봤어?」)의일갈이나“난파란물의습성이소리로바뀌는것,/때로는일대가뒤집히기도하니/소용돌이를잠재운바다에겐/넓이만아득한게아니”(「난파란물의습성이소리로바뀌는것」)라는대목에서보듯삶의은유로서바다는불가항력적인운명을함부로거스르려는인간의투쟁을한없이작은것으로,파편적인것으로,낮은자리에내려놓는다.화자는“같잖은주장이나웅얼거리는/고집이라면누구에게라도환멸이하인것,”을알고있으며복잡다단한세파를비집고끊임없이‘나’를갱신하며“닿고보니지척인곳을/멀리도돌아서나는왔다”(「모과혹은모란」)고말한다.잊거나애써회피한존재의실체를담대하게마주한끝에불완전하고가변적인생의속성을이해했으되균형감각을유지하려는이기나긴여정은먹먹한울림을준다.시집의해설을맡은오형엽의말처럼“‘풍경을주시하는시선이신체적이행으로전이됨’이기법적층위에서김명인시의미학적특이성을형성한다면,‘존재론적질문과해석’이주제적층위에서김명인시의미학적특이성을형성하는것이다”.시인은소용돌이치는생에휩쓸린얼굴없는영혼에존재의자발적인증거로서표정을부여한다.
시대의풍경을껴안고무수한물음으로
고쳐쓰는일생일대의순간
이낭송은세월로가거나
미궁으로가라앉겠지만
지워지기만하는복사를
마침내접어야할저녁이온다
늦게도착한짐짝일수록귀중한것들로꾸려진다
다정한마음으로네환심을사서
노을앞에활짝펴고싶다
발설할수있을까,지나가므로환각인
저녁의둘레를!
―「저녁의둘레」부분
김명인의시는여전한뜨거움으로,칼날같은의지로현상의일단을싹둑갈라질문한다.그의시에서대상은바라봄의대상이아니라수시로비집고들어갈수있는신체이며,쓸쓸한적막을가로지르는움직임으로다가온다.“하오의적막속으로어떻게스며들었냐고?/햇살만큼벌어진틈새가있을까,/묻는것이필생인/설된시말고무슨파장을덧입힐까”(「느리게가는시」).그의시는자연법칙의위대함속에서초월적자유를획득한다.오랜인내의결과로,시대와개인의역사에서비롯된상처의산발적인통증을문학적진동으로승화해세계의비밀을읽어나간다.거스를수없는힘에떠밀려간신히몸을일으켜세우는수많은존재를향한애틋함과너그러움은그의시속에드넓게펼쳐져있다.『파문』(2005)에실렸던「찰옥수수」는「옥수수시간」으로이어져시집의마지막을장식한다.평해장터의노파와처녀애들사이에놓여있던옥수수는시간의굴레에서결코벗어날수없는인간사의쇠락을떠올리게하면서,궁극적으로는“너른귀를열어경청의들판을듣는”,“무엇하나버릴수없는알알”(「옥수수시간」)으로가치를지닌‘성숙의시간’을가리키며내면의겸허함을일깨운다.
거듭나는결단으로,그치지않는질문으로진리와호흡하며고통의이면에서서서히아름다움을키워나간김명인의시세계는한국시단에아로새겨진커다란족적이다.살아있는한,허무에잠식당하지않기위해“한순간도달의몰락을상상하지않았으므로”“누리의달도저무는달도/지상의표징으로만읽어낼뿐”(「달의이행)이라말하는시인의목소리에오늘날귀기울일수밖에없는이유다.
시인의말
지금은경작의애락哀樂을내려놓아야할때!
비가오지않는다고탄식하던농사의시절은지났다.
2023년여름
김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