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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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새롭게 출범하는 〈문지 에크리〉의 디자인은 한 편의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앞표지 전면에 배치된 흑백사진은 영화의 스틸 컷을 보는 듯하다. 앞뒤로 이어지는 실선 또한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며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흑백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관객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표정과 행동을 크고 분명하게 하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 역시 저자의 사유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한다.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연필을 곱게 깎아 꾹꾹 눌러 쓰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는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접해왔던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독자들 앞에 첫선을 보인다.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는 문학평론가 김현과 이광호 시인 김혜순, 김소연, 신해욱 그리고 소설가 백민석까지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저자

하재연

2002년제1회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라디오데이즈』『세계의모든해변처럼』『우주적인안녕』,시론집『무한한역설의사랑』『문학의상상과시의실천』이있다.

목차

프롤로그:어두워진빛들에대한애도

1부점과점을잇는선분의존재방식
푸른머리칼
드봉샴푸병
코다
사랑의지속
人+形
화이트홀
점과점을잇는선분의존재방식:스피릿과오퍼튜니티에관한몇가지항목들

2부아직아무도아닌우리의이름
목화씨앗이름
사랑의권리
옥희의언어
하복夏服을입은맨발
내가상상한문학은아니었으나
이산하는영혼의시

3부세상에나오지않은악기를가진아이와손쥐고
어리석은사랑의기술
크리스와레아
헛됨의놀이터
일요일의현상학
아직여름은끝나지않았으니
여름,판타지
허파꽈리같은친구들에게

본문에등장하는시와텍스트들

출판사 서평

“함께올수없었던빛나는것들에관해,
용서를구하는마음으로”

어두워진빛들에대한애도,시인하재연의첫산문집!

휘발하는감각의흔적을좇아세계의해변을걸어가는시인하재연의첫산문집『내게와어두워진빛들에게』가문학과지성사에서출간되었다.존재의시작과현재를잇는흐름을섬세하게더듬어나가며수많은‘나’를마주한시인의표정은겹겹의슬픔을간직한채,따스하다.희디흰눈이흩날리는숲의입구에서만난고양이.처음발견한행성의표면같은눈으로여전히저만의세상을둘러보지만,내게와좁은삶의테두리를공유하게된존재에관한이야기들.프롤로그에서시인은“내게왔으므로함께올수없었던빛나는것들에관해”“야생이라는아름다움에대해,그것들에용서를바라는마음”이라고썼다.안타깝고씁쓸한찰나의마음이모여작은존재의시간을되짚어나간다.유년의기억과맞물리는새로운생명의탄생과성장,“‘여성’+‘작가’로서+글을‘쓴다’”(「목화씨앗이름」)는명백한정체성이불편한‘무엇’으로호도되는현실에서,“매일같이패배하며일구어낸자그마한승리들”(「사랑의권리」)그리고사회로부터부정당하고배반당한도처의목소리를조심스레꾹꾹눌러담아전하는문학의증언.영화,미술,음악과어우러진담대하고도명징한시인의예술론이한권의산문집에고스란히담겼다.낯선존재와의마주침으로,쌓아올린언어를흩트리고갱신하며,“대부분무의미한절망쪽에가깝”지만“쓰는사람이나라는점에있어서는,쓰고있는순간만이”(「화이트홀」)존재와세계를연결하는시인의시간이천천히흘러간다.

“당신을만나지않았다면,당신을사랑했다면,당신을사랑하지않았다면,당신을만났다면,나라는삶은지금과조금달라져있을까요?”[……]시쓰기는정처없는무심함을끝까지밀고나가는과정입니다.끝이란정해지지않은끝이므로도착할수없는끝입니다.우연과필연들의힘센장력속에서비틀거리면서용케공기의흐름을타는날갯짓같은것이라한없이자유로워보이는순간금세기우뚱위태로워지는것입니다.(「일요일의현상학」에서)

책의1부에서시인은존재의기원을따라가면서자아가성장하는과정을면밀하게추적한다.나의내부에서,외부에서꿈틀거리는욕망과맞물려확장되는우주는때로통증을유발하고아득한동공空洞을만들지만그럼에도존재가맞닥뜨릴수밖에없는시간의배경이다.그드넓은시공간에들어서위태로움을감수하고균형잡기를시도하는시인의언어가탄생했음을엿볼수있다.2부에서는무의식의저변에서끊임없는반동을일으키며존재의자유를구속하는속삭임,그중심에자리잡아오랜시간부당했기에결코잊어서는안될삶의장면들을다룬다.식물을키우면서,아이를보살피면서,실재하는삶을통해목격하게되는참상과동행하는언어의궤적을더듬어보면서,문학의증언을이어나가려는시인의목소리를들을수있다.3부에서는시를넘어서서다양한장르와의혼합을통해예술의또다른통로를발견한순수한즐거움과사고의전환이자유롭게전개되면서씌어진오감을아우르는시인의산문들을만날수있다.시인의소설(「크리스와레아」)이나화가임동승,그림책작가이수지의작품과함께한우리를둘러싼세계의‘형상’과의낯설고도뜨거운조우(「헛됨의놀이터」「아직여름은끝나지않았으니」)는다채로운재미를준다.

순간의엇갈림과공존을예감하며
당신에게건네는안부인사

『라디오데이즈』(2006)『세계의모든해변처럼』(2012)『우주적인안녕』(2019)등을통해열리고닫히는세계의한귀퉁이에서흘러내리는소음과뒤죽박죽엉켜소란해진풍경을우주적인시선으로확장해온하재연의시편들역시이번책곳곳에서다시만날수있다.띄엄띄엄산문속에배치된시들은우리를스쳐간순간의배음背音처럼,시간이흐른후짙어지는인상처럼고요한폭풍을일으키며마음을사로잡는다.2020년제3회구상문학상을수상하며“사라짐과어긋나는시간에대한감각을예민하게열어가며우주적으로확장해,인간을성찰하는개성적인시선을보여준다.이땅에서의수많은죽음을경험하고나아간자리라고할수있는우주적상상력과우주적시선이인간존재에대한새로운감각과성찰의시선을열어주고있다”(심사위원최정례·조재룡·이경수)는평을받았던시인은일상에잔재한폭력너머존재의고독을위로하는연대의끈을시로써모색하며꾸준한언어실험을이어왔다.
“만지면사라질것처럼멀지만,발견하지않으면아무것도아닌,말하고자할수록달아나서,입을여는순간그말에소외되어우주처럼고독해지는단어”(「사랑의권리」)로서형언하기어려운장소이자시간인‘사랑’으로하재연은나아간다.시간의틈을벌리며어둠에묻힌발자국을따라밟으며,사랑의움직임으로결코끝나지않을끝을향해그는쓴다.타인을통과한무수한‘나’를만나고다시세계인우리로돌아와시인이발견한것은,그럼에도어둠을견디는‘빛’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