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진하는 밤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촉진하는 밤 -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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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하지 않기”

깊고 두텁게 덧칠된 밤의 풍경과 사유를 지나,
끝나지 않는 끝이 계속되면서 끝을 향해 가는 시
시인 김소연의 여섯번째 시집 『촉진하는 밤』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89번째로 출간되었다. 전작 『i에게』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자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데뷔 30주년에 나오는 시집이라 특별함을 더한다. 전작에서 극에 달한 내면 풍경을 첨예하게 보여준 소문자 i가 또 한번 등장하는 이번 시집은 이 극단이 끝이 아님을, 이 내면의 풍경이 끝나지 않는 도정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핵심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 ‘밤’이다.

이번 시집에서 밤은 하나의 극점을 넘어, 일종의 경계선이 되는 것도 넘어, 어떤 거대한 지대를 향해 가는 끝의 의미를 품는다. 말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어떤 지대를 통과하면서 만날 수 있는 밤은 당연하게도 낮의 거짓말을 지우는 역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과 말이 돌아다니고 서성이는 광경으로 우리에게 온다. _김언, 해설 「끝에서 끝을 내다보는 밤」에서
저자

김소연

시인.수없이반복해서지겹기도했던일들을새로운일들만큼사랑할수있게되었다.숨쉬기.밥먹기.일하기.또일하기.낙담하기.믿기.한번더믿기.울기.울다가웃기.잠들기.이런것들을이제야사랑하게되었다.시가너무작아진것은아닐까자주갸우뚱하며지냈고,시가작아진것이아니라우리가커다래졌다는사실을알아가는중이다.

시집『극에달하다』『빛들의피곤이밤을끌어당긴다』...

목차

시인의말

1부
흩어져있던사람들
며칠후
들어오세요
촉진하는밤
이느린물
접시에누운사람
그렇습니다
2층관객라운지
우리의활동
분멸
누가
에필로그
월몰
가장자리
동굴
처음시작하는호신술
문워크
필로티주차장
내가존경했던이들의생몰기록을들추어본다
영원
건강미넘치는얼굴
얼굴이라도보고와야겠어
해단식
칠월
푸른얼음
토마토소바

2부
천사의날개도가까이에서보면우악스러운뼈가강인하게골격을만들고
더잘지운날
꽃을두고오기
올가미
2층관객라운지같은일인칭시점
공연
식량을거래하기에앞서
머리말
내리는비숨겨주기
저작
외출이란무엇인가
우연히나는아름다움의섬광을보았다
남은물
비좁은밤
소모임
점심을먹자
디버깅
백만분의1그램
다녀온후
립맨
내가시인이라면
무한학습

해설
끝에서끝을내다보는밤·김언

출판사 서평

i없는시쓰기

i에대해서시를쓸때마다
그나마음악도들었고약도챙겨먹었는데
오늘은i가왔는데
나는태어날수있었는데

i를위해이불과베개를꺼냈다
자고가라고말했다

i는우편함에서자겠다고
그곳에서같이자자고했다
나는그렇게하겠다고대답했다

이미i는잠들었고
나는i몰래i없는시를쓰러갔다
―「머리말」부분

안으로숨어드는,내면깊은곳에자리한자아인소문자i는시인의전작(『i에게』)에서이미보아익숙한존재다.잊을만하면찾아오는i의방문으로시작되는위의시에서작고보잘것없는존재로서의자아를다시한번떠올리게된다.동시에i의방문으로시적자아가태어나고그로인해김소연의시가탄생했음을알수있다.그런데시인은이번엔“i몰래i없는시를쓰러갔다”.이제는i가없어도시쓰기가가능한것일까.그시는어떤모습일까.
앞서다섯권의시집에서탁월한감각으로극에달한내면의풍경을담아내었던시인은이번시집에서한발더나아가i마저모르는,더욱깊어진어둠으로독자들을이끈다.그리고그곳에서이극단이끝이아님을,이내면의풍경이끝나지않는도정속에놓여있음을한없이끝으로치닫는밤을통해보여준다.

일괄소등버튼을누르면모든것이검정속으로사라질것같은밤모서리로밀려나는밤가속이붙는밤귀한것들을벼랑끝에세워둔것처럼기묘하고능청스러운밤벨벳같은부드러움을한껏가장하는밤단한순간도고요가없는지독히도와글대는밤무성해지는밤범람해지는밤꿈이얼씬도하지못하도록눈을부릅뜨고누워있기푸른얼음처럼지면서버티기열의를다해잘버티기어둠의엄호를굳게믿기온갖주의사항들이범람하는밤에게굴하지않기
―「푸른얼음」부분

밤에대한깊은사유가두텁게덧칠되어펼쳐지는이시에서,그러나“온갖주의사항들이범람하는밤에게굴하지않”는다는모종의의지는여기가결코끝이아니라는것을다시상기시킨다.이번시집의해설을쓴김언시인은“끝났다고생각하는지점에서도다시생겨나는끝이여력을만들고의지를만들고또믿음을만든다.이믿음을받아주는곳에다시‘밤’이있다.‘푸른얼음’처럼모종의권능을지닌밤이마지막으로기다리고있다”라고이번시집에나타나는‘밤’에대해설파한다.“하나의극점을넘어,일종의경계선이되는것도넘어,어떤거대한지대를향해가는끝의의미를품”은것이이번시집에서말하는밤이라는것이다.

“끝이보이는맑은날”(『극에달하다』)에시작된시인의여정은30년을지나“촉진하는밤”에이르렀으나아직끝이아니다.이렇게우리는김소연시인과그림자를끌고,“차분하고투명하며열렬”(『눈물이라는뼈』,‘시인의말’)한눈물을따라,아침을맞고,밤으로향하면서극에달해갈수있게되었다.밤에굴하지않고우정을나눌수있게되었다.기다림에값하는소중한결실이다.

시인의말

우리는너무떨어져살아서만날때마다방을잡았다.
그방에서함께음식을만들어먹었고파티를했다.
자정을훌쩍넘기면한사람씩일어나집으로돌아갔지만,
누군가는체크아웃시간까지혼자남아있었다.
가장먼곳에사는사람이었다.
건물바깥으로나오면
그방창문을나는한번쯤올려다보았다.

2023년9월
김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