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물질적인 밤 - 문지 에크리

영혼의 물질적인 밤 - 문지 에크리

$15.00
Description
새롭게 출범하는 에크리의 디자인은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앞표지 전면에 배치된 흑백 사진은 영화의 스틸컷을 보는 듯하다. 앞뒤로 이어지는 실선 또한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며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흑백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관객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표정과 행동을 크고 분명하게 하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 역시 저자의 사유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한다.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연필을 곱게 깎아 꾹꾹 눌러 쓰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는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접해왔던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독자들 앞에 첫선을 보인다.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는 문학평론가 김현과 이광호 시인 김혜순, 김소연, 신해욱 그리고 소설가 백민석까지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저자

이장욱

시와소설을쓰고있다.시집『내잠속의모래산』『정오의희망곡』『생년월일』『영원이아니라서가능한』『동물입니다무엇일까요』,장편소설『칼로의유쾌한악마들』『천국보다낯선』『캐럴』,소설집『고백의제왕』『기린이아닌모든것』『에이프릴마치의사랑』『트로츠키와야생란』,평론집『나의우울한모던보이』『혁명과모더니즘:러시아의시와미학』등이있다.

목차

1.그해겨울,일기
1-1.자작나무,일기
1-2.백야,일기

2.에크리,또는메모들
2-1.산세리프에서소설쓰기
2-2.그러나그럼에도불구하고그렇게시쓰기
2-3.아름다움,사유,침묵
2-4.삶,자유,정치

3.에크리,또는장소들
3-1.동물원
3-2.문학의집
3-3.금각사

4.다시겨울,일기

작가후기

출판사 서평

시인,소설가,비평가그리고여행자
당신의하루오,우리의이장욱

“나는이곳에와서한편의시도한편의소설도쓰지못했다.문장들은내게로오지않았다.아마도나는그것을미리알고있었을것이다.나에게여행은시가되지않고서사가되지않았다.여행이란언제나지나가는자의것이며,지나가는자가볼수있는것은지나가는자가보고싶은것뿐이다.”
―「2007.7.6.」에서

시와소설을쓰고있는사람,작가는자기자신을이렇게소개한다.이장욱에게글쓰기란과거의행위나미래의결과가아닌언제나‘현재진행형’이다.독자들에게이름이각인된이후늘쓰는사람으로서존재해왔던그가아무것도쓰지못하는때는언제일까.시인도소설가도아닌,하루하루끼니를해결하는일에만궁리하면되는그순간은바로낯선곳에서여행자임을자청하던때가아닐까.그해겨울,기숙사룸메이트안드레이와상트페테르부르크를떠나중부러시아의추바시로떠났던기차안에서의풍경은그로부터10년후2004년의일기로남았고,다시겨울,글을쓰기위해떠난부다페스트에서본야경은2023년의일기가되었다.단지겨울과겨울을건너왔을뿐인데순식간에지나버린30여년의시간이어리둥절하게느껴진다는그는한권의책을마친다는것이“하나의죽음”을겪는일과도같다며지난시간을소회한다.
이장욱의글을흠모했던이들이라면현실과환상을횡단하다다다르는작가만의서정의세계를한번쯤경험해봤을것이다.혹자는그의언어적확장과시적상상력에매료되었을것이고또다른이는그의소설속인물들이털어놓는이야기에숨을죽였을것이다.단정하고날렵한문장과그이면의밀도있는이야기로사랑받는작가,이장욱은자신의글속에서물음표를달지않은채로끊임없이우리가사는세계에서의삶과죽음에대해궁구한다.불현듯나타나자신의이야기를자분자분털어놓았던‘곽’(「고백의제왕」,『고백의제왕』,창비,2010)처럼이장욱식‘고백’은우리의일상이사소한비밀들로가득하다는사실을다시한번환기한다.마치과거의기억을천천히되짚는듯한이장욱의겨울일기는과거와현재라는시차를단숨에뛰어넘어독자를19세기식창문앞으로데려다놓기도하고,혹한의추위에도얼지않았던1990년대후반의러시아로이동시키기도한다.종일개처럼걸어다니는것만이자신이멈춰선도시에대한예의라고말하는이장욱은글쓰기라는커다란바퀴를홀로굴리면서도야간열차안에서잠이든승객들을깨우지않을것이다.늘그랬듯이사뿐히다가와비밀을비밀이아닌것처럼자신이겪은19세기를,1990년대의러시아를,2023년의부다페스트를보여줄뿐이다.

“소설을쓰는일자체보다는,아직소설이아닌무엇을떠올리는일을나는더좋아하는것같다.가령하루오라는인물에대해쓰는시간이아니라,하루오라는사람이머릿속에서문득눈을뜨는순간을.눈을뜬하루오가미소를짓거나걸어다니는순간을.그러다가문득사라져버려서나를외롭게만드는,그런순간을.”
―「아직소설이아닌무엇」에서

자신이아는것을반만보여줌으로써세상의단면을보여주는사람.이장욱의글은다분히비밀스러우면서도숨김이없고,끊임없이말을걸어오면서도수다스럽지않고단순명료하다.마치오랜친구처럼,동료처럼내내맴을돌다가소리없이사라진「절반이상의하루오」(『기린이아닌모든것』,문학과지성사,2015)속하루오처럼천천히스며든다.이번산문집『영혼의물질적인밤』은러시아횡단열차를타고유년의창경원을지나문학의집에다다르기까지발이닿는대로쉼없이걷기만한다.오로지‘쓰다’라는행위에집중할뿐이기에하나의주제에천착하거나기승전결을따르지도않는다.1장은러시아의겨울을배경으로2004년과2007년에씌어진것들로소비에트몰락직후를추억하고있다.2장은2005년과2015년사이에씌어진메모들로시와소설,철학과자유에대한파편적인단상을모았다.3장에는‘동물원’‘문학의집’‘금각사’를주제로긴글들이담겨있다.그리고4장은다시지금의시점으로돌아와부다페스트의풍경을담고있다.여기에는하얀눈밭에맨몸으로뛰어드는시인도있고,동물의아가리에서떨어지는침방울을쳐다보는소설가도있고,초콜릿박물관에서레닌을만나는비평가도있고,종일개처럼걸어다니다가중국식당에서반주를즐기는여행가도있다.시인,소설가,비평가,여행가그모든이장욱의절반을볼수있는책은축축한몸으로건조한바람을느끼고싶은이를어디로든데려다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