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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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빛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언제나 서 있기만 했던 시였지”
가장 낮은 언어로 가장 먼 곳에 가닿는 언어
시인의 자취를 따라 걷는 가만한 발자국

젊은 시인들이 고른 83편의 시 전문
함께 읽는 기쁨을 더하는 56인의 ‘추천의 말’ 수록
시인은 지금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남아 그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나는 반짝이는 그의 조각-시-들을 품고 이 세계를 살아가고 싶다. _윤지양(시인)

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인아, 하고 부를 때면 세상의 온갖 약한 존재가 한꺼번에 뒤돌아볼 것만 같다. 그 쓸쓸하지만 고고한 음성은 언제까지나 허수경의 것이다. _임유영(시인)

올 10월 3일, 허수경 시인 5주기에 맞춰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다. 56명의 젊은 시인이 직접 고른 83편의 시 전문과 그에 대한 ‘추천의 말’을 함께 엮었다. 허수경은 1987년 시단에 등장해 그 이듬해 첫 시집을 출간했다. 시인이란 늘 한 발짝 멀리 가는 사람일까. 스물셋이란 어린 나이답지 않게 무르익은 언어 감각으로 문단과 독자의 사랑을 두루 받아온 시인은 2018년 위암으로 투병하던 중 쉰넷의 나이에 다소 이른 생을 마감했다. 우리 곁에는 그가 꼬박 31년의 시력 동안 쓰고 펴낸 여섯 권의 시집이 남았다. 그중 스물여섯 해는 머나먼 이국 독일에서 고향의 언어를 되새기며 쓴 시간이었다.
이번 시선집에는 시인의 대표작은 물론, 관능적인 여성성과 이방인으로서 고독, 소박한 일상을 다루는 시까지 고루 실렸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데뷔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56명의 시인이 출간에 함께했다는 점이 그 의의를 더한다. 그의 동료이자 친구, 후배 들이 오늘의 언어로 호명한 시들은 우리가 여전히 허수경을 읽는 이유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어쩐지 쓸쓸해지고, 그러나 쓸쓸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먼 곳이 있다고 믿게 된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만날 당신을 그리며 이 시선집을 건넨다.

저자

허수경

저자:허수경
1964년경남진주에서태어나경상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했다.1987년『실천문학』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슬픔만한거름이어디있으랴』『혼자가는먼집』『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청동의시간감자의시간』『빌어먹을,차가운심장』『누구도기억하지않는역에서』,산문집『그대는할말을어디에두고왔는가』『나는발굴지에있었다』『너없이걸었다』,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잘가』『박하』,동화책『가로미와늘메이야기』『마루호리의비밀』,번역서『슬픈란돌린』『끝없는이야기』『사랑하기위한일곱번의시도』『그림형제동화집』『파울첼란전집』등이있다.동서문학상,전숙희문학상,이육사시문학상을받았다.2018년10월3일뮌스터에서생을마감했다.유고집『가기전에쓰는글들』『오늘의착각』『사랑을나는너에게서배웠는데』가출간됐다.

목차

슬픔만한거름이어디있으랴
한식/폐병쟁이내사내/원폭수첩2/남강시편1/남강시편3/달빛/유배일기/땡볕/별노래/새/할리우드/이상하다왜이리조용하지

혼자가는먼집
공터의사랑/불우한악기/마치꿈꾸는것처럼/혼자가는먼집/사랑의불선/쉬고있는사람/먹고싶다……/표정1/한그루와자전거/저마을에익는눈/시/유리걸식/백수광부

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
어느날눈송이까지박힌사진/머리에흰꽃을단여자아이들은/구름은우연히멈추고/그러나어느날날아가는나무도/내마을저자에는주단집,포목집,바느질집이있고/베를린에서전태일을보았다/두렵지않다,그러나말하자면두렵다/바다가/동천으로/모르고모르고/이지상에는/비행기는추락하고/폭발하니토끼야!/어느눈덮인마을에추운아이하나가

청동의시간감자의시간
대구저녁국/그때달은/해는우리를향하여/새벽발굴/연등빛웃음/그해사라진여자들이있다/빛속에서이룰수없는일은얼마나많았던가/시간언덕/나무흔들리는소리/마늘파씨앗/물지게/여름내내

빌어먹을,차가운심장
거짓말의기록/수수께끼/글로벌블루스2009/비행장을떠나면서/찬물새,오랫동안잊혀졌던순간이하늘에서툭떨어지는것을본양/열린전철문으로들어간너는누구인가/카라쿨양의에세이/울음으로가득찬그림자였어요,다리를절던까마귀가풍장되던검은거울이었어요(혹은잠을위한속삭임)/사막에그린얼굴2008/눈동자/여기는그림자속/삶이죽음에게사랑을고백하던그때처럼/추억의공동묘지아래/문장의방문/사탕을든아이야

누구도기억하지않는역에서
농담한송이/그그림속에서/이가을의무늬/이국의호텔/포도나무를태우며/병풍/딸기/포도/자두/오렌지/호두/목련/죽음의관광객/내손을잡아줄래요?/우산을만지작거리며/우리브레멘으로가는거야/가짓빛추억,고아

함께한시인들
허수경許秀卿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부르는소리로저리도청랑하게흐를수있는세상은두렵습니다아름다워진것이겁나고오밀조밀하게색칠한것이화장독오른계집아침분세수세모시옷깃새로페니실린냄새가납니다
물결같이이를악물고바스라지기도하지만아래에서면빛나고싶어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칼금그으며지나는바람이나뭇잎수척한얼굴에계절굽이지는길을만들고그길위에내려앉아우수수몸을떨지만거미줄은은빛으로빛나도나비는거미에게먹히고불러세워뒤돌아보아도나는
몇광년후에야보는별빛으로먼데요
---「달빛」중에서

감꽃이질무렵봄비는적막처럼내렸다

감꽃천지
군화발자욱이그위를덮친다

집집마다아픈아이들
가위눌린잠속으로감꽃은
폭풍처럼휩쓸고다닌다

어린살속에시린날을세우고
발진처럼불거져내리는감꽃

대문두드리는소리
비명소리
미친듯떨어지는감꽃꼭지
그위에적막처럼봄비가내린다

날이밝으면
왜이리조용하지이상하다
아버지는쓴입속으로물을넘긴다

먼둔덕애장터
오지사금파리가아리게반짝이고
어른들은화전을부친다
오미자물을우려낸다

이상하다,왜이리조용하지.
---「이상하다왜이리조용하지」중에서

한참동안그대로있었다
썩었는가사랑아

사랑은나를버리고그대에게로간다
사랑은그대를버리고세월로간다

잊혀진상처의늙은자리는환하다
환하고아프다

환하고아픈자리로가리라
앓는꿈이다시세월을얻을때

공터에뜬무지개가
세월속에다시아플때

몸얻지못한마음의입술이
어느풀잎자리를더듬으며
말얻지못한꿈을더듬으리라
---「공터의사랑」중에서

당신……,당신이라는말참좋지요,그래서불러봅니다킥킥거리며한때적요로움의울음이있었던때,한슬픔이문을닫으면또한슬픔이문을여는것을이만큼살아옴의상처에기대,나킥킥……,당신을부릅니다단풍의손바닥,은행의두갈래그리고합침저개망초의시름,밟힌풀의흙으로돌아감당신……,킥킥거리며세월에대해혹은사랑과상처,상처의몸이나에게기대와저를부빌때당신……,그대라는자연의달과별……,킥킥거리며당신이라고……,금방울것같은사내의아름다움그아름다움에기대마음의무덤에나벌초하러진설음식도없이맨술한병차고병자처럼,그러나치병과환후는각각따로인것을킥킥당신이쁜당신……,당신이라는말참좋지요,내가아니라서끝내버릴수없는,무를수도없는참혹……,그러나킥킥당신
---「혼자가는먼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