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3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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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묵시록적인 비전을 들고
현대시의 전경에 새롭게 등장한 판타지

멸망 이후에도 세계라는 꿈은 계속된다, 변혜지 첫 시집 출간!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남다른 사유의 깊이, 막힌 혈로를 뚫듯 날카롭고 예민하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아우르는 너끈한 묘사력”(심사위원 김영남·이학성)을 지녔다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변혜지 시인의 첫 시집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힘이 넘치는 상상력을 유감없이 휘어잡는 문장력이 돋보이는 총 45편의 시를 묶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걸출한 개성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본문에서 작은 크기로 처리된) ‘나’의 탄생을 알리며 시는 시작된다. 곰비임비 쌓여 끝없이 이어지는 꿈속 이야기. 차원의 문을 넘나들며 숨바꼭질하는 ‘나’와 아이들과 그 모든 등장인물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부를 나누지 않고 흐르는 시편들은 알레고리의 반복과 변주를 보여주며 긴 호흡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서사처럼 읽힌다. 시집의 제목은 2010년대 후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웹 소설 시장을 주도했던 『전지적 독자 시점』(싱숑, 문피아와 네이버에 시리즈 연재, 2018~)에 등장하는 판타지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에서 따왔다.

“끝이야, 모두 끝났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말은/하고 싶어도 해서도 안 되는”(「대과거」) 세계의 비정非情을 가리키며 시인은 독특한 시적 판타지 공간으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이미 세상에 태어난 나,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려는 나, 넘지 못하는 나, 소외와 절망과 체념의 굴레 속에서 정체를 잃어버린 나 그리고 셀 수 없는 멸망을 목격하고 또 한 번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는 나. 변혜지의 시는 이세계異世界 혹은 아포칼립스물로 분류되는, 전술한 웹 소설의 세계관-순식간에 생존 게임에 걸려든 주인공의 이야기-과 궤를 같이하는 듯하나, 그에 못지않게 냉혹한 현실의 정조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독자의 몰입을 끌어낸다. 밝음으로 치장된 서정적 풍경 대신 암흑 속에서 희박한 가능성만이 점멸하는 세계를 매우 뚜렷한 상으로 제시함으로써, 가망 없는 현실의 벼랑 끝에 선 화자의 표정을 다각도로 비춘다.

변혜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완료된 대과거와 아주 작은 수정의 가능성이 있는 미래와의 관계다. 그리고 시인에게 현재는 레고 같은 사람들이 동시적으로 꾸고 있는 엄청난 재앙이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꿈이기 때문에 시인(독자이자 주인공이자 작가)이 예측 못 할 만한 사건은 없다. 대참사는 꿈이 자신의 긴 팔을 뻗는 것과 같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거의 같다. -박판식, 해설 「묵시록의 성찬」에서
저자

변혜지

저자:변혜지
시인변혜지는2021년『세계일보』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내가태어나는꿈
플라스틱아일랜드
불시착
대과거
레고피플
꿈이긴팔을뻗어
내가되는꿈
쌍둥이
희박하게끓어오르는물
팩맨
누군가또다시손가락을움직이고있다
그거그대로내버려둬
개명
메리고라운드
예쁜꼬마선충
멸망한세계에서살아남는법
절대멸망하지않는세계에서살아남는법
브릭하우스
여름에꾼꿈
공작새마음
원테이블키친
원히트원더
모자의일
세카이계만화
언더독
테라포밍
ZERO
끝나도끝나지않는
러브딜리버리
숏츠
EntertheWorld
무해한놀이
매일변화하는행동생물학
ChickenorBeef?
마침내희재를위한세계를
하늘과땅사이에뭐가있더라?
포장도로
화반석정원
스카이다이빙
여섯번째날
믿음을키우는방법
플로럴폼
해변에서의일
말씀과삶
탑독

해설
묵시록의성찬·박판식

출판사 서평

전통과고유성에대한반격
폐허의중심에선시시포스의몸짓

전생에손에쥐었던낙엽이뺨을스쳐서,나는자꾸만얼굴을긁는다.이어둑한산책로의농담을가늠할수가없다.얼마나오래씹었으면……왜이번에는나를사랑하지않아?반복상영되는영화를보는사람처럼

다른곳을바라보며
너는금세녹는사탕한알을입에넣는다.

시스템을초기화하시겠습니까?
―「누군가또다시손가락을움직이고있다」부분

변혜지의시세계가보여주는것은부조리를문제화한,문학사적으로유구한논의에대한재해석이다.“오래된장승”이있는마을에사는아이들은모방의형태로“장승놀이를하”(「불시착」)면서성장하고,기다림을배운다.“아직기다려야한다고”(「대과거」)말하는,세뇌에가까운속삭임이외부로의탈주를막는다.무엇을위한기다림인줄모르면서막연한두려움으로이후를상상하면서,무방비상태의화자는꿈속에서점점비대해져간다.소인국의포로가된걸리버처럼낯선세계에결박된채영문모를‘보호’를받으며잠들어있다끝내도시전체와나를부수고깨뜨리는또다른나로인해잠에서깨어난다(「레고피플」).그순간새롭게도래한‘나’는누구인가?변혜지의시는주체의정체성이확립되기도전에맞이하는분열과와해의과정을낱낱이파헤친다.“아주먼옛날”(「팩맨」)부터전승된집단의폭력이지배하는곳,자유의몸짓을간단히꺾어버리는외부세계로의진입.이로써변혜지의시는새로운국면에들어선다.
시인은화자가순수하게인식하던세계의예측불가능한흐름을보여주면서그에대한공포에가까운반응을기록한다.“부엌장위에놓여있던먼지쌓인그라목손이사라졌을때”(「쌍둥이」)화자인‘나’의존재는최소화(혹은왜소화)되고,한때보호의명목으로화자를둘러쌌던“작은사람들”의자리로전락한다.“날개가찢기는것도모르는작은사람들은영영작은사람들이”지만“신을대신하여말씀을전하라는신탁을받”은‘그’가돌연모습을드러낸다.길을떠나부지런히걸음을옮기는‘그’는이제는화자마저포함된작은사람들을지나쳐,“커다란입을가진사람들의마을”을지나쳐,새로운신전을짓는다(「팩맨」).언젠가녹을지도모를눈[雪]으로만든신전에서신을무릎꿇린채경건한말씀을전하는‘그’는변혜지시의또다른주인공일것이다.등장과동시에‘그’의존재는잠시‘나’와연결되었다가장면의전환으로끊어진다.또다른인물‘희재’역시같은맥락에서이목을집중시킨다.“대신꾸는희재의꿈”(「메리고라운드」),“희재의꿈에서캐낸푸른감자한알”(「원테이블키친」),“내가돌본희재의마음들”,그모든것이‘마지막’을향해치달을때화자는“희재를향해열린문속으로”(「ZERO」)희재를따돌리고뛰어든다.
“그자리에있어야하는건네가아니야.내가꿈속의나를향해소리치”(「언더독」)는절박한외침조차‘꿈’이라는현실과유리된시공간에서는공허하다.시인이그리는새로운세계의반동적움직임,안팎이불분명한겹겹의꿈속에서시시각각변모하는주체의얼굴은독자로하여금‘그(혹은나)는누구인가’의문제보다이쉼없는존재의변형과운동이일어나게된이유를생각하게만든다.신을대행하는존재이건,고유명사로서이름을획득한존재이건간에시속의인물들은움직이고움직인다.“나를위한세계를마저그릴수있도록산책로에서의걸음을늦추”기무섭게들려오는“각성하십시오”(「테라포밍」)라는반복명령은정체를일절허용하지않는변혜지시세계의생존법칙을드러낸다.마치커다란바위를산꼭대기로밀어올리는형벌을받은시시포스처럼,존재하는한삶의“페이지를덮지않은사람”(「멸망한세계에서살아남는법」)으로,“끝나지않을여행을”(「절대멸망하지않는세계에서살아남는법」)계속하는것이다.

끝나도끝나지않는링크로연결되는
이세계異世界의열린결말

강보에둘러싸여서우리는분주합니다.흘러내리지않으려고떠오르지않으려고태어나지않으려고그러나살아남아야한다.살아남아야한다……

말씀과상관없는삶이시작됩니다.
―「말씀과삶」부분

독자는어느순간다중의인물과목소리가연쇄적으로출현하는이모든정황이한꺼번에목격되는시점의위치를생각하지않을수없다.이에대한답처럼,아마도시인일화자의목소리는불쑥끼어들어“이시는눈동자에남반구식물을심게된경위를다루고있”고“나는내가깨달은것을기록하기위해앉아있”다고말한다.변혜지의시에는계절의끝이자순환의시작점인‘겨울’이자주등장하는데,특히시속에서눈은내리고녹기를반복하면서새하얀순수와시커먼진창을번갈아보여준다.태어나죽음으로나아가는삶,나를잃어가는삶,추위가덮친폐허의현장에서시인은불현듯,봄을기다릴것도없이지구의자전축을돌려겨울과맞닿은남반구의여름을불러온다.시인(화자)은“눈을감고지켜보기만하면되는”“이고요한파수把守의행위는사랑이아니지만사랑같”은것이라말하며눈동자속에식물을심고가꾼다.그리고이러한묘목행위가시적자아의자발적결정임을증명하는마지막한문장“이것은창문안쪽에서일어난일이었다”(「절대멸망하지않는세계에서살아남는법」)를덧붙인다.고함과비명이터져나오고,온갖위협적인것이도사리고있는“창문밖”의풍경은앞서수없이화자의반응을끌어냈지만‘이후’를상상할수없는즉각적이고비자발적인것으로그려져왔다.반면북반구의겨울과동시에존재하는남반구의여름,꿈속의‘그애’는전혀아름답지않은“작은바위같은물건을”(「여름에꾼꿈」)주머니속에넣고누구에게도주지않는다.명백한의도를지니고,스스로의의지로움직이는화자를등장시킴으로써변혜지는점점이독특한판타지의출구로향해간다.시시포스의신화를연상케하는‘바위’이야기나,안식년동안자기를대신해자리를맡아줄수없느냐는신의제안을거절하는화자의모습에서우리는끝내인간이기를선택함으로써삶의고통까지끌어안는존재방식을보게된다.“고치속애벌레에게봄이오는고통……”(「끝나도끝나지않는」)은어쩌면화자가그토록찾아헤매던‘아름다움’의근원일지도모른다.월동중인애벌레고치,가지를곤두세운헐벗은활엽수들,“믿을수없이빠른속도로”흐르는구름,“믿을수없이새하얀연기가”흘러나오는굴뚝모두도래할미래앞에평등하게펼쳐져있다.살아움직이는풍경을사랑한대가로고통에서벗어날수없지만“사랑하는사람이너무많아서”“자꾸만잊어버리고,”“얼굴을잃어도”계속되는마음(「탑독」)이우리를끝없는삶의판타지로이끈다.
시집의해설을맡은박판식의말처럼“시의화자가이세계를‘멸망한세계’라고부르거나반대로‘절대멸망하지않는세계’라고바꿔불러도그내용은전혀변하지않는다.이원환론적인세계는화자에의하면사랑(길항하는미움,분노,증오……)에의해서생겨났기때문에사랑이라는것이끝나지않는한멸망해도다시환원되거나초기화된다”.흥미로운웹소설에서얻은모티프를철학적주제로확장한변혜지의시세계는예측불가능한삶을살아가는독자모두와시의안팎에서끝없는변주로목소리를교환하면서신의전지적인위엄을무너뜨린다.시인이그리는저항의몸짓은다름아닌희망이다.변혜지는멸망한세계에태어나절대멸망하지않는세계를상상하고움직이는작은신들,“말씀과상관없는삶”을사는“우리의몸과마음을구”할페이지를열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