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회 발코니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4

오늘 사회 발코니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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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제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바다. 아름답고 무섭고 아득한 사회의 바다.
파도가 밀려오면, 발코니가 흔들거립니다.”

친애하는 나의 이웃들에게
‘다정한 이웃집 시인’ 박세미가 부치는 전언
오늘과 사회와 발코니에서 늘 안전한 항해이기를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파편화된 이 시대에, 오로지 현재만을 휘발시키며 살고 있는 나에게 어딘가로 치켜들 손가락 따윈 없다. 나는 다만, 하루하루 주먹을 쥐고 생활과 겨룰 뿐이다.
-산문 「다만 나는 오늘의 맥락이 된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여름호에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다정한 이웃집 시인’ 박세미의 두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94번째로 출간되었다. 2019년 첫 시집 『내가 나일 확률』을 펴낸 지 4년 만에 돌아온 시인은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적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이번 시집에 해설 대신 수록한 인터뷰는 그 공백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줄 가장 흥미로운 선택이다. ‘되고 싶은 것’이 되었느냐는 물음에 ‘전혀’라고 답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더 멀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무수한 지금을 지나 한 시절을 단락 지은 시인의 얼굴이 여기에 있다. 체념과 용기 같은 것을 한데 섞은 미묘한 표정, 그런데 어딘지 성숙하고 단단해진 느낌, 그러나 여전히 사랑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은 채로.
시집을 짓는 일을 집짓기에 비유한다면, 3부로 나뉘어 수록된 51편의 시는 그간 시인이 하루하루 성실하게 고르고 다듬어 쌓아 올린 재료일 테다. 이 집은 화려하기보다 단정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지만 견고하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이들도 집과 꼭 닮았다. 첫 시집에서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슬픔을 고백하면서도, 이내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깊고 연약해 보이는 땅”(「뜻밖의 먼」, 『내가 나일 확률』)으로 향하던 박세미의 화자들은 뚜벅뚜벅 걸어 지금 여기, 오늘 사회에 도착했다. 그리고 발코니에 올라서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기별을 전한다. 오늘과 사회와 발코니에서 늘 안전한 항해이기를 응원한다.
그러므로 『오늘 사회 발코니』는 이 땅 위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당신, 눈앞의 오늘을 살아가는 데 열중하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이 시집에는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이 불현듯 출현한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의 사람, 다음 역으로 가는 사람, 사라진 동료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사람, 무의미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 술을 삼키고 웃는 사람, 기어코 쓰려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가는 인물들을 호명하는 사이 당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시집을 덮는 순간 자신만의 유일한 발코니를 갖게 될 것이다.
저자

박세미

시인박세미는2014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내가나일확률』이있다.김만중문학상신인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생활전선
현실의앞뒤
생산라인
순환세계
장식
일조권
육상선수
뒤로걷는사람

선택권
서프라이즈박스
실수
기능
Balkon
현관
외출
보이드

2부
빈티지
우는몸
점의위치
얼굴무거운
사회의시간
나는터치한다고로나는존재한다
기원전3억5천2백만년경부터살아온
밤의인터체인지
밥과술
짐작속
백내장
나와그녀
표면으로낙하하기
살아있는작은안개가하는일
리액션
매거진
가난한미술수집가를위한방
벽없는집
새로운생활

3부
부정적유산
미술관을위한주석
11구역
잠의마천루
파사드
일앞에서
거울앞에서
어떤키스
구라마온천가는길
접속
사치
꿈의형벌
무심코
모빌
빈집에갇혀나는쓰네

인터뷰
이웃한발코니의사람들로부터·박세미

출판사 서평

“우리는모두늪에
빠지지않기위한걸음걸이를가졌지”
─걷고뛰다가멈춰서서생각하기

시의화자들은어느덧제법안정적이고평온한하루를보내게된듯하지만,“절대상하지않겠다”(「일조권」)는다짐을되새기듯끊임없이걷고뛴다.“늪에/빠지지않기위한”(「현실의앞뒤」)걸음걸이로,“두팔목이잡힌채로”(「사회의시간」)걸어가는그들의모습은여전히아슬아슬하고숨가쁘다.“팔다리를효율적으로가동”해“최대한의속도를”(「육상선수」)내는법을훈련하지만누군가를제치거나결승선에닿는데그목적을두진않는다.오히려때로는“한발자국씩뒤로”(「뒤로걷는사람」)가거나,“스툴의다리끝에올라서는연습을”(「기능」)하며시간을유예한다.
‘시간’은박세미식세계에서사회를주관하는개념이다.시인은과거와미래의양끝을연결한고리에현재의몸이묶여있다고느끼며,“다른존재들과시간으로연결되어있다”고감각한다.매일같이걷고뛰는동작을반복하는인물들이이러한시간의자장에서벗어나는공간은오직‘발코니’뿐이다.“안에도속하지않고밖에도속하지않은,안과밖의자장에서벗어난무중력의시간”(인터뷰)이흐르는곳이다.「Balkon」에서‘나’의딸리자는안온한발코니위에선채로“아름답고무섭고아득한사회의바다”를항해한다.

나의딸리자는발코니를건물의정면에정박해있는작은배라고한다
오늘도리자는작은배를타고항해중이다
등뒤에서다른가족들이식사를하든말든,집안청소를하든말든,노랫소리가들리든말든
아랑곳하지않고오로지자신앞에펼쳐진바다만을경험한다
뒤돌아보지않기로작정한사람처럼
방금돛을펼친사람처럼
-「Balkon」부분

앞선시의제목은소설가오르한파무크의사진집『Balkon』에서따왔다.파무크는반년간매일발코니에서바라본풍경을8천5백여장의사진으로남겼고,그중5백여장을책으로엮었다.소설쓰기가막힐때마다발코니에서서바깥풍경을찍고그꾸준한기록을또하나의예술작품으로만들어낸파무크처럼,『오늘사회발코니』에는성실한생활의포즈를묘사한시가자주등장한다.
지난20년간화이트셔츠공장에서일해온‘나’는“마흔가지가넘는와이셔츠제작공정에서칼라와커프스를다는”작업을수행한다(「생산라인」).1인운영국숫집의주인인‘그’는“국수한그릇이손님에게나가기까지필요한모든과정”을도맡는다(「일」).생각이끼어들틈없는반복적인일상을멈추는것은부지불식간에일어나는사고다.“검붉은피가번지”고,“노릇하게구운냄새가나”고,얼굴도모르는“옆자리의동료가사라”(「생산라인」)지는가하면,“기계가그의손을반죽인양빨아들인”(「일」)다.사고(事故)가일어난순간에서야사고(思考)가시작된다.고된삶을살아가는이들은가끔씩“스스로를인질삼아겁박”(「일앞에서」)한후에야비로소무언가를생각할여유를얻는다.

“나의사회와너의사회가만나는
촉촉한뽀뽀”
─오늘의맥락위에지어올린‘실시간시’

「모빌」은시인이처한일상,노동,예술의균형감을조명하는작품이다.그림자처럼살던한사람이전시를열기로한다.그는“몸에서가장먼곳부터/아프지않을만큼”오려실에걸지만“그림자는줄어들지않”는다.“몸에서가장가까운곳을잘라”내자“전시장에사람들이몰려”든다.삶과예술의경계를오가며탄생하는‘실시간예술’의현장이다.
그러므로,시인에겐“아무것도예술작품이아”닌동시에“모든것이예술작품”(「가난한미술수집가를위한방」)이다.출근하고,노동하고,웃거나울고,저녁을먹고,잠드는생활인인동시에곧시를쓰고그림을보고전시를관람하는예술인이다.

(중요한것은)
그는매일한권의도록을꺼내는사람
그날그날의기쁜페이지를펼쳐테이블한가운데에두는사람
전화를받다가정확히거기에커피를쏟는사람
한달에한번회화작품을프린트해벽에붙여두는사람
그것을한참바라보다가시를쓰는사람
필요하다면그것을떼어바닥에깔고짜장면을먹는사람

침대에누워시스티나성당의천장을바라보는사람
이윽고코를고는사람
-「가난한미술수집가를위한방」부분

이시의화자는생활과예술이서로를간섭하고침범하는공간속에놓여있다.이십대를통과하며엮은첫시집이일상에서분리해낸시적순간들을영감으로삼았다면,그다음10년을지나고있는시인은다만오늘의맥락속에서새로운맥락을지어올린다.생활의토대위에시적풍경을건설한다.시인이자직장인,한집안의맏딸이자한국에거주하는삼십대여성으로서,“오늘나의노동에관해,오늘읽은책에관해,오늘걸은도시에관해,오늘만난사람에관해,오늘꾼꿈위에시적언어를대응시키고,중첩시키고,충돌시키고,균열을발생시키면서”(인터뷰)충실하게다음보폭을내디딘다.
누군가는한집에모이기보다발코니너머로안부를전하는시인에게모종의거리감을느낄지도모르겠다.박세미는그런의문에이렇게답할것같다.‘즐거운사회’는이해받고싶은욕망을인정하면서도그것을애써욕심내지않는것,곁에있는사람들의고유한영역을존중하는것에서시작한다고.우리에게주어진역할은각자의내면에서“고요하게타오르는불”(「짐작속」)이쉬이꺼지지않도록서로를지켜봐주는일이라고.「빈집에갇혀나는쓰네」의화자는“빈집에초대되”어“스스로를가두고”다만“쓰고있”다.눈앞에펼쳐진바다가너무막막하게느껴질때면그저발코니로나가봐도좋을것이다.그곳에서면맞은편에도발코니가있다는사실을알게될것이고,어떤순간에는눈을마주치며서로를구하기도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