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을 타고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6

트램을 타고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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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이강

저자:김이강

시인김이강은2006년『시와세계』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당신집에서잘수있나요』『타이피스트』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우리의뼈였던것
나와클레르의오후
운하에모이기
다르의새벽
타이피스트
클레르의빛
여름잎사귀
해방촌언덕
혜화동,테라스작업
우리의뼈였던것
낮잠
어느가족
운하에모이기
창경궁에갔다
카즈미없이
잘알지도못했지만

2부서머타임
해수욕
평희에게말했다
서머타임
벨파스트의시청앞
바흐이덴
실측
산들바람처럼
서머타임클레르
서머타임클레르
휴가계획
앵무새피노키오타자기지중해
창덕궁에갔다
아키타
정동,테라스,사건들
세리머니
우리가남아서걸어가면

3부운하에모이기
데이빗안젤라티리에
호숫가호수공원
보수공사
보수공사
화요일에비가내리면
버스정류장
여름정원
타일
계단이있는야외테이블
깃털들
새로운서막

해설
빛의시제·조대한

출판사 서평


어쩌면이세계에기록되지않았을그들은시인이바라보는오렌지빛석양의편린속에서만,끝나지않는빛의계절에잠시생겨났다사라지는가상의서머타임속에서만,오랜관찰의시선과그보다긴행간의침묵속에서만,유예된망설임과아름다운예감의문장사이에서만현현하는존재인듯싶기도하다.
―조대한,해설「빛의시제」에서

시간과빛이혼재된‘전미래’의시공간
고요한아름다움의정동과그이면의섬뜩함

유일했던그이름으로그곳에입장해야겠다고생각한다.두드리지않아도지금쯤문은열려있을것이다.닫혀있는동안에만그곳에갈수있음을그는깨닫는다.
―「바흐이덴」부분

김이강의시의시적화자는트램을타고낯선마을을둘러보듯시간을우회해세계를통과한다.창밖에펼쳐진정경의밀도가올라감에따라무의식에서모습을드러낸사소한사건들은시간의틈을벌리며화자를향해손을뻗친다.“그냥그자리에그렇게”있을뿐인바깥세상의세부가일순간양각과음각을드러내고화자는장면의일부로빨려들어간다.자신을찾으러온친구들을향한“나아!아직더갈거야아!”란외침(혹은선언)이무색하게,화자가존재하는시간은이미현실로부터유리되어“공들여바라보니모두다른애들같기도나무같기도공터같기도”한기이한대상을향해나아가는중이다.스쳐지난시간에머물며트램밖에펼쳐진풍경을떠돌기시작한존재의여정은“좁고긴날들”(「다르의새벽」)을지나새로운‘기분’의세계로진입한다.

해방촌,혜화동,밀라노,창경궁,벨파스트,프라하,창덕궁,아키타,정동등드넓은반경을그리며“꿈도아니고전생도아닌곳에서”(「클레르의빛」)조우하는수많은존재들.명,클레르,에릭,남경,세희,카즈미,평희,카,세리나,폴등호명만으로도실루엣이선명해지는그들은시적화자와함께걷거나짧은대화를나누거나서로를관찰하며시간을보낸다.때로화자를밀어낸채장면의주체로스스럼없이움직인다.끝내약속장소에도착하지않을때조차그들은시간저편에서고유한생활을간직한채이곳의혼란을괘념치않는것으로,온갖추측을낳는부재만으로화자의생각을지배한다(「카즈미없이」).김이강의시에서화자가“멀리에서서보는일이혼란스”(「다르의새벽」)러워물리적거리를좁히려타인에게다가가거나혹은타인과“같은위상의/다른것을하”(「타이피스트」)며시간을보내는것은무심코발견한존재를향한이해에도달하려는움직임으로읽힌다.눈앞의대상이흘리는찰나의표정과중얼거림을놓치지않고되새기며,대상이부재하는시간에서조차의중을살피며자리에서기다리기.김이강의시는이렇듯끝내하나로엮일수도확신할수도없는관계로부터멀어지지않으려는분투에가까운몸짓으로,세상에‘나’를떨어뜨려‘나’를잃는방식을선택함으로써세계를확장해나간다.어쩌다가게되는창경궁처럼,돌아서면다시궁금해지는창경궁처럼(「창경궁에갔다」),나아닌존재의시공간에입장해작은비밀을남겨두고만남을되풀이하며사랑으로나아간다.“한번연주가끝난스메타나의음악이바흐이덴의생각속에서새롭게시작되”듯,“유구한물결”(「바흐이덴」)처럼흐르는미지의영혼이나로부터새롭게태어날것임을시인은예감한다.


미지에스며들어존재하기
좁고긴날들을지나마주한무한한세계

붉고둥근모자를쓴할머니가느리게걸어와구식열쇠를돌려문을열었어.쇠로된열쇠를푹끼워서말이야.그런데그날우리왜모두도망쳐버렸을까?할머니에게인사하고모자를좀보여달라고부탁했으면어땠을까.

“그냥그런생각을한다.문하나를여는일.열쇠를푹끼워서돌리는일.다른공기속으로들어가는일.”─「앵무새피노키오타자기지중해」부분

독자는성급한동일시없이그저바라보고귀기울이는사이점차로가까워지는‘나와너’의세계를홀린듯따라가게된다.눈비에젖어몽롱한겨울과여름,새벽과낮을넘나들며걷고주위의동정을살피는동안흩어졌다합류하는무수한타인의얼굴은창문너머로일그러져보이는모자와도같아서“앵무새로,”“피노키오로,”“타자기로,”“바다로,”착각되곤한다.즐거운환상이막깨지려할때,‘그것(모자)’의실체가공개되기직전에모두도망쳐버리고말았지만“수심이깊어보였던그것을열고들어가는”(「앵무새피노키오지중해타자기」)모자가게할머니는본능적인공포를뚫고타인을경유해세계의진실에한발짝다가서는시인을연상케한다.

미지에스며들어존재하는김이강식문법은둘이상이결합된관계의또다른신비를드러낸다.“단지두개를사먹었을뿐인데”“모자를벗고인사”(「운하에모이기」)하는아이스크림장수할아버지가있는가하면,“세희가두장주세요!하고”외치자“활짝웃는”(「여름잎사귀」)마로니에공원의매표소직원이있다.분리된‘나와너’가아닌‘우리’가,예기치못한순간맞닥뜨리게되는외부의환대는‘우리’에서비롯된파문과도같은새로운기쁨이탄생했음을가리킨다.

시집의해설을맡은조대한의말처럼“작품내가정된시적상황과비현실적인시제들은단순히꿈과환상을형상화한것이아니라,세계의운명을앞당겨선언한미라보의그언명처럼시인과독자사이에놓인대화의장을이끌고가는원동력이자훗날도착할미래의준거가되어주는듯하다”.순간의희비가교차하는기나긴여정끝에시인이도착한곳은다름아닌운하다.시집3부의제목“운하에모이기”는1부에삽입된두편의시제목과동일한데기점과종점이같은마을을한바퀴빙둘러본듯한느낌을준다.시인은“이렇게멀리에서서보는일”(「다르의새벽」)의혼란을벗어나고일방적으로“내가갈게/내가다시올게”(「버스정류장」)라고말하는슬픔을떠난다.“다시중간쯤에서”만나“각자의장소로돌아가”지만나에게“항상오”(「새로운서막」)는시간의물결이유유히흐르는곳,색이뒤섞인채겹겹의빛을받아반짝이는운하에서불어오는‘시원한’공기를맞으며무한한세계로걸어들어간다.

시인의말

기차는길어
긴건바다
바다는배꼽

언젠가들었던노래를오래생각해두었다가여기에적는다.

2024년2월
김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