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1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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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사랑이 허물어지는 순간에도
찰나의 아름다움을 안간힘으로 붙드는 사람,
시인 이병률이 써내려간 사랑의 기록
저자

이병률

저자:이병률
충북제천에서태어나서울예술대학문예창작과를졸업했다.1995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시「좋은사람들」「그날엔」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당신은어딘가로가려한다』『바람의사생활』『찬란』『눈사람여관』『바다는잘있습니다』『이별이오늘만나자고한다』,산문집『끌림』『바람이분다당신이좋다』『내옆에있는사람』『혼자가혼자에게』『그리고행복하다는소식을들었습니다』등이있다.현대시학작품상,발견문학상,박재삼문학상을수상했다.‘시힘’동인이다.
수상:2021년박재삼문학상,1995년한국일보신춘문예

목차

시인의말

1부
어떤그림|공원닫는시간|명령|아주오래전부터|언젠가는알게될모두의것들|종소리|줄|농밀|기차표|어질어질|폭설|그런것처럼|오늘의가능성

2부
누군가를이토록사랑한적|청춘에게|시계를풀어흔들어줘|사랑|사랑|사람귤(橘)|집을봐드립니다|원했던바다|낮달|한달|꼬리|바람과봉지|나는압니다|상실의배|오래만났다는사실만으로사이를유지할수는없다|완독회|과녁|몸에게|흙냄새|장미나무그늘아래|물든잎

3부
킬리만자로의눈|우리는누구나바다로간다하지만|어떻게도떨쳐낼수없이모두가그사이중간에있다|이면지뭉치|우산의탄생|경력서|어린시인에게|멀리서한국어를배우려는당신에게|내가죽어누워있을때|한쪽날개와반대쪽날개|배역에대한고민|흰곰이나타났다|기차는칭다오에서출발한다|친구|하산|인간은연습한다|내가소년의딱지를뗀세상의첫날|바싹자른연결부위|누가내게술한잔을사줘도되느냐고물었어|마음은꽃게|소년에게

4부
해변의절벽|이것도다매듭을풀려는것아니겠습니까|그네|어느가게유리에찍힌이마자국|잠시커튼이야기|환풍|가을의우체국|이삿날|재워줍니다이별은덤이고요|조각들을좋아해|내가원하는것|안보고싶은마음|누락|공항에서

해설
사랑한적,사랑할적·이광호

출판사 서평

“당신눈속에반사된풍경안에
내모습도나타나기시작했습니다”

다시금사랑이허물어지는순간에도
찰나의아름다움을안간힘으로붙드는사람,
시인이병률이써내려간사랑의기록

시인이병률의일곱번째시집『누군가를이토록사랑한적』이문학과지성사시인선601번으로출간되었다.사랑이라는명명하에바닷빛과하늘빛이절묘하게어우러진테두리와낮은채도의소라색바탕이겹쳐진이번시집은마치파블로피카소가절친한친구의자살이후짙은푸른색만을고집했던청색시대(1901~1904)를연상시킨다.파리에서좀처럼적응을하지못한채궁핍한생활을이어나가던청년피카소의눈에들어온것은다름아닌,맹인남자,웅크린여인,압생트를마시는사람과같은거리의빈민자였다.오늘날피카소의작품을보면청년예술가의불안함과인간으로살아가는일의고독함을느낄수있는데,그이면에는무엇보다인간의텅빈눈동자와살가죽위로드러난단단한뼈마디를짙은밤하늘과심연의바닷빛으로고스란히담아내려한예술가의가냘픈사랑이있었다.이병률시의아릿한문장과지워지지않는허기역시시인의시선끝에는늘“무언가에가까워지려애쓰는사람들”(「청춘에게」)다시금“시적인얼굴이되”(「완독회」)는이들이있었기때문이다.반드시떠나야만하는숙명을짊어진채로늘어딘가로향하면서도“더사랑해야할몇몇얼굴들”(「기차역」)을되새기고길한가운데쭈그려앉아“쓰러져누운강아지한마리를쓰다듬”는노인을보며인간답게사는삶을연습하는것.이렇듯이병률의시는자신이목도한사랑을지나치지않기위해몇번이고걸음을멈춰선다.자기자신의무게만으로도한없이쓸쓸하면서도타인을향한선한사랑과연민을거두지못하는그는,과거파리에서지독한습작기를보내고시인이되어돌아온그순간부터푸르른외로움을딛고더밝고환한사랑의세계를보여주며시대적감수성이무엇인지를보여주었다.그런그에게청춘을빚지지않은이가또있을까.
이번시집의출간제안을받고“바로눈내리는곳으로떠났”(「시인의말」)다는시인은자신을붙들었던사랑을파내기위해영원히녹지않는눈속으로파묻히길택한다.그의사랑은과거의흔적을헤집거나오지않는미래를기다리지않는다.단지,사랑그것만이자리하는장소를남겨두는것이다.사실사랑의시집은한선배시인의오랜당부이기도했다.그에게‘당신’이라는말을알려준사람이자시집『찬란』(문학과지성사,2010)의해설을쓴시인허수경.생전에그는독일베를린에서이병률에게사랑의시에대해말했다고한다.사람과사람사이의약속은반드시지켜져야한다고믿는시인은이번시집에서자신이오래품어왔으나끝내잃어버려야만했던사랑의순간들이조각조각모아마침내‘사랑의시집’을완성해냈다.그렇게당신,바람,찬란,여관,바다,혼자그리고행복과이별그의시와산문에서무수히많은단어로치환되었던‘사랑’이,끊임없이망설이고주저하기마련이었던‘사랑’이지금막독자들앞에당도했다.

내디딜발하나가없거나
끌어당길손하나가없어도

누군가를이토록사랑한적
시들어죽어가는식물앞에서주책맞게도배고파한적
기차역에서울어본적
이감정은병이어서조롱받는다하더라도
그게무슨대수인가싶었던적
매일매일햇살이짧고당신이부족했던적
이렇게어디까지좋아도될까싶어자격을떠올렸던적
한사람을모방하고열렬히동의했던적
나를무엇을해야할지모르게만들고
내가달라질수있다는믿음조차상실한적
마침내당신과떠나간그곳에먼저도착해있을
영원을붙잡았던적
―「누군가를이토록사랑한적」전문

사랑에는인과관계가없기에이를증명하려는시도역시무용한일에가깝다.표제시「누군가를이토록사랑한적」의화자는사랑이완성의영역에속하지않는다는사실을눈이시리도록아프게밝혀내고있다.화자가말하는무수한‘적’(경험)은이미지나간일도앞으로닥칠일도아닌그자체로존재하는행위에가깝다.문학평론가이광호는“이시속에는그‘때’들의나열만이있을뿐문장은단한번도완성되지않”는다며이시의잠재성은“이미현실화된것사이의선택의층위가아니라현실화되기이전의상태,무엇이나타나고벌어질지모르는미지의사태”라고했다.이렇듯시인이병률에게사랑은“서로에게서솟아난영감”이고“누구도그들의엉킴을풀지못”(「공원닫는시간」)하는일에가깝다.“당신눈속에반사된풍경안에/내모습도나타나기시작”(「농밀」)했다면이미사랑은제역할을모두수행한것이다.사랑의의미를찾기전에“함께허물어지려고붙들고있”(「폭설」)는것.내가붙잡으려한영원이불확실한미지의대상일지라도그망설임마저단숨에폭설처럼껴안는것이다.

사랑의사건이일어난것을몸은감각하고있지만그내용을다알수없어서,망설이고모호해지고더듬거리는말들의세계가있다.‘생의암호’를풀수없어서더뎌지는말들의세계가있다.그러나그더딘말들이생의‘후방’에있을지도모르는사랑의리듬을찾아내는데에있어오히려기민한언어들을넘어설수도있다.그리고이병률이다.말이더뎌지는순간이야말로그마음의리듬이시작되는시간이다.
―이광호,해설「사랑한적,사랑할적」에서

왜슬프냐고당신이물었다
왜슬프지않으냐고내가물었다

글로사랑에대해배운적있느냐고소녀에게묻지않았다
배낭에담은털실을다시꺼내한발을이빨로끊었다
내손목에세번을감고묶어달라고몸짓으로말했다
털실로감은것이나인지소원의뼈인지몰랐다
소원이커다란실뭉치가되지못하겠는지털실뭉치가시장바닥에떨어져굴렀다
여행하느라부은나의발에다,어젯밤총에맞은소년병의두발을끌어다동여매야겠다는생각을했다

―「바싹자른연결부위」부분

우크라이나시장거리에서털실을파는소녀를마주친화자는이상기온으로40도가웃도는찌는더위에왜털실을파느냐고묻지않는다.이웃나라그루지야에서털장갑을판다는소녀의큰오빠를떠올리며“털실을온몸에감고날아다니다”“맨땅이아니라사람품”속에안착하고싶다는되지도않는상상을할뿐이다.시인은“이미죽어있는세상에와있”(「나는압니다」)는듯한기분에휩싸이다가도다시칭다오에서기차표가없는모자(母子)의안위를곰곰이살피거나스웨덴에서왔다는낯선사람을대신해그의할머니의손을잡아주러가겠다고약속한다.어딘지모르게아파보이는얼굴,무슨일이생길것만같은순간이면그앞에우두커니선채로여러번울컥하는것이다.“왜슬프냐고당신이물었다//왜슬프지않으냐고내가물었다”(「해변의절벽」)와같은짧은문답에는세상의모든이가귀하고아쉽기만하다는시인의순하고담박한마음이담겨있다.이렇듯이병률의시는어제와다름없이사람의자리를살피고그적적함을고요히지킨다.이국의땅에서만난낯선이를경계하기보단왈칵믿어버리는걸택하는사람.그런시인이말하는앞으로의소망은자주길을잃고,자주죽고,뭔가를그릇에담아도자꾸새어나가면서“다시는생의낯섦앞에서경악하지않”는것이다.자신이살아온삶을단언하지않겠다는겸허한자세는자주사랑을잃고,자주사랑이죽고,겨우내담아낸사랑이자꾸만새더라도“지금이언제인지를잊”(「명령」)겠다는다짐이된다.

그렇다면나의배역은
날개를하나로붙여버린새

나는한사람의대역이었지요
사람들은나를보고그로알아보기도했습니다
나도그사람인척했지요
싫지는않았기에

[……]

나는한자리에있었으며평범에집중했지만그마저도평범했으며역시그마저도지탱할힘을잃어자처한대역이었습니다
나는언제까지
이알몸으로의권리와황홀함을지속할수있을까요

―「내가원하는것」부분

우리는마치사랑의주인인것처럼굴지만영원을믿는시인에게는모두가사랑의대역에불과하다.그에게사랑은자신이맡은역할을잠시수행하거나내가아닌다른이의삶을흉내내는일인셈이다.사랑이끝난후에는“다른언어를쓰는사람이되어”(「과녁」)“그끝이언제일까를다시금고민하는배역”(「배역에대한고민」)이된다는것을아는시인은“사랑을사랑하기시작”한다.그어떤역할도다괜찮다는자세로사랑의황홀함을만끽하는것이다.때때로사랑은약속장소에나오지않을수도있고,계속해서헷갈려하다가이성적으로자기자신을오해할수있다는걸알면서도“생의암호”는“사랑을감각”(「언젠가는알게될모두의것들」)해야만이풀릴수있다는것을아는것이다.이병률에게사랑은전쟁,팬데믹,환경오염,비난과증오를해결할수있는열쇠가된다.언제다시사랑이문을두드릴지모른다는마음으로“창문을열어놓고한번도닫지않았”(뒤표지글)다는시인은오늘도“당신이사는세상모든틈에/열쇠를하나씩맞춰”(「환풍」)본다.사랑에인색한시대에서사랑의대역을자처하는시인이병률,그의날개에기대어섬세한시적언어들을되새기다보면우리에게도다시사랑할힘이주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