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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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끝을 상정하는 사랑의 위기 속에서
오늘도 힘껏 멸종해, 너를 멸종해

사랑의 화석을 더듬는 멸종의 고고학
유선혜 첫 시집 출간
202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선혜의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번으로 출간되었다. “지금 여기 이곳에 발 딛고 서 있으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자 하는 열정”(심사평)으로 써 내려간 시 43편을 총 4부로 나눠 묶었다.
저자

유선혜

저자:유선혜
시인유선혜는2022년『현대문학』신인추천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괄호가사랑하는구멍|내여자친구를소개합니다|흑백방의메리|하얀방|혼자있는사람|Nirvana|마주보지않고|사이비리듬|물어뜯기|영으로갈때|반납예정일|제2외국어|그게우리의임무지

2부
사랑과멸종을바꿔읽어보십시오|뼈의음악|어떤마음을가진공룡이|지질시대|징그럽게웃는연습|마녀와로봇의사랑|원룸에서추는춤|잡종의별자리|멸종의댄스|아쿠아리움|영생의굴|까마귀의역설

3부
빈맥|아빠가빠진자리|일란성슬픔쌍둥이슬픔|우리의아이는혼자서낳고싶다|우리는못말려|왜냐하면그상자는비어있을수도있기때문이다|청춘리스트|PrincipleofSufficientReason|밤무대|어느트로트경연프로그램의심사평|줌바버전|집단상담|너는대숲에왔다|폭탄이불량이아니라는사실은

4부
비어있는방|충돌에관한사고실험|악의문제|구멍의존재론

해설
‘철학적으로청소된’영혼의문장들·조연정

출판사 서평

공룡은운석충돌로사랑했다고추정된다
현재사랑이임박한생물은5백종이넘는다
우리모두사랑위기종을보호합시다

어젯밤우리가멸종의말을속삭이는장면
아주조심스럽게
멸종해,나의멸종을받아줘
우리가딛고있는행성,멸종의보금자리에서

공룡들은사랑했다번식했다그리하여멸종했다
어린아이들은사랑한공룡들의이름을외우고
분류하고그려내고상상하고그리워하고아이들은멸종하고
―「사랑과멸종을바꿔읽어보십시오」부분

표제작「사랑과멸종을바꿔읽어보십시오」에서시인은‘사랑’과‘멸종’의자리를고정해놓지않는데,이에따라시어의위치를부러바꿔읽다보면언뜻서로연관이없어보이는둘사이의접점을발견할수있다.사랑이란“이별이라는단어를/이해해본적없다는듯이/끝을상상하는능력을모두잃은”(「빈맥」)감정이기도하지만,“싱거운미래”(「우리의아이는혼자서낳고싶다」)조차기대하기어려운요즈음에는차라리“끝으로간다는것에대해/그러나끝나지않는다는것에대해”생각하는“리미트영의마음”(「영으로갈때」)에가깝기때문이다.
하지만끝을전제하게되었다고해서사랑을멈추거나포기할수있는것은아니다.“흐릿한마음”일지언정그것을“우리가읽을수있다는사실은/여전히/여전하”고“서로를흐린눈으로바라보는”일은“우리의임무”(「그게우리의임무지」)이므로사랑은계속된다.마치“고고학자”처럼,“운석이떨어지기까지어떤비밀스러운일들이벌어졌는지말해주지않”(「뼈의음악」)을지라도지금껏사랑하다멸종해간존재들이남긴뼛조각을추스르는데골몰하며,결국우리는멸종할때까지“사랑에대해아무것도모르면서/사랑해,라고발음하는수밖에없다”(「마녀와로봇의사랑」).이시집은바로유선혜의목소리가처음전하는사랑과멸종의발화이다.


“우주는팽창하고모든점은멀어진다고해도
다가가는찰나가있어”
잡종의별자리와기울어진행성이
증명을거스르며날아와지구에건네는믿음

타당하지않다고해도
증명할수없다고해도
믿게되는구절들이있어
전제와결론의나열로는
설명할수없는번짐이있어

[……]

내면이멸종한행성을
불가능하게만드는거대한외로움이있어

어제우리가나눈대화
당신이나에게몸짓으로전한인사와내가침묵으로대답한질문침묵을이해하는눈빛과독특한말의리듬
이모든게거짓인행성을상상할수있니?
―「충돌에관한사고실험」 부분

“우리가사랑을나누는순간에”다가와“지구에새로운멸종을가져”(「사랑과멸종을바꿔읽어보십시오」)오기전운석의원래모습은너른우주를떠다니는유성체이다.“쓸모없는것들만사랑하는너를사랑하는나와/자꾸만절뚝이는반쪽짜리나를사랑하는네가/섞여들어”간모습으로“허무하게반짝이는”(「잡종의별자리」)별의조각과“한대맞아찌그러져/기울어진궤도를가진”채“불규칙한박자에맞춰/끔찍하고괴상한주기로회전하는”(「사이비리듬」)행성에서떨어져나온조각이뭉쳐진,이상하고아름다운덩어리.
우주저편을부유하던유성체가머나먼지구의대기권안으로뛰어드는까닭은“우리의몸과몸이만날때/오로지물질로구성된육체들이부딪힐때/함께충돌”해야만“만들”수있는무엇의존재를믿기때문일것이다.내면과의미가사라진세계가존재할수있다고증명하려하는시대를들이받음으로써감히그“증명을거스르”기위해,반인반수의별자리와어긋난리듬의행성은기꺼이운석이되어지구와부딪으며“우리를입자의덩어리가아니게하는/입술로흘러나온파동너머의그것을”(「충돌에관한사고실험」)창조한다.단단한믿음을안고지구로날아드는이별똥돌의충돌은다분히의도적이므로,그것이그리는궤적은“하늘에서”추락의포물선이아니라“댄스처럼보일”(「멸종의댄스」)것이다.

“그러니까,나는영혼에도구멍이있다고믿고있어요”
어떤것으로도채울수없는존재의구멍
그실체를찬찬히감각하는생의손아귀

누군가는영혼의구멍을만질수도,볼수도없다고,그러므로존재하지않는다고반론할수도있겠지요.하지만구멍이게걸스럽게빨아들이는것들을보세요.우리에게빈곳을채워넣으라고명령하는구멍의중력.비어있는것의질량.갈구하는묵직함.

이것들을느낄수없나요?
―「구멍의존재론」부분

“우주를가득채”우던“미지의물질이”지구에도착하여반드시거치게되는곳은바로인간의‘구멍’이다.이구멍은“사랑이나정의,투쟁혹은혁명으로도/틀어막을수없는틈새/없는것들로정의되는/여집합으로만서술할수있는/고집스러운빈자리”여서,우주의물질조차그저“구멍을관통”하며“훑고지나”갈뿐이를채우지는못한다.
“인간이라면구멍을감추기위해최선을다하는것이당연하”(「구멍의존재론」)지만시인은제“머리에구멍이났”(「괄호가사랑하는구멍」)음을시집의가장첫작품에서부터고백한다.“귀엽지않은개체는인간이다죽여버”(「원룸에서추는춤」)리기때문인지그의구멍은“조금더커지면야옹하고울지도”모를“귀여운”모습을하고있으며,‘괄호칠수없는생각’들을먹고“점점크게”(「괄호가사랑하는구멍」)자라난다.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조연정이짚고있듯시인에게있어구멍은,즉“영혼의허기와존재의결핍”은이토록“당연하게그리고명백하게존재”하여“언제나분명히감각되는실체”인것이다.
시인은구멍을단순히드러내는데서나아가적극적으로‘키운다’고표현한다.“펄펄뛰며/채워넣기를명령하”다가도막상무언가를“욱여넣으면토해내는”이까다로운‘반려구멍’을도넛반죽다루듯따뜻한손으로“이리저리주무르”(「구멍의존재론」)고도닥인다.“뭐든잔뜩부풀면”다시또“구멍이난”(「악의문제」)다는것을알면서도,“밀가루가부풀어오를때나는찰나의달콤한냄새”를맡으며잠시나마“살아있다고느끼”기위해.가만한손길로“살아가는모든것의/타고난결핍”(「구멍의존재론」)을느끼는데집중하는유선혜의“취미는살아있기,특기는고요하기”(「내여자친구를소개합니다」)이다.

시인의말

그러나나는기어이써버리는사람

논리도없이
비약만있는미래를꿈꾸고
망해버린꿈들을죄다옮겨적는사람

이걸토하지않으면어떻게살아가죠?

2024년10월
유선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