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12.00
Description
“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서 있다.
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앉아 있다”
여럿으로 나뉘고 하나로 겹쳐지는 언어의 흔들림
겹겹이 쌓아 올린 그림자 위로 쏟아지는 선명한 감각들
끝난다고 썼다.
여기에서는.

계속되었다고 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는 이렇게 끝나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계속되었다」 부분

문자에 물질성을 만들고 문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 김뉘연의 세번째 시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19번으로 출간되었다. 출판 편집자이자 다양한 전시 및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선보인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2020년에 첫 시집 『모눈 지우개』를 출간하며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두번째 시집인 『문서 없는 제목』에서 GPT-3를 활용해 ‘시’와 ‘문자’가 지시하는 상황의 안팎을 오가며 시집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차학경의 『딕테』를 이어 쓴 프로젝트 시집 『제3작품집』에서는 ‘쓰기’라는 행위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비선형적이고 다원적인 시의 궤도를 그려내면서 “자신이 대하는 매체가 지닌 기억의 조건을 나열하고 재서술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재창안하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창작자”(최가은 평론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텍스트를 질료 삼아 시를 제3의 대안적 공간으로 만드는 그의 여정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에서도 이어진다. 총 61편의 시로 묶인 이번 시집은 별도의 부로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었을 때 하나의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각각의 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한 61가지 레이어로 층층이 쌓여 있다. 이 시집은 전작처럼 시각적 요소를 다채롭게 활용하기보다 문자 자체의 ‘나’와 ‘너’가 곧 ‘우리’가 되는 상징성에 주목한다. 비슷한 듯 다른 말들이 씌어지고, 중첩되고, 연쇄되고, 반복되며 결국 “아주 분명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인 김뉘연의 “이것”으로 가득 찬 세계. 페이지를 열면 처음 등장하는 시의 제목 「여기서는 이렇게 끝나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계속되었다」가 암시하듯 또 하나의 예술적 실험이 문을 연다.
저자

김뉘연

저자:김뉘연
시인김뉘연은2020년『모눈지우개』를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모눈지우개』『문서없는제목』『제3작품집』,소설『부분』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여기에서는이렇게끝나는데그는다른곳에서계속되었다|누구는누구와함께극장에가려고|모자는그대로거기있었다|이것을아주분명하게|반쯤누워있는사람|단번에나타나겠다면|바닥에그리고벽에|어떤성질의표시|그것에다가간다|소개받은인물|지나가고|개별적인방문자|대부분의반박|잘알려진무관함|가깝게지낸행인|팔을펼치고손가락을튕기고|그것은그렇지는않다|발음이풀리지않은상태|이름이라는모습|보조수단|임의교체|벌어들인것|커다란여분|바깥에서동시에|옮겨다놓은무대|소매를걷어올림|조력자에게|형상을가진구성원|두번째체류|행동하는사람이될수도있다|좀더큰방|내다봄|거꾸로등장한다|준비한말|곧장웃고|크게확신하게된왼쪽|부분적으로망가진다|내버려둔직감|즉흥증명|공공연한지속|선명히나뉘었다|근접한곳|끌어내릴수있다|인쇄를거부한문장|아마장면일것이다|나중에구부리기라도하는것처럼|잠시누려본위장|그들의어조를묘사하지는않을것이다|관찰된대각선|큰걸음|벽이뚫렸다는사실|손대지않은뚜껑|흔든다|모방했던것과비슷하게|기록된방식|반쯤실현된단어|선회에필요한목록|분명해진정돈|같은음성|문간에|알고있는말을알게된다

해설
그림자화법·이한범

출판사 서평

“너를증명하는문장이너의삶을지지한다”
―새로운세계의가능성을희구하는오늘의그림자들

『이것을아주분명하게』의모든시는‘오늘’의언어로씌어져있다.과거와미래사이에서쉼없이흐르고있는찰나,지금이순간에이뤄지는시인의고뇌는얼핏보면시행착오를반복하는제자리걸음처럼느껴지기도한다.“각도를궁리하다삼십분남짓보”내는까닭은미래로가는길에조금의오차도허용할수없기때문이다.불분명한작금의상황을지나분명한내일로나아가기위해“추측의어미에서도망”치고추상적인말,이를테면어떠한“것같다라고는남기지않”(「반쯤누워있는사람」)으려한다.「부분적으로망가진다」에서경계하는것역시“하나비어있”는‘이’로“글자가샌다”는점이다.“문장이문이되고./글자가글이되고./빈공간을채우지않고있”는것이자꾸만화자의진로를방해하고,아직해결하지못한과제들로가득한데머릿속에또다시새로운문장이“등장해버”리는상황이니“문장앞에서”“좀처럼어찌할수없”(「단번에나타나겠다면」)다.이때필요한것이대상에그림자를만들어주는작업이다.

“그림자놀이”는말그대로글자로그림자를출현시키기위한연습인데,내용의구성을위해글자를사용하거나글자가내용으로향하게하지않고글자자체나글자가추동하는실재를끊임없는변형상태에두는방법에대한것이라고할수있다.형식실험이라고말할수도있겠지만그것만으로는불충분하다.왜냐하면이놀이는형식에대한실험자체가목적이아니기때문이다.
―이한범,해설「그림자화법」에서


보이지않는대상에그림자를만들고,기왕이면여러개만들어서실체를분간하는데오차를줄이는일은막연해보이지만이시집의중요한동력이다.시집초반에실린「어떤성질의표시」에서‘이씨’는아직등장하지않는인물(혹은대상)이지만,화자는“우리는이씨를만날것이다”라는무모한희망에기대고,마치상상속이씨에게그림자를부여하듯“느낌”과“기운”을소환한다.만날것이라는“느낌의기분을이씨에게보”낸뒤,그들은이씨를만나기위해“성산에대해한참말”(「그것에다가간다」)한다.이어지는시「소개받은인물」에서마침내‘우리’는이씨와성산에서만난다.화자는마주친이가아직이씨라고확신할수없지만인사를하기위해다가간다.이후「개별적인방문자」에서“이씨는공휴일에세가지시간을심어”두었고,마침내“부풀어오른사람을이씨가안는”다는대목을통해‘우리’(화자)그리고이씨의관계는설계된실험의결과였음을내비친다.비로소화자가염원하는대상과내일은만날수있으리란희구는선명한“잇자국”(현실)이된다.

이한범미술비평가는김뉘연의시를‘그림자놀이’를넘어선“화법자체”로보고,“동일한것들이서로가서로를부분으로두며끊임없는상호변형이일어나는것을가능하게하는말하기방식”이라고그의시세계를설파한다.어쩌면불분명하게펼쳐진오늘의불확실함속에서분명한미래의확실함으로나아가기위한과정은“완성이란없는,끊임없는흔들림을보는일”일지도모른다.그러나이연쇄과정에서탄생한무수한그림자로만들어낸‘분명한것’은오늘을“보낼수있는날이되고있”게하고“지나가고있”게하며“이곳이현재형이라는사실”을상기시켜“우리를일으켜세”(「조력자에게」)울것이다.

“알지못하는거리에서이루어지려하는만남”
―하나가되기위해무수해지는감각과중첩되는언어들

“이번시집에서김뉘연은계속해서‘나’와‘너’그리고‘우리’에대해서생각한다”(해설)는전언처럼,화자는타자와의거리를유지한채계속해서‘우리’라는단어의무게를가늠한다.그런데왜수많은타자,사물,낯선풍경속에서‘너’를알아보고‘우리’가되어야하는것일까.제목부터의미심장한「임의교체」에는처음부터“그럴듯한결과”만있다고토로한다.살다보면“언제든그럴수있”고“언제든바뀔수있”는것이결과이지만,“어이가없”는상황에서“그럴듯한결과”를“받아들”여야만하는부조리역시삶일지도모른다.분명해지기위해수행했던‘오늘의고뇌’이후의모습이불분명하고“그럴듯”하기만한미래라면,고민을나누고함께걸어갈‘너’를찾아내하나가되고자하는건당연한일일것이다.

「커다란여분」에의하면‘우리’가되는법은단순하다.전자노트에붙어있는연필처럼소파위엉덩이에개가“제엉덩이를붙”이기위해다가오는것,“함께걷던네가내팔짱을끼”는것으로“우리는한단어를이룬다”.물론“우리를시작했을뿐”완벽하게서로의그림자가겹치지는않은채“반쯤의상태로서로를지속”하는중이지만이어지는시들에서그간극을좁히려는시도는계속된다.화자는“너의도시”(「옮겨다놓은무대」)인“방주를그리워”하다다음날곧바로방주에서“하룻밤을보”내는가하면,“안아보”고“만져보”고“움직여보”다가“하나가여럿으로나뉘게되었”듯이“여럿이하나를이루게되었”다고확신한다.곧화자는“걸어나”가는너를“뒤따라”가너의“손을잡은채로./놓지않는다”(「곧장웃고」).“그림자그림/그림그림자”(「흔든다」)와같이결국보이지않는것을감각하고그림자를통해실체를읽어내는일은,그과정에서자꾸만흔들리는‘나’(그림)를지지해줄‘너’(그림자)를필요로하는작업과도같을것이다.

바로다음에놓인「모방했던것과비슷하게」에서는비로소흐릿했던대상이제법분명해지고,화자도‘너’와좀더가까워진듯하다.“그림과그림자가함께서있다.//그림자는그림에입체감을안긴다./그것이그림자의화법이다”로시작하는이시는“너는여러얼굴로일어난다./여러얼굴로일어난너”를기점으로위쪽과아래쪽시구들이서로대칭을이루면서전개되며,총256행의텍스트자체가대상과그에드리워진그림자를떠올리게한다.실험이마지막페이지에다다를때까지‘우리’가완벽히포개어진상태라고할순없지만마침내당도한,“우리가계속확보된”(「선회에필요한목록」)목적지에는끝나지않은실험에서“온데간데없”이“밀어낸”(「알고있는말을알게된다」)말들과긴긴여운이남아우리를기다리고있다.

멈추기위한움직임.

12분전의다리를구부린다.
33분후의허리를편다.

너는여러얼굴로일어난다.
여러얼굴로일어난너.

33분후의다리를편다.
12분전의허리를구부린다.

움직임멈추기.
―「모방했던것과비슷하게」부분

시인의말

알고있는말을알게된다.
2025년6월
김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