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의 유령

놀이터의 유령

$15.00
Description
〈문지 에크리〉는 1975년 창립 이래 ‘문학과지성 산문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국내외 유수한 작가들의 산문을 꾸준히 발간해온 문학과지성사가 2019년 여름,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새 산문 시리즈이다. 문학평론가 김현과 이광호, 시인 김혜순과 김소연의 산문으로 첫선을 보인 〈문지 에크리〉는 뒤이어 시인 신해욱과 하재연, 소설가 백민석, 시와 소설을 쓰는 이장욱과 임솔아 그리고 한강까지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하는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2023년 한 편의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으로 새 단장을 마친 〈문지 에크리〉는 영화의 스틸 컷 같은 앞표지 사진,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는 실선의 배치 등을 통해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명암을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흑백영화처럼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함으로써 작가의 사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지 에크리〉는 무엇, 즉 목적어의 자리를 빈칸으로 남겨놓는다. 작가는 마음껏 그 빈칸을 채운다. 어떤 대상도 주제도 될 수 있는 친애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독자는 장르적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문지 에크리〉 안에서 문학작품으로만 접해온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과 만나게 될 것이다.
저자

이기성

1998년 『문학과사회』에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감자의 멜랑콜리』,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백지 위의 손』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형평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아버지의 책 
코끼리
북쪽 시인 
벨트
화염의 박물관
어제의 편지
벽 속의 남자
어떤 침묵
수요일의 편지 
올페, 실패한 시인 
요즘의 이상한 날씨 
연인
멸종
나의 동물원 
놀이터의 유령 
꿈을 놓치고
너의 비밀을 보여줘
불면의 시
고아떤 삼양동 
검은 식당에서

후기 

출판사 서평

“그 시절의 기억을 지닌 채 놀이터를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이 당신에게도 있는지”

부서진 시소 한끝에 걸터앉아 놀이하며
가만한 우정을 건네는 당신 안의 유령,
시인 이기성 첫 산문집

정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삶 곳곳에 어룽진 상흔을 응시하는 시인 이기성의 첫 산문집 『놀이터의 유령』이 문학과지성사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열한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집 여섯 권과 평론집 두 권을 펴내며 꾸준히 독자와 소통해온 문학인으로서 열어 보이는 글쓰기에 대한 고백, 도시 풍경마다 스며 있는 고독과 소외, 금지되고 난파된 언어를 둘러싼 단상 등을 폭넓게 다룬 산문 20편을 묶었다.
『놀이터의 유령』에는 장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장들이 선연하게 얼크러져 있다. 시와 산문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픽션적 구성과 비평적 사유는 자유로이 연결된다. 어떤 사건의 장면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리포트 같기도, 자신의 우연한 수신인이 되어줄 상대를 찾아다니는 아주 내밀한 편지 같기도 한 이기성의 글 속에서 다층적인 문학의 언어가 태어나고, 이는 현실의 언어와 끊임없이 맞물린다. 마음껏 몽상하는 창조와 힘차게 뛰어노는 역동이 파괴된 폐허에 끝까지 남아 있을 최후의 놀이기구가 있다면, 언어를 축으로 하여 문학과 현실을 잠시간 넘나드는 시소가 아닐까.
시소는 공중을 오르내리며 “궁극적으로 부재하며 충만한 유령의 언어”(「검은 식당에서」)로 유령을 불러내 제 한쪽 끝에 앉힌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가라앉고 설핏한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릿하게 깨어나 자신만의 놀이에 침잠하는 유령. 이번 산문집의 표제로 삼은 산문 「놀이터의 유령」에서 이기성은 동료 시인 김경후의 시를 경유함으로써 이 ‘놀이터의 유령’을 만난다. “추억할 만한 슬픔도 없는데/몸의 구멍마다/이상한 울음이 자꾸 쏟아진다”(‘시인의 말’)라는 말로 첫 시집 『불쑥 내민 손』(문학과지성사, 2004)의 포문을 열었던 이기성이 “성대가 발화 기관이 아니라 울음의 기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김경후의 시에 공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놀이터의 유령」은 독자와 비평가 사이에 오가는 대화적 목소리를 빌려 김경후의 시 세계를 집중 분석 하고 있지만, 이를 비단 특정 시인 한 명에 대한 서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활짝 부풀린 커다란 성대를 가진 그녀”의 외연은 점차 “울음을 분출함으로써 슬픔에서 놓여나기보다는, 그것을 삼킴으로써 슬픔 속에 거주하기”를 택한 “유령-시인”들, 나아가 글을 읽고 쓰는 모두로 확장된다.
세상의 놀이법을 거부하고 자신의 놀이법을 따라 놀기.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기어이 참아내며 놀기. 노동하듯 성실한 태도로 놀기. 그럼으로써 쓸쓸하되 황홀해지기. 놀이터의 유령에게서 가없는 애틋함을 느끼는 이상, 이기성의 “이 외롭고 집요한 놀이-노동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요즘의 이상한 날씨」)이다.

망각의 그늘에 묻힌 빛을 되살려내는 투명한 몸
그 빛을 거쳐 또다시 찾아온 공허를 맞닥뜨리는 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