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과 공터

작약과 공터

$12.00
Description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은밀한 나비의 몸짓으로
삶의 낭떠러지에서 발견한 실존의 광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환희를 그린 허연의 여섯번째 시집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날카롭고 세련된 감수성과 짙은 여운을 남기는 파격적인 문체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시, 동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온 허연 시인이 전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여섯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2025년 올해, “시대적 징후로서 나타나는 젊은 날의 상처와 불안 속에서 시적 연륜을 쌓아가면서도 끝내 바깥에 선 아웃사이더의 냉소적 시선을 놓지 않는 시적 일관성”(심사위원 오형엽·박혜진·양순모·김언)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26회 현대시작품상을, “아름답고 경이로우면서도 슬픈 서정”(심사위원 이근배·나태주·신달자·이재무·홍용희)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3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1995년 수많은 청춘을 사로잡은 전설적인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민음사, 2014; 세계사, 1995)를 내놓았던 시인은 13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로 다시금 ‘허연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을 향해 식지 않은 반항의 열기와 냉소적이지만 연민 어린 시선이 담긴 작품으로 그를 간절히 기다리던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 ‘세속 도시를 거니는 니힐리스트’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유를 향한 뜨거운 갈망을 드러낸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차례로 선보이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시인은 여섯번째 시집인 『작약과 공터』에 이르러 시의 여음(餘音)이 진동하는 고요한 ‘공터’에 홀로 선 채 생의 비극에 온몸으로 맞서는 투지를 다진다. “보호색처럼 온몸을 슬픔의 색으로 무장하고 기꺼이 슬픔의 한가운데를 향해 섞여 들어가려는 어떤 결심”(시인 유선혜)으로, 전쟁 같은 삶에 놓인 시린 풍경을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기록한 총 66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묶었다.
저자

허연

저자:허연
시인허연은서울에서태어나1991년현대시세계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불온한검은피』『나쁜소년이서있다』『내가원하는천사』『오십미터』『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가있다.현대시작품상,정지용문학상,김종철문학상,현대문학상,한국출판학술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판교
슬퍼서숨을때는빗속에숨는거야
작약과공터
시는검고애인은웃는다
기다림의개
계절감
여름에간당신에게
산을넘는소년
Heaven
시월의시
해변정류장
지리멸렬하다는것
쓸데없는화살
가여운거리
슬픈주기1

2부
과거새
청년기
야근조와마을
우울한고원
금붕어죽이기
국경모텔
미지(未知)
사경(寫經)
심장에대해말하기
계절과기둥
권진규
엄마는타버렸다
늙은가수에게
공작도시2
혜화동1

3부
속초항
나는종탑처럼혼자였다
사월의환(幻)
강물의개인사
사막
무사하기
병가
너는좋은사람이었다
불타는열차
지하철정거장에서
베란다텃밭
스텝
이별의재해석
그날의목격
슬픔에슬픔을보탰다
어떤것들은이름을가졌다
무한루프
청력검사
소망없는나날
이명

4부
스텔라
이끼키우기
한탄강
이미너무늦은이야기
기울어가는생(生)
나이든여행
습지생태보고서
슬픈주기2
생(生)을모른척하기로한다
파도는아이를살려둔다
두근거리고싶은것이다
작약과공터2
풍경과호수
Y의해변
타버린나비

발문
나비처럼패배하는슬픔의챔피언·유선혜

출판사 서평

1991년현대시세계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해날카롭고세련된감수성과짙은여운을남기는파격적인문체로평단과독자의사랑을한몸에받으며시,동시,에세이등다양한장르를소화해온허연시인이전작『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문학과지성사,2020)이후5년만에펴내는여섯번째시집이다.시인은2025년올해,“시대적징후로서나타나는젊은날의상처와불안속에서시적연륜을쌓아가면서도끝내바깥에선아웃사이더의냉소적시선을놓지않는시적일관성”(심사위원오형엽·박혜진·양순모·김언)이라는평을받으며제26회현대시작품상을,“아름답고경이로우면서도슬픈서정”(심사위원이근배·나태주·신달자·이재무·홍용희)이라는평을받으며제37회정지용문학상을수상했다.

1995년수많은청춘을사로잡은전설적인첫시집『불온한검은피』(민음사,2014;세계사,1995)를내놓았던시인은13년이라는긴침묵을깨고두번째시집『나쁜소년이서있다』(민음사,2008)로다시금‘허연열풍’을불러일으키며,세상을향해식지않은반항의열기와냉소적이지만연민어린시선이담긴작품으로그를간절히기다리던독자들의기대에부응했다.이후‘세속도시를거니는니힐리스트’라는뚜렷한정체성을유지하면서자유를향한뜨거운갈망을드러낸시집『내가원하는천사』(문학과지성사,2012),『오십미터』(문학과지성사,2016),『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를차례로선보이며독자적인시세계를구축해왔다.

시인은여섯번째시집인『작약과공터』에이르러시의여음(餘音)이진동하는고요한‘공터’에홀로선채생의비극에온몸으로맞서는투지를다진다.“보호색처럼온몸을슬픔의색으로무장하고기꺼이슬픔의한가운데를향해섞여들어가려는어떤결심”(시인유선혜)으로,전쟁같은삶에놓인시린풍경을조심스레끌어안으며기록한총66편의시를4부로나누어묶었다.

중요한사실은전혀다른물리법칙의지배를받는두세계를동시에인식하는시인의능력이그를슬픈사람으로만든다는것이다.[……]글쎄,무엇이든좋다.그가여전히나비라면,진짜로중요한것은나비만이볼수있었던그별의존재니까.타버릴것을알면서도그를날아오르게했던‘별’말이다.
―유선혜,발문「나비처럼패배하는슬픔의챔피언」에서

끝을예감하면서그리는아름다움
사랑으로개화하는슬픈심장의역사

그가취해서불렀던노래들은다어디로가서
부질없는삶과죽음의지층으로들어갔을까

그대가죽고내가살아서그노래들을부를까
―「판교」부분

허연의시에서슬픔과고독,그로인한통증은필연적이다.화자에게삶이란마치죽음의바탕과도같아서,약간의장력으로도휘말려들어가는넝마처럼어둠에근접해있다.사랑은버림으로,솟구침은가라앉음으로,욕망은절망으로귀결된다.거기엔마땅한계기가없다.눈뜬직후육체를파고드는세상의빛과형상이주는피로감이며,그느낌은막연한가능성에존재를매달리게해삶을짓누른다.그리고이것은허연이라는한개인의숙명이자시인으로서그가갖춘생래적인감각이다.그리하여허연시의화자는“나쁜계절과나빠질계절”만을겪어왔으나오로지자신만이버틸수있는구역을만들어낸다.“슬픔에도기술이있”으므로,“통증에시달리며이구역의계절을만든다”.오로지살기위한이러한선택은세상과통하는새로운길을터,성(聖)과속(俗)이교차하는영혼의집을짓는다.“성당”(「계절감」)은시가초개인적인힘을드러내는문학적지대이면서,방황하는이들을붙들고껴안는장소다.그곳에서화자는늙은아버지,죽은애인,한시절의길고양이등저마다의사연으로“가득찼던것들”(「시월의시」)과만나고이별하며“같아지지않되/녹아드는일”[「쓸데없는화살―시작법(詩作法)」]을체험한다.그렇게“생은잠시초라해졌다가다시화색이돌기도한다”(「가여운거리」).독자는생(生)과사(死)의기묘한동일시속에서,죽음을물려받았으되각각의모습으로다시태어나는인간사를읽으며깊이매혹된다.

시집의2부와3부에서화자는새로이‘사랑’을떠올려본다.“구름에도이름을붙이는”여리고맑은딸아이의영혼을들여다보면서“아이가이기고/슬픔이지”(「과거새」)는미래를간절히바란다.여섯살아이와마주하는동안머릿속을스치는‘나’의유년의상처와“누설되지않은채/내뒷모습에남아있”(「청년기」)는쓰린흔적을지울수없지만,“청동상처럼반질반질해질때까지서로에게기댄”[「미지(未知)」]“한계절이존재했음을/그때가진경(眞境)이었음을/알려주고”(「금붕어죽이기」)싶은마음.“압도적슬픔에도불구하고”“죽으면다시죽지않는다는사실을”자각하면서,심장은다시뛰고시인은“심장에관하여말할것이라는사실을약속한다”[심장에대해말하기―시작법(詩作法)].그렇게“사막이살아나”도록“죽음의언덕에서/생을만”(「사막」)든다.언덕을미끄러져내려온허연의열차는“세상의모든혼자만의심장들”을태운채“아주진한석양”(「불타는열차」)이되어타오른다.불행속에서도“자기자신을체험”하려는시도를멈추지않음으로써매일의운명은바뀔것이다(「지하철정거장에서」).허연의시는지극한사랑의경험을통해,넘어질듯흔들려슬픔을넘어서는감각의탄생을보여준다.“눈물을기억하지만눈물에발을담그지는않”(「스텝」)겠다는결심은개인적인고통을초월해무고한존재들을향한“부디무사하여라”(「무사하기」)라는간절한기도로이어진다.“하느님을믿지않아도/하느님소리가나오듯”(「이명」)비탄으로얼룩진세상에서기댈곳이필요한쓸쓸한존재들을위해,시인은어둠한가운데고백의땅을일군다.

파도가덮치고비가내리는이상한계절
죽지않고날아오르는나비의노래

별에대해뭔가쓴다는건
어떤긴사연들과대결하는것을의미한다

스스로빛나서외로워진일들
―「타버린나비」부분

아이의노래는계속된다.4부의첫시에서읽듯“세상에없던형용사들이/순서없이등장하”는그노래는“죽을만큼설레”(「스텔라」)는감정을불러일으킨다.“사는게나은지죽는게나은지”알수없던시간에들려오던어린날의오르골소리처럼화자의고독한영혼에감겨온다.어느순간“얼굴에들어와”살아갈것을종용하는“새벽햇살”(「한탄강」)만큼서늘한것.기억속참혹한유년에아이의무구한흥얼거림이겹쳐들릴때,화자는슬픔의유전(遺傳)을막으려안간힘을쓰는투사가된다.나이가들어“믿었던이념들이모두촌극으로변해가고”(「나이든여행」)있을때조차“마을에흰눈발이날릴때”(「습지생태보고서」)어린화자를사로잡았던수치심은가슴깊은곳에서솟구쳐,세상을향한저주와복수대신‘공터’로의망명을꿈꾸게한다.그곳엔“울어서야비로소깨끗해지는하늘”이있고“어디론가나비를자꾸데려”(「타버린나비」)가려는별이있다.“힘은없지만/난생처음뭔가가된”(「슬퍼서숨을때는빗속에숨는거야」)포자가바람을타고‘공터’에닿으면,어느날엔가겹겹의사연을감춘작약이“슬프고수줍”(「작약과공터」)게핀다.기나긴장마,끝없이되풀이되는전쟁을겪은후에야“늘궁금했던인생이라는것이”보이고“당신의아름다운나라와/내끔찍한나라가/불온하게빛나”(「작약과공터2」)며이상한평화를낳는다.허연의시세계는시절과존재의교감을통한이찰나의상태를,끝내죽음의“열매에서다시싹이나오는”일,“꺼진것들을켜는일”그리고“두근거리는일”(「두근거리고싶은것이다」)로서고요한시간에매어두고삶을새롭게일으킨다.

시집의발문을쓴시인유선혜의말처럼,“허연은어쩐지조금달라졌다[……]‘잔인속의고요’를알아채는재능을가진시인은이제‘책임을진다’”.“허연의공화국은차라리눈물의다수결에휘둘리는슬픈민주공화국에가까”워그는자신의영토에서“보호색처럼온몸을슬픔의색으로무장하고기꺼이슬픔의한가운데를향해섞여들어”간다.인생이라는파도에잠겨,“나의전부가나를버려도좋”(「파도는아이를살려둔다―스텔라」)을유순한사랑을속삭이면서,허연의시는‘최후의’날갯짓으로날아오른다.

시인의말

잊지않고흐르는것들에게고함
그래도내가노을속나비라는생각

2025년10월
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