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오후의 해 (이실비 시집)

오해와 오후의 해 (이실비 시집)

$12.00
Description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쏟아지는 어둠을 비추는 사랑의 스크린
공백을 응시하며 다시 쓰는 미래
유구한 고통의 연대를 탐색하는 이실비의 첫 시집
2024년 『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실비 시인의 첫 시집 『오해와 오후의 해』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26번으로 출간되었다. 데뷔 당시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황인찬·김소연·박연준,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평)한다는 평을 받으며 평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시인은, “다양하게 충돌하는 상상의 시차를 한 공간 안에 꾸려 넣는 주목할 만한 재능”(이수명, 『시 보다 2025』 추천의 말)을 펼치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강렬한 색채 이미지와 서사 공간의 교차, 속도감 있는 시상의 전개로 요약되는 밀도 높은 구성력으로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독창적인 이미지의 변주를 선보이며 끈질긴 호흡으로 써내려간 시 50편을 총 4부로 나눠 묶었다.
저자

이실비

저자:이실비
시인이실비는2024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부드럽고낯선
물속의돌
현지인
서울늑대
멸치와낮잠
희고부드러운잠
위로
조명실
데이트
너의친구배신자
나의친구처단자
제국의멸망

2부사랑하는것들이사랑하는속력으로치고지나갔다
파손
투숙
총알
강둑
복제
외출
심해
부표
월곡
피오니
무릎

지난여름의단

3부어둠속에서얼굴을굶기고싶어
Free
free
내가아는폭력
오해와오후의해
가정
담금질
미쳤다고했다

절벽에서닭장까지
튤립축제
귀와종

4부별장에서발췌한세가지기록
택시
별장
잡지
사서
옥상
이름
마시
터널
풍차
택시
편지
편지
상속
자두
일지

해설
고통의인류학·송현지

출판사 서평

심장을태우는오해의한낮을지나
어둠의배후에서다시쓰는사랑

이것이지옥이라면

관객들의나란한뒤통수
그들에겐내가안보이겠지

그래도나는보고있다

잊지않고세어본다
―「조명실」부분

“사랑을믿는개의눈을볼때/내가느끼는건공포”라고말하는이실비의시의화자는스산한사랑의풍경을오래응시하되한자리에머물러있지않고달린다.‘사랑의고통’을조준한채시간에올라타움직이는몸을지닌이독특한화자는때로무자비하게삶을뒤흔드는비밀의정곡을찌른다.“우린개가아니니까웃지말자/대신에달리자아주빠르게”라고속삭이며,서울한복판에있기엔이질적인‘늑대’와서울에서의삶을나누고헤어진다.그들이공유한시절은가설무대위에펼쳐진비극처럼다시돌이킬수없는것이지만뇌리에짙은잔영을드리운다.늑대를떠나보내고혼자남은화자는“입을벌려개처럼웃어본다”(「서울늑대」).의도하지않은결과로서마주하는사랑의참상.거리를두던공포에휩쓸려공포그자체로존재하는‘나’는바꿔말하면사랑을겪은자,사랑을믿게된자이다.쉬지않고떡볶이를먹으면서타인의부고를전하는이의얼굴을마주하며기이한아름다움을,사랑을실감하는화자는끝을기약하며계속되는사람들의슬픔을안타까이바라본다.조명실에앉아“선명히극장내부를비추고있”는비상구등을의식하며,지옥의뒤편에서타인의뒤통수를“잊지않고세어”(「조명실」)봄으로써스스로‘살아있음’을감각한다.동시에타인역시삶속에서지옥의출구를발견하고미래에닿기를간구한다.시인의데뷔작이자시집1부에수록된두편의이인상적인시들은이실비의시세계를관통하는주제의식을선명하게보여준다.
이별과상실을거쳐고독을떠안았지만“그렇게/나를그냥”두고,세계의상태를‘보고있음(묵시)’으로받아들이는동안,화자는예상을벗어난광경을목도하기도한다.카페에서“다투기시작한”연인을주시하던화자는한사람의머리위로치켜든다른한사람의손이폭력을저지르는대신가만히“쓰다듬”(「데이트」)는것을본다.그렇게불안은어느순간환한출구로빠져나가기도한다는것을깨닫는다.그러나사랑을향한“어떤믿음은소용없이끝나버리”(「너의친구배신자」)기에,“그네가있는집에”살면서도누군가뒤에서“찌를것같”은불안에그네를타지않는친구에게“움직이지않는/아름다운실내를보여주고싶”(「나의친구처단자」)은마음또한이어진다.“병원로비에”서“다괜찮아질거라”는막연한말로어른들이서로를위로할때“엄마몰래의자사이를넘나들며즐거워”하는,혼자만의전투를치르며“조용하고확실히”(「제국의멸망」)멍드는아이들의종아리를보게되기도한다.이실비의시는이렇듯각각의존재가저마다간직한상흔을뚜렷하게감지하면서,단순한다정과위로로끝을매듭짓지않는다.
“어떤시는아침에찾아오니까어떤음악은한낮에들어야더충격적이니까충격은흐르게두어야하니까”라는시구에서읽듯,감상적인방식으로마음의어둠을표백하지않고“그것에대해아침까지궁금해하”(「파손」)는일로서이실비의시는씌어진다.답을비워둔공백은다수의고백이드나들수있는통로이면서독자가발화할수있는자리가된다.「피오니」에서“다른이와손잡을때마다가지고있던손바닥을하나씩잃어버리”는‘외계인’은,자기를상실하는과정을통해사랑의본질을배워나간다.상처를낫게하는약같기도,사랑하는이의이름같기도한작약(피오니)을놓지못한채열기가득한손으로꽃잎을거의다떨어뜨리고도“남은꽃잎남은손바닥한장씩기꺼이떨어뜨릴수있는것끼리손잡고싶었다”는고백을통해,외계인은스스로를가리켜“피오니라고”부른다.이실비의시는통제불가능한,멈출수없는사랑의속성을절묘하게포착하면서아픔을동반한존재의맞닿음을그린다.
이와동시에시인은주체의적극적인움직임(혹은이동)이가져오는변화의가능성에집중한다.사랑의미래는“두발을나란히붙이고”서는경험할수없는것이다.까만호수앞에서화자는‘당신’이물속에빨려들어갈까두려운한편,호수에“풍덩잠겨들어간”오리알을바라보며공포를느낀다.알에서깬오리들에게발목을물어뜯긴화자는“내몫의마음만아프려”“얼어버린발가락으로”자리를딛고서있는‘당신’에게“갈린무릎을호호불어가며계속”(「무릎」)나아간다.그러나화자를반기던‘당신’마저결국물속에잠기고오리떼에게발을물어뜯긴다.자기와마찬가지로발을잃었으나그결과,차가운바닥을벗어나게된‘당신’에게“어때요하나도아프지않죠?”라는‘나’의물음은사랑의소통이상호간의충만속에서이루어지는것이아니라,상대와같은위상에서고통을통감하며이루어지는것임을날카롭게짚고있다.또한2부의마지막시「지난여름의단」에서보듯,같은경험을하고도엇갈리는마음들이있고“네가자세히들여다보고싶은것을내가선택할수없다는것”을확인하는이실비시의화자는“사랑하는것들이”‘내가’사랑하는속력이아니라“나를사랑하는속력으로치고지나”가는,사랑의이기적이고잔인한일면을놓치지않는다.

폭력과얼크러진사랑의터널을
질주해도착한미완의편지

우는사람은생각했다만약바다에둥지를틀수있다면높은산에서부터하나씩모인물길들이선이되어엉키고서로를위해웅크린다면부표처럼떠다닐물의둥지마지막태양한조각을그안에넣을수있다면

태양은고맙지않을것이다
그저

천천히식어가겠지
―「오해와오후의해」부분

이실비의시는사랑이불러온어둠을탐사하면서변화무쌍하고복잡한사랑의속성을파헤친다.3부에서시인은반복되는오해와통제되는개인의자유를다양한이미지의변주로그려낸다.귀여운아기를보고“미쳤다,라고말”하는사람들의표현을해석하는‘미친사람’의사고에갇혀,미친사람의기행조차사람들이“아름다워서”“감탄한다”(「미쳤다고했다」)고착각하는‘나’의모습은독자로하여금섬뜩한기분을맛보게한다.사랑에눈먼정신은착란을일으키고세상으로부터화자를동떨어지게한다.구속과폭력을경험하며“아무렇게나뻗은가지끝마다서로다른것을가리키고있”(「가정」)고,“이해하고싶었던것들이등뒤에서서/수만개의손가락을펼치고나를밀쳐넘어뜨릴준비를”(「칠」)한다는각성이후에발견한새로운얼굴.택시를탄화자의눈에먼발치의‘마네킹’이보인다.꼼짝없이의상실에갇힌마네킹의얼굴에‘나’의얼굴이겹칠때,“세상의모든고통이이어져있다”(「귀와종」)는감각이되살아나고,자아를고정해두었던“시침핀”이후드득떨어진다.그렇게이실비의시는변화를꿈꾸며터널안으로진입한다.
4부에서화자는유년을거슬러올라간다.“언젠가창밖으로스치듯”본,“양팔을벌려아무것도걸치지않고한자리에서있을수있는것”.어린화자는‘풍차되기’를꿈꾸지만집도아닌,폭력이난무하는택시에서조차버려져동생과낯선별장에닿는다.그곳엔‘사서’가있다.“사실대로말하는것을좋아”(「옥상」)하는사서의손에길러지는동안,무수한질문으로이어지는시간을통과하며성장한다.“직접지은이름과함께”“동생과내가언젠간별장밖으로가야한다”(「이름」)는사서의뜻에따라화자는버려진택시를몰고도시를벗어난다.“이제부터아무것도/배우지않는삶을산다”는결심과헤어진엄마는“찾으러가면된다”(「터널」)는각오는단단한시적주체의탄생을예고한다.훔친편지를택시에가득실은채“가장중요한문장”을칼로지워전달하면“다음에올말을더기다릴수있”기에받는이가고마워할것이라는믿음이싹튼다.오려낸“가장상냥한문장하나가”(「일지」)편지를받는이에의해다시씌어질것을기대하며,화자는언젠가자신도편지를받게되기를바란다.지독한성장통을겪으며사랑의본질을스스로깨우친끝에,타인의빈손에몫을남긴편지를건네는이시집의움직임은애틋할만큼깊은울림을준다.
시집의해설을맡은송현지의말처럼,이실비는“타인의아픔을온전히볼수없는우리의필연적인숙명을드러내면서도,서로의고통을침범하지않으려는윤리의자리”를마련한다.고통에짓눌린화자의영혼을일으켜세운사서의‘일지’는다름아닌시(문학)일것이다.죽은이들의무덤에기대어삶을붙든존재가지옥을탈출하기까지,‘공백’이라는출구를물려주고눈물을보호한안전지대.“책이우리를지켜줄거라는믿음은누가처음시작했는지?”(「자두」).

시인의말

말과마음을환히들여다보고싶어서
한낮에종일서있었다
하지만말과마음의살가죽은까맣게그을어갈뿐
내가원하는건빛에가깝지않다는걸알았어
제대로비껴간오해가훑고간시간
아프고친밀하다
그리고다시는반복하고싶지않다

2025년10월
이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