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즐거움

천년의 즐거움

$17.00
Description
“나카모토 집안의 고귀하고도 더러운 피가
서서히 스러져가는 일은 막을 수 없었다”
폭력과 사랑, 신화와 욕정
한 가족의 숙명이 반복되는 영원의 시간
일본문학사의 가장 강렬한 목소리, 나카가미 겐지의 정수

일본 문학사에서 드물게 피차별 부락 출신임을 공개하고, 문학을 통해 ‘언어로 쓰이지 못한 일본’, 즉 주변부의 역사와 서사를 복원하고자 한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 1946~1992)의 『천년의 즐거움千年の愉樂』이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97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삶에 대한 의욕과 끈기가 부족한 나카모토 집안의 남자들. 피차별 부락 ‘로지’를 배경으로 한 여섯 편의 연작 『천년의 즐거움』은 로지의 유일한 산파 오류노 오바의 시선으로 이들의 숙명을 응시한다. 파괴적인 열정, 도둑질과 살인,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몽상까지. 삶을 불태우듯 운명에 이끌리는 이들은 아이 같은 순진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차별의 공간 ‘로지’를 신화적 문학 세계로 형상화한 나카가미 겐지는 가족 서사를 넘어,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운명의 구조를 구원하거나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무력하지만 끈질긴 생의 감각을 포착해낸다. 이 작품은 주변부의 언어로 중심을 뒤흔든 그의 문학 세계, 그리고 ‘쓰이지 못한 일본’을 증언하려는 집요한 서사의 정점이다.

저자

나카가미겐지

일본와카야마현신구시의피차별부락,일명‘로지’에서사생아로태어났다.고등학교졸업후도쿄로상경해동인작가로활동하며좌익정치운동에도참여했고,생계를위해육체노동을병행하면서도꾸준히글을써나갔다.1976년,자신의개인사를많이반영한중편소설『곶』으로아쿠타가와상을수상하며문단의주목을받았고,이듬해장편『고목탄』으로마이니치출판문화상과예술선장신인상을잇달아수상하며독보적인존재로부상했다.
스스로를“피차별부락이문자를만나처음태어난아이”라일컬은그는『천년의즐거움』『기적』등의작품을통해차별과폭력이교차하는고향로지를신화적이고은유적인문학공간으로변모시켰다.구술성과설화,신화와근대문학의해체적문체를결합해일본문학의경계를확장했으며,‘주변부의언어로중심을뒤흔든작가’라는평가를받는다.
문학을통해‘언어로쓰이지못한일본’,즉제도적언어바깥에위치한이들의역사와서사를복원하고자했던그는한국문화에도깊은관심을갖고자주서울을방문했으며,한국을배경으로한작품도다수남겼다.1992년,신장암으로46세에생을마감했으나,지금도일본현대문학사에서가장급진적이고심층적인서사실험을펼친작가로기억된다.

목차

한조의새
육도의갈림길
덴구의소나무
천인오쇠
라플라타기담
칸나카무이의날개

옮긴이해설·나카가미문학의정점,『천년의즐거움』
작가연보
기획의말

출판사 서평

“피차별부락이문자를만나처음으로태어난아이”나카가미겐지

일본사회가오랫동안보이지않게유지해온피차별부락,일명‘로지’는근대일본의제도와도시화과정속에서분리·은폐된장소였다.그곳의삶은문자가아닌구술로전승되거나침묵속에묻혀왔다.나카가미겐지는이공간에서태어나근대문학의언어를습득한최초의세대였다.다시말해그는,차별의공간이문자를통해자기자신을말하기시작한첫사례였다.『천년의즐거움』은이사실자체가하나의문학적사건임을증명하는작품이며,말해지지못했던삶들이언어를얻는순간에대한기록이다.
이소설은피차별부락을사회학적대상이나배경설명으로처리하지않는다.작품속로지는인간이태어나고욕망하며파괴되는하나의완결된세계로제시된다.로지를외부의시선으로설명하지않고내부의언어로말한그의작품은,차별의피해를입증하는증언이아니라차별속에서도사라지지않는인간의생명력을기록한서사가된다.나카가미가문학을통해이룬것은‘대변’이아니라,발화의주체를되찾는일이었다.중심부의언어가주변부를설명해온기존의문학적질서를거부하고,주변부가스스로를말하게만드는것.이러한시도는일본근대문학의중심언어—즉도시,제도,지식인,문어체로대표되는문학의언어—를근본에서흔드는방식으로기능했다.

천년의기억과욕망이흐르는곳『천년의즐거움』

작품의중심에는나카모토가문이있다.이가문의남자들은신비롭고매혹적이지만,모두요절할운명을타고난인물들이다.이는단순한가족비극이아니라,혈통과공동체라는이름아래반복되는운명의구조를드러낸다.『천년의즐거움』에등장하는인물들은사랑하고,폭력에휘말리고,도망치듯다른세계를꿈꾸다이르게죽는다.이작품의인물들은순진하면서도잔혹하고,연약하면서도짐승처럼욕망한다.이러한양가성은도덕적판단의대상이되지않는다.나카가미는이모순된생의에너지를통해,그동안포착하지못한인간의모습을드러낸다.『천년의즐거움』이불편하면서도강력한이유는독자로하여금이해나연민이아닌직면을요구하기때문이다.
이소설은오랫동안침묵속에있었던‘말해지지않은자들’의서사를복권한다.그들은단순한피해자가아니라,고통이어떻게대물림되고공동체의구조속에서내면화되며재생산되는지를몸으로살아낸존재들이다.이야기를이끄는늙은산파오류노오바는이죽음의순환을담담히증언하는구술적서술자로서,이세계의기억을엮어낸다.이점에서『천년의즐거움』은리얼리즘의외피를두르되,그내면은철저히구술적이고신화적인서사구조를지닌작품으로자리한다.

“모든것을긍정하고모든것을있는그대로축복하는일”
이야기꾼이자이야기의상징,산파오류노오바

『천년의즐거움』을관통하는화자는늙은산파오류노오바다.로지의유일한산파인그녀는아이들을받아내고,그들의삶과죽음을기억하는존재다.글을몰라기록하지않고기억하는오류노오바의목소리는문학적서술자라기보다,오랜시간축적된구술의기억그자체에가깝다.
그녀의말은연대기적으로정렬되지않는다.시간은직선이아니라원처럼반복되며,과거와현재,산자와죽은자의경계는분명히구분되지않는다.이러한서술방식은흔히‘마술적리얼리즘’이라불리지만,『천년의즐거움』에서그것은환상적장치가아니라구술세계가현실을인식하는방식에가깝다.이는일본근대소설이전제해온합리적시간관과사실주의적재현을근본에서흔든다.또한오류노오바의시선은판단하지않고,미화하지않으며,애도조차절제되어있다.이무심한지속성속에서『천년의즐거움』은일본문학을문자중심의기록문학에서기억과말의문학으로확장시킨다.
이작품은해결하려하지않는다.구원은없고,희망은선언되지않는다.폭력과죽음은반복되며,인물들은벗어날수없는계보와운명의궤적속에놓여있다.그러나죽음을이야기하는언어,고통을반복하면서도잊지않으려는이야기꾼의시선,바로그점에서『천년의즐거움』은가장절망적인이야기이자,동시에가장강한생의서사라는이중의자장을생성한다.

무엇을말하고,무엇을기억할것인가

『천년의즐거움』은식민의경험,계급의고착,주변부로밀려난삶이라는우리의문제와도깊이공명하지만,이작품을지금다시읽는이유는단순히그러한문제들을‘다루었기때문’만은아니다.독자들은이소설에서근대화의과정에서배제된공간과사람들의기억이문학으로기록되는방식을발견하게된다.
나카가미겐지는차별과폭력의원인을설명하거나해소하려하지않고,그안에서살아가는인간들의생을끝까지기록한다.문학은문제를해결하는장치가아니라,사라지지않는삶의감각을붙드는언어라는그의태도는오랫동안문학이씨름해온윤리적질문과깊이맞닿아있다.
『천년의즐거움』은여전히유효한질문을던진다.우리는어떤삶을문학으로남겨왔는가,그리고어떤삶을말하지않은채지나쳐왔는가.이소설이던지는질문은‘어떻게살아남을것인가’가아니라,‘무엇을말하고,무엇을기억할것인가’에있다.바로그지점에서이작품은특정한역사나사회를넘어,오늘의독자에게도여전히유효한문학적사유의장을열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