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총알 (이수명 시집)

정오의 총알 (이수명 시집)

$12.00
Description
“방충망을 가볍게 치니
매미는 정오의 총알처럼 솟아오른다”
세 개의 시곗바늘이 교차하는 순간
중단되는 은둔자의 놀이, 폭발하는 생(生)의 소리
세계의 표면에서 낯선 징후를 포착하는 이수명의 아홉번째 시집

시인 이수명의 아홉번째 시집 『정오의 총알』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30번으로 출간되었다. 전작 『도시가스』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개연성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는 시 50편을 총 3부에 나눠 묶었다.
목적을 상실한 행위와 소진된 주체,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평면, 인간과 사물이 구분 없이 배치된 공간,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반복되는 움직임. 이수명의 시는 줄곧 무위에 가까운 조건 속에서 세계의 표면에 머무르며, 그 위를 스쳐 지나가는 미세한 감각들을 기록해왔다. 이번 시집 『정오의 총알』은 시인이 그려온 시 세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나아가 정지와 무위의 상태를 가로지르며 출현하는 돌연한 생의 운동을 포착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세계가 정오에 이르자 감각은 급격히 전도되고, 가장 미세한 떨림이 가장 급진적인 사건으로 떠오른다.

정오는 반전의 시간이며, 최악과 최선이 겹쳐지는 시간이다.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고, 비로소 강해지는 시간이다. 정오는 관점이 전환되는 시간이다. “아무도 모르는 집”(「시인의 말」)에 은거하던 이가 외출하는 시간이다. 정오는 폭발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세계는 폭발을 앞두고 있다. 물론 우리가 기대했던 종류의 폭발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며 매달리는 희망과 가능성을 소거해버리는 폭발일 것이다.
─이희우 해설, 「반전의 시간」에서
저자

이수명

시인이수명은1965년서울에서태어나서울대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고중앙대대학원문예창작학과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1994년『작가세계』로작품활동을시작했으며,시집『새로운오독이거리를메웠다』『왜가리는왜가리놀이를한다』『붉은담장의커브』『고양이비디오를보는고양이』『언제나너무많은비들』『마치』『물류창고』『도시가스』,산문집『나는칠성슈퍼를보았다』『내가없는쓰기』『정적과소음』『흰컵의휴식』,연구서『김구용과한국현대시』,비평집『공습의시대』,시론집『횡단』『표면의시학』,번역서『낭만주의』『라캉』『데리다』『조이스』등이있다.박인환문학상,현대시작품상,노작문학상,이상시문학상,김춘수시문학상,청마문학상,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얼음만들기|최근에읽은책은무엇인가요|흰커튼|친구를만나러간다|실내화|풍뎅이|양송이수프|국립중앙도서관|이책에는|내가말을할때|말해봐말해봐말해봐그게무슨소린지|주택이끝나는곳|머릿속에서수건을꺼낸다|나무상자|하지|성묘객들은밝은옷을입는다|성탄절이이상하다|표시를할게|풀에베이지않도록|정오의총알

2부
시간관념|도마를보여줘|매미가울었다|기웃거리는사람|종이컵|오늘의자연분해|아무것도없는묵념|출장|누가나오기로했는지는모른다|이비|소년|눈이굳어지기전에|가볍게걷기|초록과조금더어두운초록과|시내로나가면어떠니|장위동으로갔다|드라이클리닝|브로콜리유튜브

3부
X|22:22|개미는그만두지않는다|서울그리고겨울|휴관|머그컵|맨발|클랙슨|노트|스노우사파이어|왜벤치에페인트를칠하나|통화

해설
반전의시간·이희우

출판사 서평

나쁜날씨,미친사람들,약해지고사라지는것들
세계의표면을관망하는무위의미학

오전에택배박스가온다.박스속에는책이들어있다.책이작은조각들로잘려있다.어떻게조각을맞춰야하는지모르겠다.

한조각을꺼내펼친다.
발을뻗는사
사람일까,사자일까,사이일까,사막일까,

어떤낱말이든너무꽉붙들면안된다.
헐렁한옷을찾아입는다.

물을마신다.숨을쉬고마시고쉬지않고마신다.깨어나서마시고깨지않고마신다.나에겐인간이없다.인간은창밖저기거리에서신속하게걷는자들이다.

그들은걸으며결코머리위를쳐다보지않는다.
위가펼쳐지지않도록

나는도무지밖으로는나가지않는
멀쩡한하루
─「스노우사파이어」부분

정오가오기전의세상은“앞이잘보이지않”으며,“어두운하늘을아무것도날지않는다”(「가볍게걷기」).오전에도착한택배박스속에는잘린책이들어있고,나는한조각을꺼내어낱말을맞춰보지만이내단념하고만다(「스노우사파이어」).“아무도모르는집”(「시인의말」)에머무르는은둔자는“얼음이/장난치면서/녹는것을//바라보”(「얼음만들기」)거나“엎드려서남은공기가타는소리를”(「주택이끝나는곳」)듣는다.벽에붙은“정체모를거미와함께연속적인호흡을하려”(「22:22」)하고,“가구를타고오르는개미”(「개미는그만두지않는다」)를바라볼뿐이다.
이처럼이수명의시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는듯한시간속에서시작된다.사건은지연되고,행위는멈추며,세계는조용히꺼져내린다.“나쁜날씨,미친사람들,약해지고사라지는것들”과같이인간의시야에잘포착되지않는세계의표면을,시인은오랜시간집요하게응시해왔다.이번시집또한관망의미학위에서전개된다.시집의해설을쓴이희우문학평론가는이러한상태를“조용해지기,은둔하기,생명력의최소화”로진단하며,그것이“세계의‘기분stimmung’을예민하게느끼고그에영향을받는”(─해설,「반전의시간」)우울증자의감각에서비롯된다고말했다.한편주체의결핍과무능함은개인의문제가아닌세계의불능에서기인한다고보았다.고장난세계에서“소방당국은산불을끄지못했”으며,“경찰은방화용의자를체포하지못했다”(「주택이끝나는곳」).비가전국적으로동시에,무표정하게내리는세상속에서(「휴관」)화자는위층사람들이싸우는소리를들으며잠에든다(「말해봐말해봐말해봐그게무슨소린지」).정오가오기전의세계는이처럼파리한적막속에놓여있다.

최악과최선이겹쳐지는반전의시간
빛의극점에서목도하는생과경외

너는비로소차분해진것인가,언제든죽은것처럼보이는것은자연스러운일이다.망에붙은벌레를떼어낼필요는없는일이다.하지만방충망을가볍게치니매미는정오의총알처럼솟아오른다.
─「정오의총알」부분

빛이가장강하고,그림자가가장짧은정오는“매미조차노래하지않는시간이다.모든것이정지하고,조용해지고,죽음에가까워”(─해설,「반전의시간」)지는순간이다.그러나세개의시곗바늘이교차하는순간은둔자의놀이는마침내중단되고생은폭발한다.약해지고사라지던것들은더는소멸의기미로만남지않는다.“방충망을가볍게치니매미는정오의총알처럼솟아오”(「정오의총알」)르고,“빛이다시켜지면나는그가뽑다만풀을뽑는다”(「하지」).
과거에시인은시쓰기를향한태도와신념에대하여“시는암흑을품는것이다.[……]우리가경외하는것은암흑쪽에있을것이기때문이다”(『횡단』,민음사,2019)라고밝힌바있다.정오의빛을응시하는순간,우리의눈은멀고가장밝은곳에서끝내암흑을마주하는아이러니가발생한다.그러나시인의시세계에서암흑은소멸이나공백이아닌,죽은듯멈춰있던것들이다시움직이고,가장미세한생의징후가폭발하는반전의시간이다.빛과암흑이공존하는정오의시간,시인은마침내암흑속경외의대상을목도한듯하다.아무것도일어나지않는세계,그러나바로그곳에서가장급진적인생이이번시집『정오의총알』로부터시작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