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김유림 시집)

탐구 (김유림 시집)

$12.00
Description
“그 길이 아닌 길을 통해서 너를 보러 갔던 기억은 없다”

우연성을 딛고 탐구하는 기억의 경로
어질러진 시공간을 헤쳐 ‘너’에게 닿는 에움길을 찾기

무성한 기억을 누비는 김유림의 네번째 시집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실험적 글쓰기로 동시대 문학장에서 독특한 자장을 일으켜온 시인 김유림의 네번째 시집 『탐구』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31번으로 출간되었다. 김유림의 시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통해 “모든 대상의 자리 없음을, 그 대상과 그 대상이 놓여 있는 자리 사이의 우연성을”(강보원 해설, 『세 개 이상의 모형』, 문학과지성사, 2020) 끈질기게 증명해왔다. 『별세계』 이후 4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는 그 제목이 지닌 ‘더듬어 구한다’라는 뜻처럼, 우연성을 딛고 대상의 본질을 좇아 나서는 76편의 시가 길을 내고 세 차례 골목을 돌며 펼쳐진다. 여기서 그가 살피려는 본질이란 사물 혹은 사태 일반의 객관적 성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억 속 존재하는 단 하나의 ‘그것’이다. 이는 무성히 얽힌 시공간을 헤쳐 건진 이미지를 언어로 붙들어보려는 시인의 간절한 손길이기도 하다. 기억의 불연속성과 불명확성을 직시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화자를 따라 시집을 누비는 일은, 차를 타고 달릴 때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는 일과 같을 것이다. 여기, “시라는 탈것에 몸을 맡기고 기묘한 속도감을”(문학평론가 김보경) 느껴보자.
저자

김유림

시인김유림은2016년현대시학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양방향』『세개이상의모형』『별세계』,소설집『갱들의어머니』,에세이『단어극장』이있다.일인출판사'말문'을운영한다.

목차

시인의말

1
그파란차|그당나귀|그염소|그구조물|그구조물|그아파트|시간|그옷|그단어|“그단어”|그입술|그음악|그영화|그전시|그바다|그바다|“그바다”|“그바다”|그식탁|그식탁|기차

2
그복도|그구조물|그피아노|그맥도날드|그이념|그언덕|그야심|그턱|그벽장|그벽장|그욕조|그사실|그기원|그아파트|그트럭|그책|그도로|그외곽|그공장단지|그공원|그푸른것|그드라이브

3
그요술|그해|그해|그해|그달|그달|그달|그전생|그영화|그손목|그역사|그광주|그실종|그약속|그꽃|그자유|그문|그욕망|그길|그풍선|그기억|그커피|그차|그길|그길|그전생|그전생|그전생|그전생|그전생|사랑|그폭력|그모자

발문
시와사랑과자동차·김보경

출판사 서평

“나는그것을알고있다,고쓴다.
그것이소중하기때문이다”
불가능성에맞서는기억의발명기

④나는뭔가를보았다.⑤나는사람이거의없는외곽도시의정경을보았다.을씨년스러운복합상가외관을보았다.⑥흔들리는나무를보았고,⑦사람이거의없는공원을보았다.⑧노래,노래를보았고,⑨들었고,⑩착각했다.⑪나는광주에간다고생각했고,광주에갔다.이윽고,버스가정차했다.
-「그광주」부분

“이것은순서처럼보이지만순서가아”니다.“순서였다면,당신에게혼란을주지않았을것이다”(「그롯데리아」).시집전반에걸쳐등장하는원번호는요소마다차례를배정하는듯하지만정작화자의발걸음은그수순이나존재에전혀얽매이지않는다.“나는③을벗고,④에서내리고,⑤를무단으로가로지르고,⑥을포기하거나아예⑧또는⑨를상상한다”(「그음악」).그렇다면어째서시인은번호를붙여말하고있을까?
미술사학자언스트곰브리치는‘경관의발명’을주장하며이렇게말했다.“알프스경관은산맥의파노라마를보여주는회화보다앞서존재한것이아니라그뒤에발견된것이다.”이는회화가프레임역할을하는창(窓)이라는미학론으로뒷받침된다.그림이전에풍경이존재할수없듯이,기억은기록을통해비로소발견되는것아닐까?그렇다면거듭밀어닥치며시야를가리는이장면들을써내는유일한방법은“단어의정렬이나번호매김”으로“유년의길을만”(「그언덕」)드는것뿐일지도모른다.기록은출발점과종착점그리고그들을잇는연속성을요하기때문이다.그렇게기억을기록으로번안하는김유림의작업은,곰브리치의표현을빌리자면‘기억의발명’이다.
시인은어떤대상에대한기억을“잘라서/납작한것으로만들”고,“그것을다시말아서”(「그전시」)시를짓는다.그러나기억에는정해진순서도연속성도없기에차례는지켜지지않는다.또한지구본을세계지도에옮길때와마찬가지로,평면화에따르는필연적변질은“①과②와③을포함한수많은항목중에서무엇이진실이고무엇이진실이아닌지는알”수없게한다.“알지못하지만······당신에게보이기위해서는그것들과내가일종의대열(隊列)을이루어야한다는사실만큼은알고있”(「그공원」)기에,시인은거듭해서이미지에번호를달고디테일을나열한다.
그렇게각각의탐구과정은기억의성질을환기한다.예컨대전혀상관없는두대상을한곳에수렴시키는자력(“‘사모바르’를좋아하기에겨울이면그것을떠올릴수밖에없고,그러나겨울이면그옷또한떠올릴수밖에없기에여기에함께/나란히둔다,「그옷」),프루스트의마들렌처럼특정대상으로온갖장면을범람하게만드는기폭성(“창밖은내어린시절.내아파트.내창고.내창고의자물쇠.그밖의내것”,「기차」),미래의시공간을호출하는힘(“그바다로가기위해속초시내의작은횡단보도를건너흰색으로칠한콘크리트벽으로향할때,‘나’는이미그바다를본것이나다름없을것이다.그바다는”“그벽위에서일렁이고있을것이다”,「그바다」,p.57)이있음을.삶의속도로스쳐지나가는기억을“잘보이지않는것처럼의방식으로만”볼수밖에없는운명아래서도시인은“그것을붙들”어“길고,안정적”인“풍경”(「그외곽」)을우리에게보인다.기억의운용법을다채롭게선보이는시집은기어코당신의우물에도마중물을붓는다.차창너머로몰려드는풍경처럼기억이흘러넘친다해도,부디놀라지말길.


흩어지고뭉개지는기억속에팔을뻗어
‘너’의손을붙잡기위한이모든“탐구”

난내게가장생생한실감(의측면)을이용해①과②와③을끌어당겨서한데묶으려고시도하지만,잘되지않는다.그런데그것-한데묶이지않으면서도한데몰려다님-이바로염소라는개체의특징이라는걸나중에알게되면서그런시도는더는하지않아도좋게된다.이것이바로통합이고,끝인것이다.예컨대,나는그저그중그때그때가장사랑하는염소를생각하면되는것이다.여기서말이다.
-「그염소」부분

거듭되는탐구는피할수없는모순을드러낸다.‘그것’들은어떻게같은것으로묶이는가.그러나왜결코두번다시같아질수없는가.화자는“여태지나쳐온모든차를떠올린다,지나쳐간모든차도.그러나그들은너무많아서하나이지않다.하나가아니다”(「그파란차」).어제본차가다르고,오늘본차가다르기때문이다.그러나영화에등장했던차와미술관에서관람한영상물속차는기억속에서늘한자리에놓이고만다.“①과②는스스로,알아서,뒤엉킨것이다.누가/먼저랄것도없이,/그/음악으로”(「그음악」).때로그들은별개고,때로그들은하나다.이모순을어떻게헤아려야하는가?
시인은그답을선취한듯하다.그는두번째시「그염소」에서부터“그것-한데묶이지않으면서도한데몰려다님-이바로염소라는개체의특징이라는걸”깨달으며“나는그저그중그때그때가장사랑하는염소를생각하면”된다고안도한다.하여우리는이시집을시인이“여태지나쳐온모든”대상의모습중에“그때그때가장사랑하는”이미지를떠올리는과정의집약체로읽을수있다.사랑하기,그것은곧차별하는일이다.김유림의시에서는한데묶이려는일반성을무릅쓰고기억속고유한‘그것’의이름을달리발음해보려는시도를가리킬것이다.“그것은그것이기에소중하다”(‘시인의말’)는마음으로,“그푸른것은그푸른것과다르지않고”“푸른것과같지도않”음을알지만“푸른것을푸른것이라”(「그푸른것」)고만불러보는일.
무수한불가능성속에서도기억을톺아내려는실험은곧‘나’를찾으려는고투와같다.한영화가말했듯‘기억이환상과동의어일지라도인간은기억으로살아가는존재’이기때문이다.“나는나의환상”(「그공원」)이라는시구를‘나는나의기억’이라는말로읽을때,“환상이사실을증식하듯증식하는경로를따라가는경험”이라는문학평론가김보경의문장은『탐구』에대한독해를넘어살아가는일전반을일컫게될터이다.그런한편,갖은기억을집어들고살피던와중에도시인은‘너’를발견하는즉시“달려가면서재빨리그것들을어두운옷주머니에쑤셔넣을”각오를한다.“두손으로”너를“안을수있도록말이다”(「그기원」).평단에서빈번히짚어왔듯김유림의시세계를추동해온유구한힘은‘그리움’이다.이번시집에서도시인은어김없이“오랫동안너를그리워”하며,기억을더듬어발견해낸‘나’를“지켜보고웃는이가있다면그게너였으면좋겠다고생각”(「그구조물」)한다.“늘그주변을얼쩡거”리는그의서성거림은“늘그곳에가고싶”(「그맥도날드」)어서“너에게로가는유일한통로”(「그언덕」)를찾으려는마음의구현이다.그리하여결국이모든탐구의목적은‘나’를거쳐,그리워마지않는“너를만나러”(「그벽장」)가기위한것이다.그끝에존재하는“너의손을잡”(뒤표지글)으러.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