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연구의전기를마련한최고의고전으로평가받는필리프르죈의『자서전의규약』완역개정판이30년만에문학과지성사에서출간되었다.이번개정판은1998년한국어판에생략되었던미셸레리스에대한장(「미셸레리스,자서전과시」)과프랑스어개정판발문을새롭게수록하고기존번역을수정보완해르죈의사유를처음으로완전한모습으로소개한다.
자기자신에대해쓰고말하는것이일상이된오늘날,동시대문학은자서전을넘어오토픽션,자기이론,사회학적자기서사에이르기까지사실과허구,경험과이론,고백과비평의경계를가로지르며자기서술의형식을끊임없이탐구하며갱신해가고있다.그런데우리는어떤텍스트를실제삶에대한기록으로,또는문학으로받아들이는가.또한자기서술적문학의가치는어디서오는가.
『자서전의규약』은바로이러한물음에답하는책으로,이후자기서사를둘러싼거의모든논의의출발점이되고있다.
르죈은자서전을“실제인물이자기자신의존재를소재로하여산문으로쓴회고적이야기로,개인적인삶,특히자신의인성의역사에주목”하는글로정의하고,저자,화자,주인공의동일성을바탕으로독자와체결하는‘자서전의규약’개념을제시한다.독자는이암묵적인약속을바탕으로텍스트를허구가아니라한인간이자신의삶을증언하는글로읽게된다.그러나르죈의관심은자서전이라는장르의경계를확정하는데있지않다.그가제시한정의는특정한역사적시기에형성된하나의모델로,장르는시대마다저자와독자사이에서맺어지는관계속에서변화한다.『자서전의규약』은자서전과소설,사실과허구가맞닿는경계에서하나의텍스트가어떻게실제삶의이야기로읽히는지,자서전이라는장르가어떤조건과약속위에서성립하고변화하는지를탐구한다.
자서전은어떻게하나의약속이되는가?:장-자크루소
“자서전의고백은진정한수신자들을제외한모든사람이읽는편지다”
이책은자서전에관한이론적,역사적탐구에더해,개별작품에대한집요할정도로정교한독해를전개해나간다.그중에서도루소의『고백록』에대한분석은자서전의규약이어떻게탄생하는지보여주는가장핵심적인장으로,르죈은루소의『고백록』을최초의근대적자서전으로간주한다.『고백록』은“완전히자연그대로,그리고온전한진실속에서그려진유일한인간의초상”“전에도결코예가없었고앞으로도그성취를모방할사람이전혀없을기획”이라는유명한문장으로시작한다.이는자신의‘이름’아래자신의삶에대해말하겠다는공적인선언이자,저자와독자사이에맺어지는근대자서전의규약의원형을보여준다.
『고백록』에서루소는어린시절의성적각성,절도사건,욕망과죄책감이얽힌기억등내밀하고수치스러운이야기를과감하게드러냄으로써당대에큰충격과논란을불러일으켰다.그러나르죈에게중요한것은고백의내용,즉사건의진실여부가아니라고백이라는행위자체이다.그는루소의고백을과오를지우는행위가아니라동일한행위를되풀이하는시도,다시말해“욕망의우회적인표현”으로읽는다.르죈에게자서전의핵심은과거를있는그대로복원하는데있지않다.과거는단순히회상되는것이아니라현재의글쓰기안에서다시말해지고다시수행된다.
자전적공간:앙드레지드
“결국행복한자서전작가도있다는사실을받아들여야한다”
루소가자서전의규약을확립했다면,앙드레지드는그규약이어떻게변형되고확장되는지를보여준다.르죈은지드를통해‘자전적공간’이라는중요한개념을제시한다.진실은작품바깥에존재하는삶을충실히재현함으로써드러나는것이아니라,자서전,소설,일기,편지등서로다른글쓰기들이서로를비추며만들어내는긴장과대화속에서생산된다.르죈은“자전적공간의구축자체가이미독서이며독자는그것을되풀이할뿐”이라고말한다.
르죈이특히주목하는것은지드의삭제와침묵의글쓰기이다.그는지드의문체를“삭제를문체화하는작업”이라고부른다.지드는모든것을고백하려하지않는다.오히려말하지않은것,건너뛴것,아껴둔것이텍스트안에서의미를만들어내도록한다.“그가텍스트에서벗겨낸모든것이그텍스트안에포함된다.”따라서지드를읽는독자에게요구되는것은숨겨진비밀을폭로하는일이아니라,“건너뛴생각들”을복원하고“정교한모호성”을읽어내는일이다.
철학이론과자기서술의변증법적융합:장-폴사르트르
“『말』은자서전인동시에팸플릿이라할수있는투쟁적작품”
사르트르의『말』을분석하는장에서는자서전의시간구조가새롭게분석된다.르죈에따르면『말』은단순한유년기의회고록이아니다.그는성인이된사르트르가어린시절을하나의이야기로조직하는방식에주목한다.『말』은겉으로는연대기적질서를따르는듯보이지만실제로는“변증법적질서”에따라조직된다.독자는연대기를읽는다고생각하지만,어느순간의미에논리에이끌리는“함정”속으로빨려들어가게된다.
르죈은『말』이어린시절을한인간의“근본적기획projet”을드러내는이야기로재구성한다고본다.어린사르트르는훗날의철학자를예고하는존재가아니라,오히려현재의사르트르가자신의과거를해석하고배열하는과정에서비로소하나의인물로구성된다.이때『말』은작가가어떻게탄생했는지를기록한이야기가아니라,어린시절자신을지배했던‘문학이라는환상’을성인이된사르트르가해체하는비판적서사가된다.르죈은『말』을“형식자체를통하여한삶을총체화하는데성공한유일한작품”으로평가하며,“철학적담론과서술이라는두가지양태가하나의형식속에완벽하게융합되어종합을이룬다”고본다.
시와자서전의경계:미셸레리스
“글쓰기는미래쪽으로돌아섰고,게임은계속다시시작되어야한다”
이번에처음로소개되는미셸레리스장은르죈이자신이정립한자서전이론을스스로시험대에올리는대담한글이다.『성년』부터『게임의규칙』연작에이르기까지,모든작품이보기드물게하나의자서전을이루는레리스는,자서전을완성된삶의기록이아니라끊임없이다시시작되는자기탐색으로변모시켰다.르죈은‘시와자서전은어떻게만날수있는가’라는질문에서출발하여,레리스의작품을통해자서전을안전한자리에서행해지는사실의기록이아니라삶을걸고자신을탐구하는시적실천으로다시읽어낸다.르죈은레리스의글쓰기에서여러경험과자료를병치하는콜라주방식과의미를해석하고주석을다는작업이어떻게긴장관계속에서공존하며,『게임의규칙』에이르러‘땋기(tressage)’라는구성원리로드러나는지를추적한다.레리스에게땋기란서로다른경험과기억을하나의의미로통합하는방식이아니라,자신을이해하려는해석의힘과끝내해명될수없는자신의잔여를보존하려는힘을동시에작동시키는글쓰기의방식이다.자신을붙잡으려는시도가실패하는지점에서오히려자기자신과더진실한관계에도달한다.말하자면그의글쓰기는“지는사람이이기는게임”이라는역설위에놓여있는것이다.
레리스는루소가확립한자서전의규약을받아들이면서도,그규약이끝내해결할수없는문제를내부에서가장치열하게드러냈다.오토픽션과자기이론등자기서사의새로운형식들이활발히실험되는오늘날,그의글쓰기가제기하는문제의식은더욱첨예한의미를갖는다.
『자서전의규약』은자서전에대한유명한정의와규약개념을제시한책으로널리알려져있지만,이책의진정한성취는자서전을하나의고정된규범으로정의하는데있지않다.르죈은오히려자서전을가능하게하는조건과독자와의관계,자기서술이성립하는방식을밝힘으로써장르에대한논의를더욱풍부하게만들었다.이후그는무명의사람들이남긴자서전과일기,자서전아카이브,인터넷상의자기기록까지연구대상을확장하며,누가자신의삶을기록하는지,우리는어떤약속을바탕으로그기록을읽는지를계속해서연구해나갔다르죈에게자서전은위대한작가들만이쓸권리를부여받은장르가아니었다.이름없는개인이자신의삶을기록하는행위역시하나의자기서술이며,그기록이타인과어떻게관계맺고의미를획득하는지밝히는일은그의평생의과제였다.
오늘날자기자신에대해말하고쓰는일은더이상특별한사건이아니다.누구나자기자신의저자가된시대에,자서전이란무엇인가를둘러싼르죈의문제의식은오히려더욱현재적인의미를갖는다.그것은우리가매일무심코수행하는‘자기에대해쓰기’라는행위가어떤약속위에서이루어지는지,그리고그것이어떤문학적가능성과한계를품고있는지를다시생각하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