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세상은 대체로 평온하다 어디가
아픈가? 물으면
발광할 것이다”
눈감기엔 선연하고 직면하기엔 역겨운 이 사회의 중체(重體)
청진기를 타고 증폭되는 사물사물한 속울음 소리
과거완료의 환부와 현재진행의 유혈을
집요히 들여다보는 시인 정한아의 세번째 시집
2006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한아의 세번째 시집 『보호 관찰』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39번으로 출간되었다. 직전 시집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8여 년간 차근하고 꾸준한 호흡으로 써 내려온 시 57편을 한데 묶었다.
“자연은 서슴없”고, 그보다 더 “서슴없는”[「겨울, 장릉(章陵) 근처」] 인간 사회의 “삶은 달걀”과도 같아서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되지만//사이다는 안 준다/무릎을 꿇기 전까지는”(「시장의 윤리」). 이러한 삶의 성질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은 “신을 발명하고/부록처럼 천국과 지옥을 발명하고/그러고도 찜찜해/보험처럼 부활도 발명했”지만, 세계는 “웃기시네, 이 모든 것을 비웃”(「조롱박 하느님」)듯 “끔찍함을/보고 배우고 실천하는 끔찍한 삶”(「스키드 마크」)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한번 “생각하면 끝없이 생각이 나” 눈길이 “떨어지지 않”(「먼지」)지만 제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구출하기엔 너무 징그러”(「그건 그거 이건 이거」)운 것. “문명 속에서의 삶이란 그런/것”(「스키드 마크」)이다. 개입도 감당도 불가한 지경에 다다른 볼썽사나운 이 사회에서 개인의 최선이란 부조리와 불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를 “장기적으로 면밀히 관찰하”(「[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고자 하는 반항 어린 결단이리라.
“솟아오르고 떨어지면서/가만히 끓고 있”(「야곱의 사다리―기형도 시인에게」)는 ‘보호 관찰자’로서 시인은 “변명”과도 같은 “이 글쓰기야말로 가장 끔찍”(「스키드 마크」)하다고 느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의 1할만 하는데 사람들이 자주 놀라서 가급적 말을 줄이려”(「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하면서도 “자꾸 아픈 이를 흔들어보고 싶어 하고, 무례하게 벽에서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뛰어다니려 하고, 내 삶의 과속방지턱에서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바퀴처럼 덜컹거리려고 한다”(산문 「이 거대한 병동에서」). “이것이 임사 체험이며, 최악이라고 생각할 때조차/다 쓴 치약처럼 아직” 남아 있는 “쥐어짤 것이”(「죽은 것처럼 보이는 포인세티아에 관하여」) 바로 정한아의 시심(詩心)이다. 시집 속 문장들은 종종 “정말로 읽히지 않으려고 완강히 애를 쓰며 달아”날지도 모르지만, 이는 곧 그의 시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나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미래의 당신”도 “적당히 힘을 주어 펼치는 정도의 노력은”(「새」) 기울여주기를.
“가슴을 함부로 열어선 안 돼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 의외로 싱싱하거든”
길길이 날뛰려는 질문들을 애써 붙드는 심장
“말없음병, 일명 냉가슴”(「[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정한아의 두번째 시집 『울프 노트』에 수록된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발생 첫날 병조림 인간의 기록」에 따르면 냉가슴은 새들 사이에서 처음 발병하였다. 이때 최초의 감염 대상이 “무구한 채로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압사당하느라 영혼의 순결함을 훼손당할 조금의 틈도 누리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나아가 인간의 집성체인 사회에 의해 영혼 자체이기만을 강요당하는” ‘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며, 그러한 새들로부터 기인하였으므로 냉가슴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리라”(이은지 해설, 「감염의 시대를 건너는 법」)는 추론이 가능하다. 단순히 “심리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질환이라기보다는 선택되고 고안된 것에 가까운 사회적 병증. 고로 냉가슴 뒤에 덧붙기에 적절한 표현은 발병이 아닌 ‘발명’일지 모른다.
[……] 실제로는 말할 수 없는 이가 원통하고 억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복잡한 감정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냉가슴이라는 병증에 취약해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적어도 반의식적으로 냉가슴 감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냉가슴 감염자들이 내면적으로 몹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완전히 반대일 수 있습니다. [……]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는 드문 동종요법원리 연구자인 조림 씨는 현재 느리게 확산 중인 냉가슴이 감염 과정에서 몇 차례의 변이를 겪은 변종으로서 침묵 상태처럼 보이는 ‘침체기’를 지나 갑작스럽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열가슴’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진실의 입’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입은 이해타산에 대한 판단이 불가한 상태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진심이 제어되지 않고 발설되는 단계를 이른다. 이 같은 상태에 이르면 발병자 본인과 주변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
―「[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부분
이번 시집 『보호 관찰』에 이르러 “철새 등의 감염경로를 따라” 확산 중인 이 “인수공통전염병”의 이름은 차가운[冷] 심장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만약’이라는 냉매가 임대료 없이 지내”(「냉동고」)는 가슴을 가득히 채운 “의문형 종결어미”(「현대 시 연구」)들은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으면 공격적이 되는”(「[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서히 얼려진다.
한편 냉가슴은 차게 식어 가라앉은 방어기제가 아니라 일촉즉발로 달아오른 시한폭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침묵에 싹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썩으려”(「안녕 인터체인지」)고 들지언정 “끝까지 자기 자신을 취소하지는 않”(「취소할 수 없는 것」)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슴속을 “파내면 파낼수록 난감해지는”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보호 관찰―당신의 뒤뜰」)은 “너무 뜨거워/응결해도 도무지 식을 줄을 모”(「뜨거운 밤비」)르고, 냉가슴 감염자의 주변인들은 얼핏 꽝꽝 얼어붙은 듯 보이는 그의 심장을 “집다가 앗 뜨거 소리치고 한바탕 자지러진”(「박각시나방이 가르쳐준 것」)다.
“다들 너무 살아 있는 티를 내려 하”[「은자(隱者)」]여 시끄러운 세상에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슬픔에 관해서는/입을 다물기로”(「유리딱새가 답해주지 않은 것」) 하는 태도가, “때때로 입을 닥치고 있고 싶”은 이 마음이 “과연 정말로 질병”(「[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일까? “모두 고독하고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병이라지만, 감염된 “사람들의 얼굴을/이렇게/언제까지나 몰라도 되는 것일까”(「뜨거운 밤비」)? “자꾸만 침묵 쪽으로 빨려 들어가”[「경야(經夜)」]는 죽음의 모습을 거듭 목도하면서, 그렇게 “죽음과 묵음을/헷갈리면서”(「박각시나방이 가르쳐준 것」) 소극적인 조치로 일관해도 괜찮을까? 아직 냉가슴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입을 닫고 있을 때와/입을 열었을 때는”(「처음 본 사람」) 많이 다르리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할 것이다. “단도가 직입하면 치명적”(「냉동고」)인 법이므로.
“시가 이런 모든 것과 다른
무언가를 하기 때문에”
갇혀 있던 물음표들을 풀어놓으며 생동하는 시
나에게는 아들도 딸도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도 손녀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늙어갈 것이다
고즈넉한 아침과 저녁을 어떻게 백치가 되지 않고 건널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제 글이 제 자식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을 퇴고하면서 제 자식을 개자식으로 읽었다는 건 비밀)
[……]
40년 동안 아무도 대출하지 않은 책
우연히 발견한 책
따뜻하고 정직하고 섬세한 책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고 정말 거의 아무도 모르는 책
그의 장편소설을 다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얇은 책
그의 인생을 시시콜콜 알지 못해도 그를 알 것 같은 책
만나서 반가웠어요 느꺼운 마음으로 헤어지고도
가슴에 옹이처럼 박힐 책
그런 옹이들을 수없이 지니고 나는 없을 것이다
―「시가 하는 일」 부분
나는 분명 문학의 첫번째 기능이 치유나 위로라는 대중적 믿음에 지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엄청난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시의 목적이 치유나 위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하여간 그게 무엇이든 시에 목적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시는 치유와 위로의 힘을 발휘한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산문 「이 거대한 병동에서」에서
잔혹과 냉담과 침묵이 만연한, “모든 바깥이 촘촘하게/민주적으로 유혹적으로 금지되는”(「보호 관찰―자살 예방 교육」) 이 세계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질문이 비어져 나온다. “시는 공허하고 분노에 찬 어린아이가 살인자로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보편의 대답을 내놓기는 어렵지만 “공허하고 분노에 찬 어린아이”(「보호 관찰」)였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는 있을 것이고, 정한아는 이윽고 이렇게 답한다. “책이 아니었으면 나는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시가 하는 일」). 그렇게 살의는 가로막혔으나 “염통 같은 시를 쓰고 싶어 미치겠지만 미치기만 하”(「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는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여전히 그는 괴로워 보이므로, 이 문답은 다시 “시 안 쓰고 안 괴로우면 되잖아/[……]/그런데 왜”(「현대 시 연구」)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간다. “무수했던 백지 앞의 공포/눈앞이 캄캄한 마감일 편집자의 전화/익명의 독자들이 남긴 혹평/얇은 책 한 권 분량의 시가 만들어지기까지 겪어야 했던/이상하고 무서운 일들”이 표상하는 시 쓰기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시인은 왜 “아무도 대출하지 않을 시집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되”(「시가 하는 일」)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한층 더 까다롭게 다가오는 까닭은, 어떠한 바를 느끼거나 겪은 누군가의 시 읽기 경험을 들추어보아도 이는 그야말로 내밀한 영역이므로 “영영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렷하게 언어화되거나 입증되지는 못하여도 “그토록 물질적이고 구체적인”(「새」), “보이지 않지만 안 보이지도 않는”(「먼지」), 무언가라고밖에 일컬을 수 없는 ‘무언가’는 분명 실존한다. 고로 이번 문답은 다음의 대답으로 매듭지어진다. “시가 무언가”를, “생생한 허구와 구별되지 않지”만 진정 허구는 아닌 그 “무언가를 하기 때문”이라고. 이 모호하지만 적확한 응답 앞에서 꿈틀, “거짓말처럼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함께 움직”(「시가 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나마 그래서”(「현대 시 연구」) 오늘도 살아 있다.
■ 시인의 말
아빠하고 동생하고 만든 5월의 꽃밭에서
바람도 햇빛도 참 좋았어요.
우리 셋은 모두 울었지만요.
슬픔을 녹이면 삶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요, 아빠.
나의 시간은 자주
나를 커다란 맨발로 밟고 갔어요.
가끔은 어깨빵을 하고선 뒤돌아 눈빛으로 물었지요.
뭐? 왜?
아빠의 책장에서 아빠가 처음 내게 꺼내어 준 책
거기 씌어져 있던 영원한 평화를 구상했던 철학자는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 같아요.
그는 결혼도 이혼도 여행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하나같이 심각한 책을 썼지만
사실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아빠가 송아지처럼 슬픈 눈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빠에게 물려받은 신파를 들킬까 두려워요.
평화는 시간이, 기억이 없는 곳에 있겠지요.
하지만 신기하지요?
해마다 그 꽃밭에 봄이 오는 게.
시간이, 기억이 없는 곳에 그런 신기는 없겠지요.
저는 지금, 아빠가 일요일마다 미사를 다녀와
밀짚모자를 쓰고
동생이 심고 간 꽃을 돌보는 동안
아빠가 필사적으로 일구는 평화를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던 시들을 모아
책을 엮으면서요.
괜찮아요.
결국엔 모든 게 괜찮았어요.
2026년 8월
정한아
■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악몽은 침대 위에 시체처럼 쌓이는데
균형!
균형!
균형에 대한 강박 때문에 나는 방사형으로 찢어진다.
아픈가? 물으면
발광할 것이다”
눈감기엔 선연하고 직면하기엔 역겨운 이 사회의 중체(重體)
청진기를 타고 증폭되는 사물사물한 속울음 소리
과거완료의 환부와 현재진행의 유혈을
집요히 들여다보는 시인 정한아의 세번째 시집
2006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한아의 세번째 시집 『보호 관찰』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39번으로 출간되었다. 직전 시집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8여 년간 차근하고 꾸준한 호흡으로 써 내려온 시 57편을 한데 묶었다.
“자연은 서슴없”고, 그보다 더 “서슴없는”[「겨울, 장릉(章陵) 근처」] 인간 사회의 “삶은 달걀”과도 같아서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되지만//사이다는 안 준다/무릎을 꿇기 전까지는”(「시장의 윤리」). 이러한 삶의 성질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은 “신을 발명하고/부록처럼 천국과 지옥을 발명하고/그러고도 찜찜해/보험처럼 부활도 발명했”지만, 세계는 “웃기시네, 이 모든 것을 비웃”(「조롱박 하느님」)듯 “끔찍함을/보고 배우고 실천하는 끔찍한 삶”(「스키드 마크」)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한번 “생각하면 끝없이 생각이 나” 눈길이 “떨어지지 않”(「먼지」)지만 제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구출하기엔 너무 징그러”(「그건 그거 이건 이거」)운 것. “문명 속에서의 삶이란 그런/것”(「스키드 마크」)이다. 개입도 감당도 불가한 지경에 다다른 볼썽사나운 이 사회에서 개인의 최선이란 부조리와 불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를 “장기적으로 면밀히 관찰하”(「[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고자 하는 반항 어린 결단이리라.
“솟아오르고 떨어지면서/가만히 끓고 있”(「야곱의 사다리―기형도 시인에게」)는 ‘보호 관찰자’로서 시인은 “변명”과도 같은 “이 글쓰기야말로 가장 끔찍”(「스키드 마크」)하다고 느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의 1할만 하는데 사람들이 자주 놀라서 가급적 말을 줄이려”(「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하면서도 “자꾸 아픈 이를 흔들어보고 싶어 하고, 무례하게 벽에서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뛰어다니려 하고, 내 삶의 과속방지턱에서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바퀴처럼 덜컹거리려고 한다”(산문 「이 거대한 병동에서」). “이것이 임사 체험이며, 최악이라고 생각할 때조차/다 쓴 치약처럼 아직” 남아 있는 “쥐어짤 것이”(「죽은 것처럼 보이는 포인세티아에 관하여」) 바로 정한아의 시심(詩心)이다. 시집 속 문장들은 종종 “정말로 읽히지 않으려고 완강히 애를 쓰며 달아”날지도 모르지만, 이는 곧 그의 시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나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미래의 당신”도 “적당히 힘을 주어 펼치는 정도의 노력은”(「새」) 기울여주기를.
“가슴을 함부로 열어선 안 돼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 의외로 싱싱하거든”
길길이 날뛰려는 질문들을 애써 붙드는 심장
“말없음병, 일명 냉가슴”(「[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정한아의 두번째 시집 『울프 노트』에 수록된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발생 첫날 병조림 인간의 기록」에 따르면 냉가슴은 새들 사이에서 처음 발병하였다. 이때 최초의 감염 대상이 “무구한 채로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압사당하느라 영혼의 순결함을 훼손당할 조금의 틈도 누리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나아가 인간의 집성체인 사회에 의해 영혼 자체이기만을 강요당하는” ‘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며, 그러한 새들로부터 기인하였으므로 냉가슴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리라”(이은지 해설, 「감염의 시대를 건너는 법」)는 추론이 가능하다. 단순히 “심리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질환이라기보다는 선택되고 고안된 것에 가까운 사회적 병증. 고로 냉가슴 뒤에 덧붙기에 적절한 표현은 발병이 아닌 ‘발명’일지 모른다.
[……] 실제로는 말할 수 없는 이가 원통하고 억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복잡한 감정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냉가슴이라는 병증에 취약해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적어도 반의식적으로 냉가슴 감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냉가슴 감염자들이 내면적으로 몹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완전히 반대일 수 있습니다. [……]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는 드문 동종요법원리 연구자인 조림 씨는 현재 느리게 확산 중인 냉가슴이 감염 과정에서 몇 차례의 변이를 겪은 변종으로서 침묵 상태처럼 보이는 ‘침체기’를 지나 갑작스럽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열가슴’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진실의 입’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입은 이해타산에 대한 판단이 불가한 상태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진심이 제어되지 않고 발설되는 단계를 이른다. 이 같은 상태에 이르면 발병자 본인과 주변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
―「[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부분
이번 시집 『보호 관찰』에 이르러 “철새 등의 감염경로를 따라” 확산 중인 이 “인수공통전염병”의 이름은 차가운[冷] 심장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만약’이라는 냉매가 임대료 없이 지내”(「냉동고」)는 가슴을 가득히 채운 “의문형 종결어미”(「현대 시 연구」)들은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으면 공격적이 되는”(「[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서히 얼려진다.
한편 냉가슴은 차게 식어 가라앉은 방어기제가 아니라 일촉즉발로 달아오른 시한폭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침묵에 싹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썩으려”(「안녕 인터체인지」)고 들지언정 “끝까지 자기 자신을 취소하지는 않”(「취소할 수 없는 것」)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슴속을 “파내면 파낼수록 난감해지는”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보호 관찰―당신의 뒤뜰」)은 “너무 뜨거워/응결해도 도무지 식을 줄을 모”(「뜨거운 밤비」)르고, 냉가슴 감염자의 주변인들은 얼핏 꽝꽝 얼어붙은 듯 보이는 그의 심장을 “집다가 앗 뜨거 소리치고 한바탕 자지러진”(「박각시나방이 가르쳐준 것」)다.
“다들 너무 살아 있는 티를 내려 하”[「은자(隱者)」]여 시끄러운 세상에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슬픔에 관해서는/입을 다물기로”(「유리딱새가 답해주지 않은 것」) 하는 태도가, “때때로 입을 닥치고 있고 싶”은 이 마음이 “과연 정말로 질병”(「[기획] 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침묵을 둘러싼 논란」)일까? “모두 고독하고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병이라지만, 감염된 “사람들의 얼굴을/이렇게/언제까지나 몰라도 되는 것일까”(「뜨거운 밤비」)? “자꾸만 침묵 쪽으로 빨려 들어가”[「경야(經夜)」]는 죽음의 모습을 거듭 목도하면서, 그렇게 “죽음과 묵음을/헷갈리면서”(「박각시나방이 가르쳐준 것」) 소극적인 조치로 일관해도 괜찮을까? 아직 냉가슴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입을 닫고 있을 때와/입을 열었을 때는”(「처음 본 사람」) 많이 다르리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할 것이다. “단도가 직입하면 치명적”(「냉동고」)인 법이므로.
“시가 이런 모든 것과 다른
무언가를 하기 때문에”
갇혀 있던 물음표들을 풀어놓으며 생동하는 시
나에게는 아들도 딸도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도 손녀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늙어갈 것이다
고즈넉한 아침과 저녁을 어떻게 백치가 되지 않고 건널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제 글이 제 자식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을 퇴고하면서 제 자식을 개자식으로 읽었다는 건 비밀)
[……]
40년 동안 아무도 대출하지 않은 책
우연히 발견한 책
따뜻하고 정직하고 섬세한 책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고 정말 거의 아무도 모르는 책
그의 장편소설을 다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얇은 책
그의 인생을 시시콜콜 알지 못해도 그를 알 것 같은 책
만나서 반가웠어요 느꺼운 마음으로 헤어지고도
가슴에 옹이처럼 박힐 책
그런 옹이들을 수없이 지니고 나는 없을 것이다
―「시가 하는 일」 부분
나는 분명 문학의 첫번째 기능이 치유나 위로라는 대중적 믿음에 지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엄청난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시의 목적이 치유나 위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하여간 그게 무엇이든 시에 목적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시는 치유와 위로의 힘을 발휘한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산문 「이 거대한 병동에서」에서
잔혹과 냉담과 침묵이 만연한, “모든 바깥이 촘촘하게/민주적으로 유혹적으로 금지되는”(「보호 관찰―자살 예방 교육」) 이 세계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질문이 비어져 나온다. “시는 공허하고 분노에 찬 어린아이가 살인자로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보편의 대답을 내놓기는 어렵지만 “공허하고 분노에 찬 어린아이”(「보호 관찰」)였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는 있을 것이고, 정한아는 이윽고 이렇게 답한다. “책이 아니었으면 나는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시가 하는 일」). 그렇게 살의는 가로막혔으나 “염통 같은 시를 쓰고 싶어 미치겠지만 미치기만 하”(「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는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여전히 그는 괴로워 보이므로, 이 문답은 다시 “시 안 쓰고 안 괴로우면 되잖아/[……]/그런데 왜”(「현대 시 연구」)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간다. “무수했던 백지 앞의 공포/눈앞이 캄캄한 마감일 편집자의 전화/익명의 독자들이 남긴 혹평/얇은 책 한 권 분량의 시가 만들어지기까지 겪어야 했던/이상하고 무서운 일들”이 표상하는 시 쓰기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시인은 왜 “아무도 대출하지 않을 시집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되”(「시가 하는 일」)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한층 더 까다롭게 다가오는 까닭은, 어떠한 바를 느끼거나 겪은 누군가의 시 읽기 경험을 들추어보아도 이는 그야말로 내밀한 영역이므로 “영영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렷하게 언어화되거나 입증되지는 못하여도 “그토록 물질적이고 구체적인”(「새」), “보이지 않지만 안 보이지도 않는”(「먼지」), 무언가라고밖에 일컬을 수 없는 ‘무언가’는 분명 실존한다. 고로 이번 문답은 다음의 대답으로 매듭지어진다. “시가 무언가”를, “생생한 허구와 구별되지 않지”만 진정 허구는 아닌 그 “무언가를 하기 때문”이라고. 이 모호하지만 적확한 응답 앞에서 꿈틀, “거짓말처럼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함께 움직”(「시가 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나마 그래서”(「현대 시 연구」) 오늘도 살아 있다.
■ 시인의 말
아빠하고 동생하고 만든 5월의 꽃밭에서
바람도 햇빛도 참 좋았어요.
우리 셋은 모두 울었지만요.
슬픔을 녹이면 삶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요, 아빠.
나의 시간은 자주
나를 커다란 맨발로 밟고 갔어요.
가끔은 어깨빵을 하고선 뒤돌아 눈빛으로 물었지요.
뭐? 왜?
아빠의 책장에서 아빠가 처음 내게 꺼내어 준 책
거기 씌어져 있던 영원한 평화를 구상했던 철학자는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 같아요.
그는 결혼도 이혼도 여행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하나같이 심각한 책을 썼지만
사실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아빠가 송아지처럼 슬픈 눈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빠에게 물려받은 신파를 들킬까 두려워요.
평화는 시간이, 기억이 없는 곳에 있겠지요.
하지만 신기하지요?
해마다 그 꽃밭에 봄이 오는 게.
시간이, 기억이 없는 곳에 그런 신기는 없겠지요.
저는 지금, 아빠가 일요일마다 미사를 다녀와
밀짚모자를 쓰고
동생이 심고 간 꽃을 돌보는 동안
아빠가 필사적으로 일구는 평화를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던 시들을 모아
책을 엮으면서요.
괜찮아요.
결국엔 모든 게 괜찮았어요.
2026년 8월
정한아
■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악몽은 침대 위에 시체처럼 쌓이는데
균형!
균형!
균형에 대한 강박 때문에 나는 방사형으로 찢어진다.
보호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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