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전란을 극복한 불후의 기록

징비록 : 전란을 극복한 불후의 기록

$16.12
Description
‘초간본’의 의도를 최대한 살린 충실한 번역
전란의 시대를 깊이 있게 조망한 불후의 기록
2024년 개정판 『징비록』은 현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240여 개의 각주를 덧붙이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포함시켜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각적인 자료를 포함한 것이 큰 특징이다. 아울러 한자 원문을 삽입하고 모든 한자에 독음을 달아 번역의 충실도를 높였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징비록』은 초간본과 간행본으로 16권본, 2권본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이 책은 가장 원천이 되는 초간본 『징비록』을 번역의 원전으로 삼았다. 다만 이 책의 서문은 초본에 해당 부분이 없어진 탓으로 간행본의 서문을 택했다. 또한 역자의 해제를 앞에 덧붙여 『징비록』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책의 배경과 의의 등을 설명했다.

임진왜란을 다룬 책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쌍벽을 이루는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에 지정되어 있는 기록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징비록』은 당시 왜란을 겪으면서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재상의 기록이란 점에서 당시 시대 상황을 보다 폭넓게 보여 준다. 또한 당시 명과 일본과의 외교 문제, 전투와 보급 등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에 대한 조정의 논의를 볼 수 있어 전체 전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입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이순신을 비롯해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 정철, 신립, 이일, 원균 등 당시를 풍미했던 무신과 문신들에 관한 기록과 인물평 역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임진왜란 7년의 역사를 가감 없이 기록한
명재상 유성룡의 혜안과 처절한 자기반성

유성룡은 자서(自序)에서 임진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도록 한다는 바람에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썼다. 이 같은 그의 의도는 『시경』에서 나오는 “내 지나간 일을 징계(懲)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노라”라는 문구에서 따온 이 책의 이름 ‘징비록(懲毖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를 위해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당파에서 벗어나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감 없이 기록하는 한편, 후대를 위해 전란을 겪으면서 얻은 경험과 지혜, 방책 등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까지도 숨기지 않고 담담한 심경으로 썼다. 이러한 객관적이면서도 명철한 서술과 치열한 자기반성은 오늘날 위정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전란을 맞아 보이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모습 역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징비록』을 보면 유성룡의 뛰어난 혜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순신을 천거하여 왜군에 대비토록 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그는 무너졌던 진관법을 재정비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면서 조선의 기본적인 방어 체제였던 진관법이 유명무실해지고 제승방략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승방략은 각 지방의 군사들을 한곳에 모아 중앙에서 장군을 파견해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방법이었으나 전투에서 패할 경우 한 번에 뚫릴 위험이 있었다.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고 서울까지 단번에 길을 내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유성룡은 이러한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성의 수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것은 『징비록』에 실린 「녹후잡기」에 실린 성가퀴와 옹성에 관한 그의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징비록』 곳곳에서 보급과 전시 행정에 불철주야 노력하는 유성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시련의 시기를 거치며 망국의 갈림길에 들어서 있던 조선을 칼로써 지켜냈다면 유성룡은 붓으로써 조선을 지켜낸 것이다. 『징비록』은 그러한 문신 유성룡의 지혜와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진수가 담긴 책이다.

저자

유성룡

저자:유성룡(1542~1607)
본관은풍산(豊山)이고,자는이현(而見),호는서애(西厓)다.1566년별시문과에병과로급제해벼슬길에나섰다.전적,공조좌랑등을거쳤으며성절사(聖節使)의서장관(書壯官)이되어명나라에다녀오기도했다.이어이조참의를거쳐부제학,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거쳤다.1583년다시부제학이되어「비변오책(備邊五策)」을지어올렸다.정여립(鄭汝立)의모반사건으로기축옥사가일어나자여러차례벼슬을내려놓으려했으나임금이허락하지않았다.1590년우의정에올라광국공신(光國功臣)3등에녹훈되고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봉해졌다.이후왜란이있을것에대비하여형조정랑권율(權慄)과정읍현감이순신(李舜臣)을각각의주목사와전라도좌수사에천거하였으며,진관법鎭管法을예전대로고칠것을주장했다.
임진왜란이일어나자병조판서를겸하고,도체찰사로군무(軍務)를총괄했다.이어영의정이되어선조를모시며평양으로파천했다.이때나라를그르쳤으니책임을져야한다는이유로반대파의탄핵을받고면직되었는데,의주에이르러평안도도체찰사가되었다.명나라의장수이여송(李如松)과함께평양성을수복한뒤충청·경상·전라3도의도체찰사가되어파주까지진격했다.이여송이벽제관(碧蹄館)에서패배하고퇴각하려하자이를만류했으며일본과화의에도반대했다.유성룡은전란기간내내군대양성과더불어훈련도감설치,화포를비롯한각종무기의제조,성곽의수축을건의하여군비확충에노력했으며,소금을만들어굶주리는백성을진휼할것을요청하기도했다.1604년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책록되고다시풍원부원군에봉해졌다.

역자:이민수
충남예산에서태어나예동사숙에서한문을수학하고,사서연역회편집위원과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집필위원을역임하였다.민족문화추진회·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위원으로도활동했다.저서로『아계선생약전』,『윤봉길의사약전』,『사서삼경입문』,『논어해설』,『양명학이란무엇인가』등이있으며,역서로『동의수세보원』,『명심보감』,『공자가어』,『삼국유사』,『연려실기술』,『양반전』,『당의통략』,『연암선집』,『효경』,『순오지』,『천자문』,『부모은중경』,『목련경』,『오륜행실도』,『동국붕당원류』,『주역』,『관혼상제』,『격몽요결』등이있다.

목차


해제
자서
제1권
제2권
녹후잡기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임진왜란7년의역사를가감없이기록한
명재상유성룡의혜안과처절한자기반성

유성룡은자서(自序)에서임진란의쓰라린경험을거울삼아다시는그러한수난을겪지않도록후세를경계하도록한다는바람에서이책을집필하였다고썼다.이같은그의의도는『시경』에서나오는“내지나간일을징계(懲)하고뒷근심이있을까삼가(毖)노라”라는문구에서따온이책의이름‘징비록(懲毖錄)’에서도잘드러난다.이를위해유성룡은자신이속한당파에서벗어나최대한중립적인입장에서가감없이기록하는한편,후대를위해전란을겪으면서얻은경험과지혜,방책등을세세히기록하고있다.심지어는자신에게과오가있었다하더라도그것까지도숨기지않고담담한심경으로썼다.이러한객관적이면서도명철한서술과치열한자기반성은오늘날위정자들이어떠한자세로임해야하는가에대한반면교사로삼을만하다.전란을맞아보이는다양한인물군상들의모습역시오늘날시사하는바가크다.

『징비록』을보면유성룡의뛰어난혜안을곳곳에서볼수있다.이순신을천거하여왜군에대비토록한사실은이미널리알려져있다.이외에도그는무너졌던진관법을재정비할것을선조에게건의하기도했다.당시에는오랫동안평화가지속되면서조선의기본적인방어체제였던진관법이유명무실해지고제승방략으로바뀌어있었다.제승방략은각지방의군사들을한곳에모아중앙에서장군을파견해함께힘을합쳐싸우는방법이었으나전투에서패할경우한번에뚫릴위험이있었다.신립이충주의탄금대전투에서대패하고서울까지단번에길을내준것이이를방증한다.유성룡은이러한위험성을이미알고있었던것이다.또한그는성의수축에도관심이많았다.이것은『징비록』에실린「녹후잡기」에실린성가퀴와옹성에관한그의글을통해서도잘알수있다.이외에도『징비록』곳곳에서보급과전시행정에불철주야노력하는유성룡의모습을볼수있다.이순신이조선역사상가장큰시련의시기를거치며망국의갈림길에들어서있던조선을칼로써지켜냈다면유성룡은붓으로써조선을지켜낸것이다.『징비록』은그러한문신유성룡의지혜와경험이녹아들어있는진수가담긴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