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진
저자 : 임우진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더 깊이 알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 마른라발레 건축대학에서 석사와 건축사 디플롬(DPLG)을 수료한 후, 프랑스 국립 건축가로 3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거장 도미니크 페로와 함께 서울의 ‘이화여대 ECC’를 설계했고, 대표작으로 프랑스 보르도 ‘생카테린 광장’, 파리 ‘순그릴 샹젤리제 레스토랑’, 김제 ‘만경교회 순교기념관’ 등이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 국제현대미술비엔날레에서 디자인 부문 최고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상’을 2회 연속(12회, 13회) 수상했다. 학교보다 길에서 건축을 배웠다고 고백할 정도로 여행과 만남을 좋아하며, 그의 독특한 건축 작품과 글은 많은 부분 이런 다문화적 경험에서 기인한다. 오랜 외국 생활 후, 한국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재발견을 기록한 『보이지 않는 도시』(2023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2027년 미국에서 출간 예정) 출간 후 신문 칼럼 연재, 방송 강연 등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여는 글
1부 서양 건축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1장 둥근 지붕과 뾰족지붕
국가와 건축│왜 그리스 건축이 서양 건축의 근본이 됐을까?│위대한 발명의 향연, 로마 건축│혁신의 씨앗, 로마네스크│근본을 넘어선 혁신의 아이콘, 고딕│몰락한 부자의 사보타주, 르네상스│전통의 득세, 신고전주의‘들’
2장 전통은 왜 지속되는가
왜 미국의 행정 건물은 그리스 신전을 닮았을까?│왜 웨스트민스터는 고딕 성당처럼 재건했을까?│조선총독부는 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을까?│강철 거인의 가면무도회
3장 새로운 건축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고딕의 귀환│건축 세계대전│엑스포의 깜짝 스타, 일본│전통과 혁신, 영원한 딜레마│권력의 꿈, 건축가의 꿈
4장 시각 세계와 의식 세계
내가 냉장고 속에서 길을 잃는 이유│현실의 재현│시각의 회복│인식의 정복│시각 세계 탈출│모더니즘의 승리
2부 모더니즘은 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가
1장 모더니즘의 등장
뉴욕과 파리는 왜 다르게 생겼을까?│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장식은 죄악이다│양식과 주의
2장 신화와 허구
르코르뷔지에│세상을 바꾼 생각│현대 건축의 아버지│현대 아파트의 탄생│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진짜 악당은 누구인가│오귀스트 페레
3장 이상과 현실 사이
마천루의 아버지│이상과 현실│이성과 합리의 뒷자리
4장 현대 도시의 뿌리
전원도시│근린 단위│빛나는 도시│빛나는 전원도시
5장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건축가는 어떻게 길러지는가│전문가 증후군│환상과 현실 사이│사라진 아름다움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3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1장 한국 건축의 뿌리
1965년 부여, 김수근의 시련│강요된 복제, 엇갈린 시선│거대 기와지붕 속에 감춰진 불안│형태만 남은 전통│기와지붕과 콘크리트의 동거│생존이 빚어낸 잡종의 미학
2장 계속되는 시도
형태에서 의미로│형태에서 경험으로│형태에서 감각으로│친숙해진 공존
3장 끝없는 질문
우리 것의 기원│큰 차이, 작은 차이│트라우마의 복수
에필로그: 경계에 선 건축가
한식 세계화│한국적이란 것│상대성 이론│춤과 건축
감사의 글
참고 문헌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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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도시는 끊임없이 변모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변화와 선택 속에는 최초의 계기가 있었고, 수많은 충돌과 타협이 있었다. 어떤 생각은 살아남았고, 어떤 생각은 사라졌으며, 또 어떤 생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도시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지만, 드러내 말해 주지 않는다. 이 책은 도시에 숨겨진 욕망과 선택의 흔적을 따라가며, 오랜 기간 공간 이면의 문제에 골몰해 온 저자만의 새로운 관점으로 도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인간은 왜 혁신보다 전통을 내세워 왔는가
1부 「서양 건축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는 서양 건축이 오랜 기간 고대의 권위에 집착해 온 이유와 근대 국가들이 과거의 건축 양식을 다시 소환한 이유를 살펴본다. 미국의 행정 건물이 그리스 신전을 닮아 있고,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이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이유는 권력가들이 전통의 권위에 기대 국가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각적 수단’으로 건축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신소재와 신기술로 만든 뉴욕의 근대 고층 건물들마저 고전 건축의 외관을 빌려, 자본의 급조된 산물이 아니라 유구한 서구 예술사의 정당한 계보 위에 서 있음을 강변하려 했다.
이러한 혁신과 전통의 대결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무대가 바로 세계박람회(엑스포)다. 이 책은 엑스포를 배경으로 펼쳐진 국가 간 건축 각축전을 추적하며, 이 경쟁이 기술과 미학의 실험실인 동시에 국가의 위상을 겨루는 문화 전쟁이었음을 보여 준다.
모더니즘은 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가
2부는 오늘날 도시의 모습을 형성한 근대 건축의 이상과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기능과 합리성을 앞세운 모더니즘은 고전적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건축을 만들려 했지만, ‘전통’이라는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시를 빠르게 재건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와 맞물려 비로소 실현됐는데, 이 변화는 단순한 양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모더니즘은 대량 생산이 가능한 합리적 구조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 투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은 이 이상의 외형만 받아들여 ‘숫자’로 둔갑시킨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 주며, 이성으로 만들어 나갈 미래를 설계한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가 어떻게 현대 아파트의 원형이 되고, 자본의 탐욕이 침범할 수 없는 공동체를 꿈꾸며 그린 에비네저 하워드의 ‘전원도시’가 어떻게 현대 도시가 숭상하는 배제와 단절의 씨앗이 돼 변절했는지 짚어 낸다.
한국적인 건축은 무엇인가
3부는 엑스포에서 촉발된 한국 건축의 정체성 찾기가 이후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보여 준다. 김수근, 승효상, 조병수, 최욱 등 국내 건축가들의 사례와 건축 설계 공모의 현실적 한계 및 모순을 짚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건축의 가능성을 제한해 온 상황을 꼬집으며, 우리가 한국적이라고 여기는 건축적 표현이 외부인의 시선에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기와지붕과 전통 문양을 되풀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는 건축가들의 여정을 보여 주며, 경직성에 맞선 새로운 시도와 유연한 태도가 만든 여러 건축 사례를 들면서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본 도서의 의도는 이런 장면들을 내세우며 한국적 건축의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다만 무엇을 한국적이라고 믿어 왔는지, 그 믿음이 실제 건축물을 만들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 왔는지 묻는다.
이 책은 질문으로 연결돼 있다. 도시의 이면에 던진 그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공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보이고, 침묵하던 도시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시대의 요구와 욕망에 대한 건축가들의 치열한 고민이 구불구불 놓인 길 끝에서 우리는 내일을 보게 된다.
책 속에서
이러한 전통 지향적 경향은 단지 미학적 논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둥근 지붕으로 상징되는 르네상스와 뾰족지붕으로 대표되는 고딕 건축의 경쟁은 결국 고전주의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구조와 웅장한 실내 공간을 요구했던 종교적 권위가 쇠퇴하고, 시민 계층의 권력이 부상하면서 고딕이 추구했던 혁신적인 구조 공학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17세기부터 이어진 정치적 혁명과 식민지 쟁탈전 등의 사회적 격변을 거치며, 도전이나 혁신보다는 안정과 영속성을 상징하는 권위가 더 절실히 요구됐다. 지배 권력은 변하지 않는 전통의 권위에 기대어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으며, 이는 건축이 절대적 규범으로 인식되던 그리스·로마 건축으로의 회귀를 강력하게 부추겼다. 고전 양식은 혼란한 세상 속에서 질서와 영속성을 상징하는 건축적 언어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 전개 양상은 놀랍도록 다양하면서도 일관적인 모습으로 펼쳐진다. - 46~48쪽, 1부 1장 ‘둥근 지붕과 뾰족지붕’
런던의 ‘수정궁’, 파리의 ‘에펠탑’, 시카고의 ‘페리스 휠’ 그리고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까지, 이 위대한 건축물들은 애초에 모두 박람회 기간 몇 개월 동안만 사용하고 철거될 운명의 ‘임시 건물’이었다는 점이다. 태생이 한시적 건물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도시 맥락이나 관습적인 건설 기술의 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수천 년 건축을 지배해 온 육중한 돌과 벽돌의 시대를 밀어내고, 철과 유리 그리고 가벼운 강철 구조를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혁신적 실험은 결국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아 인류 문명사의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고, 오늘날 국가와 도시를 상징하는 대체 불가능한 얼굴로 각인됐다.
“누가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효율적으로 새로운 재료를 다루는가.” 제국주의 시대, 건축을 매개로 벌어진 이 치열하고도 다소 유치했던 국가 간 자존심 경쟁은 역설적으로 인류의 주거 문화와 도시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 90~91쪽, 1부 3장 ‘새로운 건축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르코르뷔지에와 건물에 ‘피부와 뼈대’라는 기념비적인 개념을 만든 미스가 새로운 건축을 주창했을 때 그 목표는 명확했다. 계급 의식과 허세, 현학적인 장식으로 표상되는 과거의 굴레를 걷어 내고,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으로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 도시를 획일화할 또 다른 독재자를 꿈꾼 것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건축물을 평범한 시민의 일상으로 되돌려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왜 그 혁신적인 생각이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잠재우고 현대의 ‘유일무이한’ 가치가 돼 버렸을까?
그 본질적 이유는 모더니스트의 이성과 합리에 더 열광했던 주체가 건축가 집단이 아니라, 뜻밖에도 ‘자본’이었기 때문이다. - 205쪽, 2부 3장 ‘이상과 현실 사이’
그에게 건축과 도시 계획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침범할 수 없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워드가 구상한 것은 거창한 대도시도, 도심 외곽의 전원주택 단지도 아니었다. 그가 지향한 것은 ‘자급자족적 소도시’였다.
(…) 결국, 더 나은 환경의 도시를 설계한 청사진 속에서 오히려 ‘반反도시적’ 씨앗이 싹텄다. 밀도와 혼돈, 역사와 갈등이라는 도시 본연의 생명력을 포용하기보다, 통제 가능한 규격 안에 삶을 가두려 했던 ‘전원도시’의 꿈은 오늘날 현대인을 신도시와 재개발 단지라는 이름의 거대한 섬들로 흩어 놓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 - 210쪽?213쪽, 2부 4장 ‘현대 도시의 뿌리’
반면 한·일 국교 정상화라는 거센 파고 속에서 정치적 곤경에 처한 당시 정권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권력이 위기 때마다 반복해 온 특유의 행동을 재연했다. 바로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여전히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던 시절, 정부는 민족의 정기와 기개를 다시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신축을 전격 결정한다. 그러나 ‘부여박물관’에서 불거진 왜색 논쟁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던 당국은 설계 공모 조건에 전례 없는 (명령에 가까운) 권고 조항을 내걸었다. “건물 그 자체가 중요 문화재의 외형을 그대로 나타내게 할 것, 또한 여러 채가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베끼기’를 독려한 설계 공모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모더니즘의 흐름을 타고 있던 당대의 엘리트 건축가들은 당연히 거세게 반발했다. 창의성을 거부하고 과거의 복제판을 만들라는 압력에 대다수는 보이콧으로 저항했고, 결국 설계 조건을 수용한 제출안은 단 세 점에 불과했다. - 254쪽, 3부 1장 ‘한국 건축의 뿌리’
우리는 경주나 안동의 고택을 찾을 때마다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마당에 스며든 아늑함 속에서, 도시의 분주함을 씻어 내는 치유를 경험한다. 여러 채로 나뉜 집 구조가 만드는 다채로운 시선, 툇마루에 앉아 건너편 마당과 사랑채를 바라보는 여유는 답답한 아파트 단지에 갇혀 있던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의 실상이 견고한 유교적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분리의 무대’였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는다. 한 울타리 안에서도 남녀와 세대, 신분에 따라 사람을 갈라놓아야 했기에, 늘어나는 건축비와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채를 나누고 담을 세워 동선을 복잡하게 얽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비용을 지불하며 누리는 그 공간적 풍요는, 역설적으로 철저한 ‘차별과 구별’을 발판 삼았던 당시 사회가 낳은 부산물이다. 사대부의 정신은 높고 곧았을지언정, 그들의 삶을 담아낸 몸은 위계적이었고 배타적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원인을 숨기고 외형만 남긴다. - 312쪽, 3부 3장 ‘끝없는 질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