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문화 사이의 숙명적 간극을 이어 줄 우리 시대의 역작!
“틸리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위대한 신학자다.” _칼 바르트
종교가 인간 정신의 한 측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특수한 관점에서 인간 정신을 살피면 그것 자체가 자신을 종교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관점은 무엇인가? 인간 정신 생활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에 있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기능에 있는 깊이의 차원이다.
- 1장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 중에서
신앙은 우발적 요소를 포함하며 위기를 필요로 한다. 신앙은 한정되지 않은 것의 존재론적 확실성을 모든 한정적이고 구체적인 것의 불확실성과 결합한다. 이 사실은 물론 신앙이 더 높은 혹은 더 낮은 개연성이 있는 어떤 것에 관한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신앙의 위기는 신앙이 신, 인간, 세계에 관한 주장을, 즉 지금은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증명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에 관한 주장을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위기가 기초해 있는 사실은, 무조건적 요소가 궁극적 관심의 문제가 되려면 그 무조건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신앙의 위기는 실존적 위기로서 우리 삶의 의미와 완성이 위협당하는 위기이지, 조만간 반박될지도 모르는 이론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 2장 “종교철학의 두 유형” 중에서
이교주의(paganism)란 특수한 공간을 궁극적 가치와 위엄으로 고양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교주의에는 어떤 신이 있고 그 신은 한 장소에 귀속되어 있는데, 그 장소는 다른 장소들과 대등한 동시에 대립해 있다. 그러므로 이교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신론적이다.…역사 속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서 전환점은 예언자의 선포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에 맞서 탄생하는 것에 상응하게, 예언자주의(prophetism)가 이교주의로부터 그리고 이교주의와 맞서 탄생했다.…시간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최종 목표를 향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역사에는 방향이 있으며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어떤 것이 창조된다.
- 3장 “시간과 공간의 투쟁” 중에서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는 문화의 의미를 제공하는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기본적 관심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들의 총체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그런 고찰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원론의 확립을 분명하게 방지한다. 모든 종교적 행위는 제도화된 종교뿐 아니라 영혼의 가장 친밀한 움직임에서도 문화적으로 형식화된다.
- 4장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
상징은 기호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유사하다. 그것은 바로 상징과 기호가 둘 다 자신들을 넘어서는 다른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전형적 기호는, 예를 들어 거리의 붉은 신호등은 그것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은 그것 자체를 넘어서 그것이 의미하는 실재를 지시한다.…상징과 기호를 구분하는 근본적 차이는 기호가 자신이 지시하는 것의 실재와 힘에 어떤 식으로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징은 비록 자신이 상징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의 의미와 힘에 참여한다.
- 5장 “종교언어의 본성” 중에서
피카소(Picasso)의 “게르니카”(Guernica)는 위대한 개신교 회화이다. 물론 이 진술을 한정하는 말은 그것이 개신교적 대답이 아니라 개신교적 질문의 급진화로서, 그것을 우리가 피카소의 걸작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개신교 원리(Protestant Principle)는 (개신교회의 설교와 교육에 언제나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거리를 강조한다. 이 원리는 인간의 유한성, 인간이 죽음에 종속됨을 강조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참된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음과 인간이 마성적 힘?자기 파괴적 힘?에 속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만약 우리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우리 시대의 인간이 처한 곤경에 관한 예술적 표현의 본보기?아마도 가장 탁월한 본보기?로 간주한다면, 그 부정적-개신교적(negative-Protestant) 특징이 명확해진다. 죄책, 불안, 절망의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질문은 엄청난 위력을 동반하며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6장 “개신교와 예술 양식” 중에서
실존철학의 근본적 추동력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19세기의 종교적 상황에서, 특히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830년 이후로 나타났던 모든 집단은 공통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문제는 계몽주의, 사회 혁명,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충격으로 종교 전통이 붕괴됨으로써 발생한 문제였다. 먼저는 교육받은 계급들 사이에서, 다음으로는 증가하는 산업노동자 대중 안에서, 종교는 그 “비매개성”을 상실했다. 즉 종교는 인간의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그들은 인간의 비매개적 경험을, 즉 “주관성”을 지향했다. 그것은 “객관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으로, 객관성과 주관성은 모두 이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경험하는 실재를, 내면성(Innerlichkeit) 혹은 내향적 경험을 지향했다. 그들은 존재의 창조적 영역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그 영역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구별보다 선행하거나 넘어서는 것이었다.
만약 삶의 이 수준에 대한 경험이 “신비적”이라면, 실존철학은 삶의 의미가 교회적 용어에서뿐 아니라 실증주의적 용어에서도 상실된 이후에 “신비적” 용어로 그 의미를 되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신비적”이라는 단어를 실존철학에 사용하려면 그 단어를 재정의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그 단어는 초월적 절대자와의 신비적 연합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에 의한 것이든 집단에 의한 것이든 삶의 깊이와 연합을 지향하는 신앙의 모험을 의미한다.
- 7장 “실존철학: 그 역사적 의미” 중에서
실존주의자는 질문을 제기하고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며, 그런 다음에 그 질문과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신학자가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대답은 질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상황 자체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신학은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은 50년 전에 혹은 심지어 30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선물을 갖고 있다. 실존주의자와 분석가는 자신들이 신학에 이 큰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신학자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 8장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의” 중에서
아인슈타인의 세 번째 논증이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는 선하고 의로우면서도 도덕적?물리적 악을 창조하는 전능한 신의 개념이다. 이 비판이 전제하는 전능의 개념은 물리적 인과율을 따라서 전능과 전행위(omni-activity)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그리고 항상 강조된 신학적 가르침은 신이 모든 존재자의 특수한 본성에 따라 그 존재자들 안에서, 즉 인간의 합리적 본성에 따라 인간 안에서, 동물과 식물의 유기적 본성에 따라 동물과 식물 안에서, 돌의 비유기적 본성에 따라 돌 안에서 행동한다고 한다. 전능이라는 상징이 표현하는 종교적 경험은 실재의 어떠한 구조도 그리고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난 어떠한 사건도 의미와 존재의 무한하고 소진되지 않는 근거를 가진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제거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9장 “과학과 신학: 아인슈타인과의 토론” 중에서
사랑은 도덕주의들과 도덕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사랑은 도덕주의와 도덕의 네 가지 만남에 내포된 질문들에 대답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사랑보다 높은 원리로서 사랑을 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보다 높은 것은 없다. 그리고 사랑은 자신을 한정한다. 사랑은 모든 구체적 상황에 개입하고 분리된 것의 재연합을 위해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사랑은 정의를 포함한다. 정의 없는 사랑은 척추 없는 몸이다. 사랑의 정의가 포함하는 것은 이 관계 안에 있는 어느 쪽도 자신을 소멸시키도록 요청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관계에 들어가는 자기는 그 독립성 가운데 보존된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정의를 포함한다. 사랑은 도덕주의들과 도덕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 10장 “도덕주의들과 도덕: 신율적 윤리학” 중에서
상징의 상실 없이 문자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종교교육의 큰 임무이다. 그것은 인문주의적 요소를 교회학교에 가져오면서 학생이 성숙하고 비판적이고 여전히 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인격으로서 교회와 결속 가운데 있게 한다. 만약 교회학교가 인문주의적 원리를 교회학교의 생활에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강하다면, 교회학교는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자신의 제한된 장소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종교적 관심이 증가하는 우리 시대에 점차 중요해질 수 있다.
- 11장 “교육의 신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