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삼국글씨의다름에서독창성과정체성을찾고자한동시에서로영향을주고받을수밖에없었던삼국의서예가공통점이있음을강조하고있다.또한각기다른색을가진삼국의글씨는각기다른역할로고대동아시아문자문화에금자탑을세웠음을설명하고있다.
삼국은석비,벽돌,기와,나무등다양한재료에문자를남겼으며,그내용은공적인것도있고사적인것도있다.용도에따라재료의선택이달라지고글씨가달라지기도했으며,서사재료나도구에따라서체와서풍이달라지기도했다.반면약1세기동안같은서풍을유지한나라도있다.
삼국서예의특성과그영향
고구려의글씨는용도에따라서풍을달리했는데,공식비문에서는웅강함을,비공식각석에서는자유스러움을추구했다.즉,국가적사건을기록한비에는고구려의진취적기상을드러내는웅건무밀한글씨를썼고,개인적용도의금석문에는편한마음으로자유로운서체를구사했다.이것은삼국가운데고구려에서만나타나는현상이므로고구려서예의특징이자정체성이라해도무방하다.또한고구려서예는신라서예에영향을주었다.신라왕경인경주에서출토된〈광개토왕호우〉,〈연수원년명은합〉과〈광개토왕비〉,〈집안고구려비〉,〈충주고구려비〉,〈평양성고성각석〉등5,6세기고구려금석문에보이는예해지간의글씨,힘차면서고박한서풍,예서와행서의필의가가미된필법등을통해6세기신라비와의유사성을찾을수있다.
백제는고구려나신라에비해전아하면서유려한서풍을구사했는데,이는중국남조와의빈번한교류를통해선진문화를수용했기때문이다.그러나근래에출토된불교관련문자자료들은기존의서풍과대비되는질박한분위기를가지고있어백제서예에대한총체적연구가필요해졌다.또한고구려에는없는행정문서인목간이다량출토되어백제의서예문화를더깊게살필수있게되었다.
백제서예는동질성보다는이질성을중시하면서서사재료에따라각기다른맛의세련미와고박미를동시에보여주는개성적서예를창조했다.한문발달정도도같은시기고구려나신라보다앞섰는데,이두吏讀양식을보인고구려나신라의명문과는달리〈무령왕지석〉에서보듯이백제는중국의한문양식을따랐다.또한백제의글씨는고대일본의목간문화에영향을미쳤다.7세기아스카시대의목간에쓰인『논어』,『천자문』,『관세음경』은백제가전한유교경전,불교경전과밀접한관련이있으며,목간의문장양식이나글자형태등도백제와유사하여백제도왜인이전한글씨를수용한것으로추정된다.일본목간에서보이는백제서예의흔적은7세기백제의개방성과다양성,국제성을보여주는증거이다.백제는자국의서예문화를융성시킴과동시에그것을일본에보급하는전령사역할을함으로써동아시아문자문화발전에크게기여했다.
신라는5세기에정치적으로고구려에예속되었고,따라서문화도그영향을받았다.당연히서예문화도고구려의영향을많이받았는데,5세기후반고구려의정치적영향에서벗어날무렵에는문장과글씨에서신라만의특색이나타나기시작한다.7세기에는목간을통해신라식이두를표현했으며,자간이없어두글자가한글자처럼보이는합문을자주사용했는데이것은고구려나백제의명문에서는거의보이지않는다.
신라서예의특징은한마디로일관성과다양성이다.다양한석비형태와그석비형태를따른서법의다채로움은주어진환경을이용하는신라인의적응력과순발력을상징한다.또한서체와서풍의일관성은중국으로부터먼지리적환경으로선진문물의영향을덜받은신라인의소박하고꾸밈없는성품의표상이다.이것이곧글씨를통해표현한신라인의창의성이요,정체성이다.신라는고구려의서예를수용했지만창신創新을통해정체성을확립했으며,이후중국과의활발한교섭을통해외래서풍인북위풍도수용했는데이는신라서예의진일보된모습을보여주는것이다.그리고가야와일본에자신의서예문화를전함으로써동아시아에서문자문화전파의매개체역할을했다.
이런특성을지닌삼국의서예문화는통일신라서예문화의기반이되고그다양성의원천이되었다.
서예학적관점에서판독한삼국글씨
저자는서체와판독에이견이있는자료를서예학적관점으로접근하여풀었다.서체에서는전체적인분위기와각글자의운필과필법을기준으로삼았고,판독에서는내용보다는당시서자의관점에서장법과결구,필획의특징등으로글자자체를읽는데초점을맞추었다.글자를구성하는요소들을근거로누구나쉽게판단할수있도록합당한의견을제시했다.초기의잘못된판독이검증없이재인용되는사례가비일비재했는데,그런명백한오독도수정했다.후학들이같은실수를되풀이하지않도록하기위해그출처도최대한밝혔다.
또한서자의필법은물론각자의각법刻法에도초점을맞추었다.저자는금석문연구에서글씨의미적요소를논하기위해서는입체감이살아있는각刻을살펴야하고이를위해서는반드시실물중심의연구가이루어져야한다고강조한다.〈무령왕지석〉,〈왕궁리오층석탑금강경판〉,〈대구무술명오작비〉등을통해고대에는각공조차서법을터득한후각에임했음을확인했다.
이책은크게5개장으로구성되었다.제1장에서는선사시대한반도사람들이한자가유입되기전에는어떻게의사를표현했는지간략히정리했고,제2장에서는삼국가운데가장먼저한자를받아들여삼국서예문화를선도한고구려의글씨를살펴보았다.제3장에서는백제서예의참모습을알아보고,남조와북조글씨와의연관성은물론이전까지크게다루지않았던고구려와신라서예와의연관성을살폈다.제4장에서는신라서예의총체적모습을살피고거기에내재된다양성과일관성을고찰했다.
이책의말미에는외국학자들에게도이책의내용을소개하기위해장별영문요약문을실었으며,연구자의이해와편의를돕기위해서예용어,삼국문자유물지도,삼국과중국의서예사연표를별첨했다.
다양한재료에쓰여진방대한삼국의문자자료를모아엮은데서나아가삼국의글씨를서예학적관점에서일목요연하게분석한이책은관련연구자들에게더없이좋은양분이될것이다.
[책속으로추가]
이성산성목간가운데가장주목할것은〈‘무진년’목간〉이다(그림4-52우).1면의묵서“戊辰年正月十二日明南漢城道使”로보아608년이성이주변의여러성과긴밀하게군사연락을주고받았음을알수있다.“무진년정월12일동틀무렵,남한성의도사”로해석되는명문은이른새벽부터긴밀한연락을주고받던전선의긴장감을느끼게한다.
사면중에서1,2,3면에만묵흔이있다.1면은해서로쓰였지만넷째글자인‘正’에는행서의필의가있고,2,3면은행서로쓰였다.획이굵고힘차며거침이없고,‘正’,‘月’,‘明’등의글자에는원필의북위풍이농후하다.또‘十二’는자간의여백이없는합문인데,특히숫자를합문으로쓰는것은6세기신라비에도자주나타난다(표4-21).6,7세기신라에서합문이빈번히사용되었음을이목간에서도확인할수있다.〈남산신성비제10비〉에서쓰인북위풍이이목간에서도사용된것은6세기말이후신라에서외래서풍이지속적으로사용되었음을의미한다.즉,6세기전반의토속적서풍이점차노련하고성숙된모습으로변화되어가는신라서예의변천과정을보여준다.―‘제4장신라의서예’중에서,401~402쪽
〈산상비〉는〈포항중성리비〉,〈금정택비〉는〈대구무술명오작비〉와같은6세기신라자연석비와유사하고,〈다호비〉는정형의〈진흥왕순수비〉를닮았다.다만신라의정형순수비가운데너비와두께를비교해볼때〈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두께가얇은양면비이고,〈마운령진흥왕순수비〉와〈황초령진흥왕순수비〉는너비와두께가비슷한석주형에가깝다.〈다호비〉가너비와두께가비슷한석주형인것을감안하면,일본의정형비는〈북한산진흥왕순수비〉보다는〈마운령진흥왕순수비〉,〈황초령진흥왕순수비〉에가깝다.전면에만글씨를새겼음에도불구하고사면에글씨를새긴〈광개토왕비〉처럼석주형인점이주목된다.(중략)
비의명문에서첫행의‘岡’자를주목해보자(표4-40).이이체자는중국동진의〈사곤묘지명謝鯤墓誌銘〉(323)에사용되었는데,이것은예서이다.남북조시대에는거의보이지않고7세기이후당나라때다시등장한다.
한반도에서는고구려의〈광개토왕비〉(414),〈광개토왕호우〉(415),〈모두루묘지명〉(413~450년경)에서보이는데,이는5세기고구려에서는보편적으로쓰인글자임을의미한다.또신라의〈울주천전리서석원명〉위의큰글자들사이에있는‘岡’자(그림4-20원안글자)를고구려의글자와비교하면,하부가止대신正으로바뀌었다.이것은북위의〈원랑묘지명元朗墓誌銘〉(526)하부와같은것으로보아止와正은서로통용됨을알수있다.따라서신라의이글자는고구려의영향을받은것으로보아도무리가없다.
일본에서는이글자가〈호류지금당관음보살조상기동판法隆寺金堂觀音菩薩造像記銅板〉(694)에서먼저나타나고이어서〈다호비〉(711)에서도보인다.호류지가있는나라지역은주로백제계도왜인이정착한곳인데,조상기후면의‘百濟’라는글자를통해서도이를확인할수있다.〈다호비〉가있는군마현은주로신라계도왜인이정착한곳이며,〈다호비〉를세운군장관히츠지는신라도왜인으로추정되니‘岡’자는신라의영향으로보아도무방하다.신라고비와일본고비의형태적?서예적유사성은고대동아시아의문자는중국에서한국으로,그리고한국에서일본으로전파되었음을말해준다. ―‘제4장신라의서예’중에서,418~4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