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그리면잘죽어질건가?”
어느날찾아온그림선생덕에시작된
제주할망들의그림수업
시작은‘할머니예술창고’였다.제주조천읍선흘마을에사는여든여섯의홍태옥할머니는코로나때문에노인회관도못가고친구집도못가게되면서하루가적막하고외롭던차였다.여느산간농촌마을이그렇듯제주에서도일을할수만있으면아흔을코앞에둔할머니라도논으로밭으로일을나가는데홍태옥할머니는작년에갈비뼈가부러져일도못나가고있었다.그때동네아이들에게그림을가르치러왔다던그림선생이라는사람이아이들과‘할머니예술창고’수업을하겠다며하루동안집창고를빌려달라고했다.일전에동네주민센터에서개설한‘어르신그림책학교’를다니면서그림을조금배웠던터라반갑게그리하라고했다.어느토요일,마당한가득청소년과어른여럿이모여풍경도그리고꽃과나무와오래된빗자루와솥과이불장을그렸다.할머니도오랜만에그림을그리니좋았다.창고프로젝트가끝나섭섭했다.그때그림선생이다시불쑥찾아와서“삼춘(어르신),그림좀그려보세요!”라고했다.스케치북과색연필과물감도가져와함께그림을그렸다.《할머니의그림수업》첫장이그렇게열렸다.
이런마법같은일들을망설임없이실행하고한권의책으로정리한이는‘반사’라는별명을가진50대예술가최소연이다.세상의나쁜기운을반사한다는의미로그런별명이붙었다.저자는홍태옥할머니와첫수업을시작한뒤로동네할머니들을하나둘씩수업에불러들이더니나중에는매일같이동네를산책하며집집마다들러동네이웃할머니에게하는것처럼밥과커피를얻어먹고마당에서수확한무,당근,고추,오이를받아가며지난밤의안부를묻듯그림을권했다.그려놓은그림이있으면비행기를태우기도하고그림을벽에붙여주고가면서더연구해보라고도했다.그리고그하루하루의장면들을성실히기록했다.그래서인지그가엮어놓은문장들을읽고있노라면할머니들과나눈매순간의장면들이생생히그려진다.
낯선연필을들고주춤거리는주름가득한손,방석밑이나밥상밑에숨겨놓았다가수줍게내미는모퉁이가구겨진그림들,친근한방에삼삼오오모여웃고떠들며그림을그리는할머니들,밭에나갈때쓰는모자나꽃무늬바지,무와당근,옥수수등너무나익숙해서눈에잘들어오지도않는물건들을지그시응시하는도토리를닮은눈같은모습들말이다.
산책하다들러보니도토리를연습한종이가몇장있었습니다.그중한점을벽에붙여드렸죠.그그림에는할머니의희한한필체와필력,머뭇거림이있었습니다.도토리여섯개를연필로그리셨는데한가운데의도토리는할머니의새끼손가락이종이에닿으면서흑연이뭉개졌어요.그흔적이아름답게다가왔습니다.“잘도아꼽다예(너무예쁘다)!삼춘막잘했수다(정말잘하셨다).”제가감탄을했죠.할머니는“기?”하며웃더니그그림을저가지라고주셨습니다.할머니가그린그날의도토리그림에는동백동산의무언가도담겨있습니다.벌렁드러누워물끄러미바라보았던할머니의모습과도토리를그리려는손동작들.여든여섯이되어서야도토리가보인다는,조그만도토리열매를닮은할머니의눈.도토리를먹는노루들.2021년12월14일에할머니가처음으로그린도토리그림이제작업실부엌에걸려있습니다.(83쪽)
‘여자무’는처음보는표현이라생소했는데여자무를그려놓으신김인자할망이까르르웃기시작하자구경난것처럼할망들이인자할망의그림을보면서킥킥킥웃었어요.그옆에강희선할망은‘가쟁이무수’를그려놓고또히죽히죽웃고,할망들이계속그림을보면서손으로입을가리고주름진눈웃음을지으셨습니다.“호끔벌러진것이딱여자게여자네”라고힌트를주면서가쟁이무수는가랑이벌리고있는모습이여자를닮았다고또어찌나재미있어하면서깔깔대시는지종이에할망들의웃음소리가들어갈것같았지요.‘아꼽다’는제주방언으로‘귀엽다,사랑스럽다,예쁘다’라는뜻인데이할머니들이제겐정말‘아꼬운’존재들입니다.(85쪽)
그뿐인가.그의글뒤로이어지는할머니들의글과그림도감탄을자아낸다.그림을배운지3년이채되지않은,아흔에가까운할머니가그렸다는것이믿기지않을만큼아름답고섬세한그림과인생이고스란히담긴글까지.그림은곧바로지면에서튀어나올듯생생하고,한세기가까운시간동안경험했을모든희로애락이진하게응축된몇줄의짧은글은그어떤시보다감동적으로마음을울리며눈물과웃음을자아낸다.
‘그림그리는인류’로새로태어난할머니들
마을에변화를몰고온,따뜻한우정과친밀한배움의공동체
텅빈화폭에자신의이야기를풀어놓기시작한할머니들은전에없던해방감을느끼며‘그림그리는인류’로새롭게태어났다.한국전쟁,제주4·3사건등야만적인역사를온몸으로통과하며가슴아픈개인사를켜켜이쌓아온할머니들이일평생누구에게도고라주지(이야기하지)않고속에담아둔이야기들을하나둘그림과글로표현해냈다.그런데그결과물은슬픔과한에매몰되지않는다.헤아릴수없는깊이가느껴지면서도유쾌하고발랄하다.글보다삶을먼저배워서일까.과장도꾸밈도없는솔직하고투명한작품들은그자체로경건함을느끼게하면서인간이마땅히지녀야할삶의태도에대해서도다시금생각하도록한다.
이다음에하늘나라가면
새로만탄생하여도좋을거쥐
시원히나무위에앉아
소리도깍깍하고
훨훨날아도다니고
_강희선(172쪽)
날씨흐리고
제주도는이바람이
여름만나면계속불지
오래살면
이바람이아라져(알아져)
여름에는마바람(마파람)
나가팔십팔년동안
샛바람마바람
무쭉껀마지며살았찌(무조건맞으며살았지)
육지는바람이어떻게부는지
난모르지
_부희순(182쪽)
저자의이야기를따라가다보면그림선생과할머니들이나눈우정과사랑도마음을따뜻하게물들인다.할머니는갑작스러웠을그림선생의방문과제안을망설임없는환대로맞아주었고,그림선생이아낌없이내어주는미술재료와가르침에사랑으로답했다.그림선생은할머니를표현하는존재로다시태어나게하는동시에그들을통해내일보다오늘을살아가는법을배우며한뼘더성장해나갔다.그어떤우정이이보다위대할수있을까.
이같은우정으로결성된환대와다정의공동체는점차마을전체로퍼져나가며마침내또다른바람을불러일으켰다.그림수업을지속하면서여덟할머니의집창고는근사한미술작업실이자개인갤러리로변모했고,선흘마을은순식간에개인갤러리여덟곳을갖춘예술마을이되었다.할머니의집을분주히오가는그림선생과그림수업이열리는축제의현장을지켜보던마을사람들의마음에도활기가일었고,덩달아신이난사람들은뭔가함께재미나게살아볼일이더없을까궁리하기시작했다.마을영농조합은할머니들의그림을스티커로만들어선흘에서출하되는귤상자에붙였고,어린아이를키우는부모들은할머니들과함께하는어린이그림수업을열어보겠다고나섰다.청년협동조합이생기는가하면동네초등학교는학생수가늘어서본교로승격했다.이제선흘의동네예술가들과주민들은별일없이수시로모여그림을그리고꽃모종을나누면서생기넘치는풍경을만들어가고있다.
그림선생과할머니들의동화같은이야기,여덟할머니의생애와희로애락이진하게담긴아름다운글과그림,‘함께하는예술’의기쁨과가능성을모두담은《할머니의그림수업》속으로기꺼이들어가보자.마음의우울이걷히고기분이상쾌하게맑아지는경험을하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