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를 지켜낸 법학자의 삶)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를 지켜낸 법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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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동료들이 판검사로 입신양명을 꿈꿀 때 홀로 국제법 학자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 백충현. 20대 후반부터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해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료인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입수,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20년 동안 논쟁을 불러일으킨 프랑스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투신, 맞교환 정책에 반대하며 무조건적 반환을 일구어냈다. 재일 동포들의 지문 날인과 강제 퇴거에 저항하고,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렸던 그 사람 백충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올곧은 양심으로 조국에 헌신했던 학자의 삶이 희소가치 높은 사료들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저자

이충렬

저자이충렬은서울출생,1994년《실천문학》을통해작가의길에들어섰다.현재미국애리조나주피닉스에거주하며집필활동을하고있다.지은책으로《아,김수환추기경1,2》《간송전형필》《혜곡최순우,한국미의순례자》《김환기,어디서무엇이되어다시만나랴》《그림으로읽는한국근대의풍경》등이있다.실제에근접하여인물의궤적과시대정신을담아내는장르인전기문학의새로운지평을열었다.치밀한자료조사와탄탄한스토리텔링,처음부터끝까지감정을몰입시키는드라마틱한연출로쓰여지는글은영혼이담긴다큐멘터리이자소설이상의문학이되고있다.이책《국제법학자,그사람백충현》에서는독도,외규장각의궤반환,재일동포인권,종군위안부,아프가니스탄집단학살과난민문제등조국과인권을위해헌신했던백충현교수의생애를복원하면서최초공개되는자료인<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를통해독도가대한민국의영토임을명백히밝히고있다.

목차

서문-학문으로국가의자존심을지킨국제법학자

제1부국제법의존재이유
1.외교력이향상되어야국민의삶도좋아질수있다
2.국제법으로일본의책임을추궁하다
3.돌고래프로젝트
4.납치당한중공여객기의한국착륙과국제법
5.국제법연구의요람서울국제법연구원을설립하다

제2부국제법학자로서의양심과책무
6.재일동포와종군위안부문제에대해발언하다
7.국제법논리로프랑스가약탈해간의궤의반환을요구하다
8.장남을데려오기위해차남을보낼수는없다
9.위안부문제에대한일본의책임은소멸되지않았다
10.을사조약과정미7조약은국왕의비준이없어국제법상무효다
11.일본의집요한독도영유권주장을비판하다
12.아,[관판실측일본지도]

제3부국제사회를향하여
13.‘한국적국제법’을위한학술지
14.한국최초로유엔고위직에임명되다
15.포화속의아프가니스탄에가다
16.한국컴퓨터를유엔전산화계획에지원하다
17.아프가니스탄의집단학살을세계에알리다

제4부민족과국가의자존심을지키기위하여
18.드디어나타난[관판실측일본지도]
19.외규장각의궤의반환만이올바른해결책이다
20.맞교환합의에분노하다
21.일제의한국병합불법성을세계에알리다
22.외규장각의궤맞교환백지화되다
23.미완의저서《독도와국제법》

에필로그
백충현연보
주석
인터뷰및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책소개
독도영유권의결정적증거,[관판실측일본지도]최초공개!
험난한국제분쟁속에서학자적양심과탁월한통찰로
조국과인권에헌신했던백충현교수의최초전기


동료들이판검사로입신양명을꿈꿀때홀로국제법학자의길을선택했던사람백충현.20대후반부터독도문제에관심을갖고연구에매진해국제법적근거를마련했고이책에서처음공개되는사료인[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를입수,독도가대한민국의영토임을명백히밝혔다.또한20년동안논쟁을불러일으킨프랑스외규장각의궤반환문제에투신,맞교환정책에반대하며무조건적반환을일구어냈다.재일동포들의지문날인과강제퇴거에저항하고,위안부에대한일본의책임이소멸되지않았음을증명하며,아프가니스탄의집단학살을세계에알렸던그사람백충현.힘의논리가지배하는국제사회에서올곧은양심으로조국에헌신했던학자의삶이희소가치높은사료들과함께생생하게펼쳐진다!

출판사소개
독도영유권의결정적증거,[관판실측일본지도]최초공개!
험난한국제분쟁속에서학자적양심과탁월한통찰로
조국과인권에헌신했던백충현교수의최초전기!

독도영유권의결정적증거,[관판일본실측지도]

[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는일본의유명한지도학자인이노우다다타가伊能忠敬(1745~1818)가17년동안일본전역을다니며실측한작업을담아낸지도로후대일본지도제작의모본母本이되었으며최고의권위를자랑한다.그런데자세히살펴보면일본북쪽오키섬은잘표현되어있는데울릉도와독도는있어야할자리에없다.오키섬과독도까지의거리는157킬로미터,반면에도쿄에서남쪽으로약1,000킬로미터떨어진곳에있는오가사와라제도는별도의칸을만들어매우자세하게표시되어있으며그중가장큰섬인지치지마에는산이름과만이름까지모두표기되어있다.일본본토에서멀리떨어져있는오사가와라제도는표기하면서그1/4거리에있는독도를표기하지않았다는것은무슨의미일까?독도를일본영토로파악하지않았다는뜻이다.최고권위의일본관찬지도에서독도를자국영토로인정하지않은것이다.이책에서최초로공개되는[관판실측일본지도]는독도가대한민국의영토임을밝힐수있는결정적인증거다.그리고이지도를한국으로가지고온이는국제법학자백충현(1938~2007)이라는사람이다.

한국인이기억해야할숨겨진학자의양심
이책의저자이충렬은김수환추기경,간송전형필,혜곡최순우,수화김환기등근현대인물들의삶을복원하는데천착해온전기작가다.지금우리문단에는근현대인물에대한전기가매우적다.일제강점과분단,한국전쟁,민주화투쟁이라는역사의소용돌이속에서끝까지중심을잡은인물이많지않기때문이다.그동안널리알려진유명한인물들을다루어오던저자는이번에낯선인물인국제법학자백충현을소재로전기를펴냈다.그이유는무엇일까?백충현교수는사후인2010년독도영유권수호유공자로인정되어국민훈장인‘동백장’이추서되었다.하지만그가어떤일을하다간사람인지기억하는이들은지인들외에는거의없다.백교수는20대후반부터독도문제에관심을갖고연구에매진해국제법적근거를마련했고독도영유권의결정적증거인[관판실측일본지도]를입수했다.또한20년동안논쟁을불러일으킨프랑스외규장각의궤반환문제에투신,맞교환정책에반대하며조건없는반환을일구어냈다.재일동포들의지문날인과강제퇴거에저항했고,위안부에대한일본의책임이소멸되지않았음을국제법적으로증명하였으며,유엔인권특별보고관으로서아프가니스탄에서벌어진집단학살과난민문제를전세계에알렸다.백충현교수는한국인이기억해야할숨겨진학자적양심이었다.이책에서는힘의논리가지배하는국제사회에서학자적양심과통찰로조국과인권에헌신했던법학자의삶이희소가치높은사료들과함께생생하게펼쳐진다.

한국의국제법을선진국수준에올려놓다
1970년하버드대학교로스쿨에서석사과정을마치고동아시아연구소의연구원으로일하던젊은법학자백충현은우리나라국제법이개발도상국수준에서벗어나지못하고있음을절실히느꼈다.“국가간의분쟁은외교의힘으로해결된다고믿기쉽지만,외교의힘은항상법적이론이뒷받침될때비로소정당한방법으로행사될수있다”는굳은신념을갖고있던백충현은,1972년귀국후외무부에서근무하는후배들과함께자신의집에서국제법연구모임을했다.자료가절대적으로부족하던시대였기에미국에서구해온국제법책과자료를공유했고,외무부후배들에게는공개가능한국제조약이나국제사법재판소판례자료를부탁했다.그는외무부에서국제법이연관된사안이발생할때마다이론적대응책을조언했다.
백충현교수는국제법연구모임을보다체계적으로발전시키기위해1984년서울국제법연구원을설립했다.장소는당시외무부가있는광화문에서가까운종로구사직동을택했다.당시는복사기뿐아니라타자기조차귀하던시절이었다.백충현교수는먼저고성능복사기와문서편집기를마련했다.자신이꾸준하게구했던국제법관련서적과자료들을기증했지만급변하는세계정세속에서발생하는국제법현안들에대해빠르고정확하게대처하기에는부족했다.그는사재를털어주요국가에서발행하는국제법관련정기간행물을정기구독했고,국제법학자들에게필수적인자료집과신간도서를계속구입했다.그결과서울국제법연구원의장서와자료는국내최고의수준이되었고,많은외교관과국제법석박사논문을준비하는학생들이그곳에서밤을새웠다.1990년에는자비를출자하여서울국제법연구원을외무부산하재단법인으로만들었고1994년부터세계적수준의국제법저널인[서울국제법연구]를1년에두번씩간행했다.이처럼백충현교수는한국의국제법이선진국수준으로발전하는데산파역할을한인물이었다.

[관판실측일본지도]의입수과정과미공개이유
이노우다다타가가측량한지도가[관판실측일본지도]로만들어진것은메이지유신2년후였다.왕정복고로권력을잡은메이지천황은1868년메이지유신을단행했고부국강병의기치아래구미?근대국가를모델로학제·징병령·지조개정地租改正등일련의개혁을추진했다.메이지정부는유신후반란군과여러차례전쟁을치르면서정확한지도제작의필요성을절감했다.그때부터이노우다다타가가측량했던작업을축척1:36,000의지도로제작하기시작했고,1870년에1,214장의지도를지방별로4권에담아[관판실측일본지도]를간행했다.
백충현교수가[관판실측일본지도]를처음목격한것은메이지대학박물관에서였다.백교수가지도의오키섬과그서북쪽부분을사진찍으려하자박물관의지도담당학예관은지도를촬영하지못하게했다.백교수는독도를자신의영토로인식하지않고있었다는‘결정적증거’가될수있는중요한지도이기에일본정부에서촬영금지요청을했을것이라고판단했다.그날이후일본의지도전문고서점들이모여있는간다神田지역을수차례오가며[관판실측일본지도]를찾았다.서점주인들은‘그지도는보물중의보물이라매물로나올가능성이거의없다’고했지만,그래도백교수는혹시라도나오면꼭연락을해달라며명함과국제전화비용을봉투에넣어건넸다.1997년8월,도쿄에있는고지도전문점충경당으로부터[관판실측일본지도]가매물로나왔다는연락이왔다.당장일본으로건너간백교수는한장의낙장도없는완벽한지도임을확인한후1억원의거금을들여한국땅으로지도를가지고왔다.그러나백교수는기자들에게그사실을알리지않았다.당시한일양국간에는‘신한일어업협정’과‘중간수역’에대한논의가진행되면서독도영유권에대해당분간외교적마찰을피하자는‘신사협정’이묵시적으로이루어고있는상황이었다.만약[관판실측일본지도]를공개하면서독도가우리땅이라는결정적증거라고발표할경우,독도영유권문제가다시두나라사이의현안으로떠오를가능성이컸다.그럴경우오랜협의끝에타결을눈앞에둔‘신한일어업협정’이수포로돌아갈가능성이높았다.그는개인의영예보다는국익을택했다.그후에도한동안[관판실측일본지도]와관련된논문발표를미루다가지병이악화되었다.그래서이책에서소개하는[관판실측일본지도]이미지는아직공개된적이없다.

위안부문제에서집단학살까지국제법학자로서의책무
백교수는학자로서의양심과책무를중요시했다.1992년1월11일일본아사히신문은주오中央대학의요시미요시아키吉見義明교수가일본방위청방위연구소도서관에보관되어있는[육지밀대일기陸支密大日記]에서일본군이위안소설치·관리및종군위안부모집을직접지시·감독·통제했음을확인해주는세건의문서를발견했다고보도했다.그동안일본정부가위안부문제에대해취해온“민간업자가한일이며국가기관이나군이관여했다는단서는없다”는입장을뒤엎는최초의증거자료였다.당시미야자와기이치宮澤喜一일본수상은위안부문제에대해“1965년한일협정으로국가차원의청구권은마무리됐다”는입장이었다.백충현교수는“일본은1965년청구권협상당시종군위안부의존재자체를부인하면서이를이유로청구권협상의대상으로삼는것조차거부했기때문에위안부문제가정식으로논의조차되지않았었다.따라서위안부문제는미결상태로남아있고,위안부문제에대한일본의책임은1965년한일회담에의해소멸된것이아니다”라고주장했다.또한백교수는우리나라정부가“무역불균형시정등한일간에미묘한현안이수없이걸려있는상황에서정신대배상같은문제를제기하는것이과연대승적차원의국익에도움이되겠느냐”는태도에대해“위안부문제는개인적인차원이아닌국가적,민족적차원에서접근해야한다”고일갈했다.
공무원인국립대학교수신분으로국가가한일협정을체결할때제대로처리하지못해발생한문제에대해문제제기를하는것이쉬운일은아니었다.그러나백교수는국제법상무엇이정의이고부정의인지를알리는것이국제법학자로서의책무이고존재의미라고생각했다.똑같은이유에서백충현교수는을사조약과정미7조약에국왕의비준서가없어국제법상무효임을밝혔고,재일한인에게강제퇴거제도,지문날인제도,외국인등록증상시휴대제도,재입국허가제도등의적용이제외되어야함을주장했으며,유엔인권특별보고관으로아프가니스탄에서벌어진탈레반과반탈레반간의집단학살을전세계에알렸다.

외규장각의궤반환문제에투신하다
백충현교수가헌신했던또다른분야로는외규장각의궤반환문제가있다.1866년병인양요때프랑스해군은강화도에침입해조선군과전투를벌인뒤퇴각하면서외규장각에있던5,000여권의책중어람용의궤등외형적으로화려한340여권을약탈해프랑스군함에옮겨실었고,외규장각에있던나머지책은불태웠다.그중297권이어람용의궤였고,프랑스해군은귀국한뒤파리국립도서관으로보냈다.외규장각의궤297권이프랑스국립도서관에보관되어있다는사실이박병선박사에의해알려지자프랑스측에서는외규장각의궤가엄연한프랑스국가재산이라고주장했다.이에대해백충현교수는“국가또는왕실이생산한문건으로법적으로소유권이변동될수없는것”이라며“한국의왕실문서를프랑스재산으로등록한것자체가불법”이라고주장했다.무려18년동안이나지속된외규장각의궤반환논쟁에서프랑스측은줄곧맞교환원칙을주장했다.국가재산을내주는것인만큼상응하는대가를받아야한다는것이었다.그러나백충현교수는외규장각의궤는프랑스측이전시에한국에서약탈해간것이기때문에전시국제법이적용되어야하며,마땅히조건없는반환이이루어져야한다고주장했다.정부가프랑스측과의경협을통한이익을고려,문화재맞교환을추진할때는언론기고와성명발표를통해민족적자존심을호소하면서프랑스측의영구임대등다양한현실적대안을제시했다.결국2011년3월한국과프랑스는5년단위대여갱신형식으로외규장각의궤반환에서명했다.백교수가마지노선으로정했던영구임대와큰차이가없는형식이었다.백교수의학문적동지였던이태진서울대학교교수는“외규장각도서들이145년만에귀환한다는보도에접하여지난2007년타계한백충현교수의묘소로달려가이사실을큰소리로알리고싶은마음이다”라고소회를밝혔다.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