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작여시관 (백성욱 박사 전기 | 양장본 Hardcover)

응작여시관 (백성욱 박사 전기 | 양장본 Hardcover)

$20.32
Description
한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백성욱에 대한 최초 본격 일대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 건국 운동가이자 내무부장관, 동국대 총장이자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금강산의 수행자이자 활불(活佛). 백성욱을 일컫는 말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반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나 연구, 기록은 많지 않다. 대중적으로도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강설한 《금강경 강화》, 제자들이 전하는 일화와 법문 일부가 책으로 엮여 있고, 불교학 연구자들이 그의 금강산 수도 시절을 중심으로 논문을 몇 편 발표한 정도다.
이 책은 《백성욱 박사 전집(전6권)》 출판 기획에 따라 준비된 백성욱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 본격 전기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출생과 성장, 청년기, 금강산 수도 시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등을 인터뷰와 역사 자료, 편지와 기사, 취재 등을 통해 발굴·정리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알려진 채 인용되고 있던 내용도 수정·보강하였다.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보다 정확하게 연보와 생애를 꿰어맞추고, 백성욱의 깨달음과 가르침의 방향을 법문과 학인들의 수행기를 통해 명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성욱 박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 시절’, 그중에서도 안양암에서의 단신 수도 생활을 가장 의의 있고 보람 있던 때로 말하고 있다.
저자

고세규

1972년 전북 부안 출생. 서강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1998년 김영사 편집부에 입사,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목차

서문 : 백성욱 박사의 전기를 엮으며

1부. 이인(理人)을 꿈꾸며
1. 한용운의 부름
2. 지혜는 곧 생명력
3. 상해임시정부를 오가며
4. 독일 철학박사가 되다

2부. 금강산의 수행자
5. 갈팡질팡하누나
6. 숙세의 인연, 일엽을 만나다
7. 나는 가서 없어져야 한다
8. 백성욱의 선지식
9. 안양암의 활불
10. 금강산에 모여든 500 화엄성중

3부. 한국 불교 교육의 중흥조
11. 돈암동 선방에서의 보림
12. 치악산의 백로선생
13. 해방-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선택
14. 종로 네거리에 내려온 철인
15. 정치를 떠나 교육으로
16. 백성욱 특강
17. 5·16으로 대학을 떠나다

4부. 미륵존여래불
18. 응작여시관
19. 왜 ‘미륵존여래불’인가
20. 백성목장 사람들
21. 어느 부처님 회상
22. 다 바쳐라

화보
백성욱 박사 연보
감사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 건국 운동가이자 내무부장관, 동국대 총장이자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금강산의 수행자이자 활불(活佛)이라 불린
한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백성욱에 대한 최초 본격 일대기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와 지방에 배포한 자”(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독립신문〉 제작에 기자로 참여한 인물, 1921년 충정공 민영환의 두 아들 민범식·민장식의 집사 역할로 유학길에 오른 뒤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원 철학과에서 〈불교순전철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인준받은 한국 최초 독일 철학박사, 1929년 가을 불교전수학교(동국대학교 전신) 철학과 강사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10년 동안 정진한 안양암의 수도자, 해방과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건국 운동을 실천한 내무부장관, 동국대의 기틀을 세운 동국대학교 총장,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그리고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하여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20년 가까이 《금강경》을 강화(講話)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한 선지식, 3세에 아버지 5세에 어머니를 여읜 뒤 12세에 출가하여 나는 바도 없고 죽는 바도 없다는 듯 태어난 바로 그날(음력 8월 19일) 입적한 시대의 활불(活佛)이라 불린 인물.
백성욱을 일컫는 말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반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나 연구, 기록은 많지 않다. 대중적으로도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강설한 《금강경 강화》, 제자들이 전하는 일화와 법문 일부가 책으로 엮여 있고, 불교학 연구자들이 그의 금강산 수도 시절을 중심으로 논문을 몇 편 발표한 정도다.
이 책은 《백성욱 박사 전집(전6권)》 출판 기획에 따라 준비된 백성욱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 본격 전기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출생과 성장, 청년기, 금강산 수도 시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등을 인터뷰와 역사 자료, 편지와 기사, 취재 등을 통해 발굴·정리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알려진 채 인용되고 있던 내용도 수정, 보강하였다.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보다 정확하게 연보와 생애를 꿰어맞추고, 백성욱의 깨달음과 가르침의 방향을 법문과 학인들의 수행기를 통해 명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성욱 박사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 시절’, 그중에서도 안양암에서의 단신 수도 생활을 가장 의의 있고 보람 있던 때로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앙불교전수학교의 교수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직을 사임하고 금강산 안양암에 들어가 단신 수도를 하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수도를 한 것은 내 자신이 좀 더 부처님 속에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멀리하고는 무엇인가 허전하여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오직 혼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던 해가 되자, 금강산에 들어와 수도하는 많은 종중(從衆)이 같이 있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그들의 뜻을 물리칠 수 없어 지장암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는 여러 수도자와 같이 기도하면서 그들을 지도하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안양암에서 3년, 지장암에서 7년, 그래서 이 기도는 만일(萬日)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도가 끝나는 1938년 어느 날, 일본 경찰이 나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 지금 회고해보면, 내 생애의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의 시절보다 의의롭고 보람 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양암의 단신 수도 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의 신심은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기도는 석가모니불 앞에서의 본존불(本尊佛) 정진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부처님 곁을 떠나는 날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생활 속에는 항상 부처님이 계십니다. 나의 이러한 신앙심은 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날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습니다. _p. 353

지인과 학인들의 회고, 각종 역사와 언론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백성욱 박사의 생애와 세계

“저 사람들 점심은 내가 가져다줄 테니 다른 대중은 나서지 마시게.”(p. 113) 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된 근대 한국 불교계의 대표 스님인 방한암 선사의 말이다. 백성욱이 스승이자 도반인 혜정 손석재 보살과 함께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정진을 이어가자,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방한암 선사는 백성욱을 ‘큰사람 백성욱’이라 칭송하며, 그의 공부를 위해 친히 끼니를 나르며 격려하였다. 약초 연구가 인산 김일훈이 남긴 일화를 보면, 당시 주요 인사들의 백성욱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방도인(方道人)으로 불린 형님이 한 분 있었다. 그 형님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음에 다다르자 임종을 지키던 많은 독립운동가는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떠나시면 어찌 될까요? 선생님 같은 이인(異人)이 과연 또다시 나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모르는 소리…, 나보다 월등한 재주들이 많지. 해방 이틀 이후 묘향산의 김운룡이 몽양 집으로 올 걸세. 그리고 금강산 중 백성욱이 있지 않은가. 모두 천하의 기재(奇才)들이니 나라에 큰일이 있거든 나이를 관계치 말고 물어서 의견을 듣도록 하게나.’” _p. 168

“수개월 전에 나는 금강산에서 백성욱 사(師)를 만나서 3, 4일간 설법을 들을 기회를 얻었소.”[이광수, 《문장》(1939년 9월)] 춘원 이광수는 백성욱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금강산까지 백성욱을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고 갔다. 재혼한 부인 허영숙과 크게 다툰 뒤면 어김없이 백성욱에게 달려와 푸념을 늘어놓곤 하였다. 사상적인 갈등을 거듭하고 병약한 체질이 겹쳐 실로 위안받을 데가 없을 때에도 불원천리 백성욱을 스승으로 모시고 찾아갔다.(pp. 166-167)

소설가 이병주의 〈백로선생〉이라는 작품은 1944년 치악산에서 백성욱을 스승으로 동굴 수행을 하던 청년 셋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KBS 〈TV 문학관〉에 단막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였다.(pp. 186-187)
한편 시인 서정주는 “한반도 5,000년 역사 가운데 여자로서는 선덕여왕이 가장 매력적이고, 남자로서는 백성욱 총장이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고 백성욱 박사를 회고하였다.(p. 243)

이 책은 백성욱에 대한 다양한 인사의 기억과 일화, 평가를 함께 담아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바로 그의 곁에서 수행의 길을 걸었던 제자들의 생생한 기억은 백성욱의 가르침과 세계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무슨 일을 바라볼 때면, 내 안에 백 선생님이 들어앉아 계심을 느낀다. 백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을 두고 ‘왜’라는 말을 쓰지 않으셨다. ‘너는 왜…?’ 하면, 그건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를 가리는 말이 될 텐데, 그러지 않으시고 ‘너는 그렇게 해야 했더냐? 그게 좋아 보이더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시비 경계를 짓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런 데서, 백 선생님의 법문을 듣고 공부하거나 백 선생님의 말씀을 책으로 읽어 공부한 사람하고, 백 선생님의 체취를 곁에서 느끼며 공부한 사람하고 차이가 난다. (…) 곁에서 모시고 공부하면 스승이 그대로 딱 들어오기 때문이다.”_학인 김강유(p. 9)

“소사에서 학인들이 무언가를 사러 가게 될 경우, (백 선생님은) 예상되는 가격의 두 배 정도 되는 돈을 건네주었다. 돈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일단 풍족하게 갖고 나가봐라’ 하였다. 학인들은 늘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고 돌아올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물건을 사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으레 흥정이나 에누리 과정이 꼭 있던 시절이었다. ‘판매자와 흥정하되, 물건값을 너무 많이 깎지 마라. 팔 때는 사는 사람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고, 살 때는 파는 사람도 손해를 보지 않게 해야 한다.’ (…) 누구도 손해 보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한 것이다.”_학인 이선우(p. 333)

“타인 때문에 괴롭다고 말하자, (백 선생님은) 이렇게 법문하였다. ‘제 마음속에 있는 분별을 제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또 남의 마음이라고 한다든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다든지 이런 생각들, 또 그건 옳지 못한 생각이라든지, 그건 또 좋은 생각이겠다든지, 이런 분별을 낸다면 영원히 그 마음을 항복받기 어렵다. 자기 마음속의 전부는 자기 것이지 남의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아무개 때문에 내가 속이 상했다고? 제 마음이 약하니까 속상하고 괴롭지 왜 아무개 때문에 상하겠는가?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는 자타(自他)가 전연 없는 줄 알아야 마음이 닦아지지, 자타가 있다면 마음은 닦아질 수 없을 것이다.’”_학인 정천구(pp. 330-331)

이 밖에도 백성욱을 만나고 함께했던 명사와 학인들의 회고와 인터뷰를 다양한 형태로 소개함으로써 그의 생애를 이해하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백성욱의 시와 에세이, 편지와 논문, 주요 강의와 법문 등을 집약하여 정리한 일대기
한 권으로 맛보는 백성욱 박사의 문장과 말씀과 삶과 가르침

“이번 길에 내가 다시 살아온다면 무슨 짓을 하거나 무슨 행동으로 세상을 대하거나, 그는 결코 시방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빈약하고 더러운 위선자인, 좋은 동기면서도 죄악의 결과만을 가져오는 ‘무호산방(백성욱의 필명)’은 아닐 것이다. 그는 적어도 부처님의 사명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오는 환주장엄(幻住莊嚴, 실제가 아닌 방편의 장엄)의 인물일 것이다. 무호산방은 그의 죄악을 참회하고 그의 환구(幻軀, 덧없는 몸)를 해탈하였으리라. 또 반드시 그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나로서는 이 길을 떠나면서 동지에게 아니 전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