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원전완역/영인본 전문 수록 | 양장본 Hardcover)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원전완역/영인본 전문 수록 | 양장본 Hardcover)

$29.02
Description
《남명증도가》는 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가?
세계 인쇄술의 역사를 뒤바꿀 발견, 《남명증도가》에 숨겨진 비밀과 진실
세상에 공개된 이후로 끊임없이 진위 여부에 휩싸여왔던 《남명증도가》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불교서지학ㆍ고려대장경 분야 권위자 박상국 박사가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의 진실을 규명하고 다시 쓰는 한국 인쇄의 역사. 가장 논란이 된 〈최이 지(誌)〉 재검토부터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의 특징과 차이에 대한 분석, 우리나라 인쇄술과 활자에 관한 깊이 있는 고찰까지. 치밀한 역사적ㆍ학문적 고증, 오랫동안 집요한 추적 끝에 마침내 밝혀낸 놀라운 비밀.
저자

박상국

정통한불교서지학자이자고려대장경연구의권위자.우리문화재의가치와의미를연구하고대중에알리는작업에오랜시간천착해왔다.불교학으로동국대학교에서석사학위,일본동경대정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문화재관리국문화재전문위원,문화관광부심의위원(전통사찰),국립문화재연구소예능민속연구실장,프랑스외규장각도서환수자문위원회위원,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위원,동국대학교문화예술대학원겸임교수등을역임했다.또한한국문화유산연구원원장을지냈으며현재는국립중앙도서관고서위원,국립산악박물관ㆍ국립항공박물관ㆍ송파책박물관등국공립박물관평가자문위원이자한국전적문화재연구소소장,동국대학교석좌교수로있다.1990년대이래전적조사연구회를꾸려일본,미국,영국,프랑스,중국등을50여차례나오가며해외에유출된우리고서를조사했다.특히2011년일본궁내청소장도서1,205책을돌려받을당시반환실무협상에서한국측대표역할을담당했는데,그공로로문화재청장표창과국민훈장동백장을받았다.그동안〈해인사대장경판재고찰〉〈의천의교장〉〈고려대장경의진실〉〈국외전적문화재환수와그과제〉외다수의논문과,《신라사경대방광불화엄경》《전국사찰소장목판집》《사경》《한국의책문화》《세계최고의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고려대장경판의판각과남해》등의책을썼다.

목차

책을펴내며
재판을내면서

1장《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무엇인가
선가의수행지침서,《영가증도가》
깨달음의진면목을설파한《남명증도가》
현존하는《남명증도가》판본

2장《남명증도가》를둘러싼미스터리
최이의지문재검토
왜공인본은목판본으로잘못판명되었나-문화재위원회회의록을중심으로
공인본은삼성본과동일본이아니다

3장공인본《남명증도가》는최초의금속활자본
너덜이
획의탈락
보사
활자의움직임
뒤집힌글자
활자의높낮이에의한농담의차이

4장다시써야하는우리나라인쇄의역사
불교경전신앙과인쇄술
고려시대금속활자인쇄
조선시대금속활자인쇄
우리나라의금속활자에대한국제적인관심과연구

부록1
《영가증도가》와《남명증도가》의현존판본목록
《남명천화상송증도가》한글완역본
영문초록
일문초록
찾아보기

부록2
공인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영인본

출판사 서평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세계최초의금속활자본이다!

《직지심체요절》보다138년앞선새로운금속활자본의탄생
불교서지학ㆍ고려대장경분야권위자박상국박사가
금속활자의진실을규명하고다시쓰는한국인쇄의역사

《세계최초의금속활자본남명증도가》(김영사刊)는공인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금속활자본임을밝히는최초의증명기다.이책은동일본이라고알려져함께보물로지정된《남명천화상송증도가》공인본과삼성본이사실은다른판본이며공인본은금속활자본,삼성본은목판본이자후쇄본임을다양한비교연구를통해증명한다.가장논란이된〈최이지(誌)〉(최이의지문)재검토부터금속활자본과목판본의특징과차이에대한분석,우리나라역대금속활자본에대한논문을모두검토하는등역사적ㆍ학문적고증과더불어오랫동안한국금속활자역사와문화에대해그실체를낱낱이밝혀냈다.
먼저이책에대한소개가필요한것같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당나라현각이중국선종의6조인혜능을직접배알한후크게깨달은심정을서술한《증도가》에,송나라남명선사법천(法泉)이계송(繼頌)을붙여내용을알기쉽게밝힌책이다.현존하는《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모두10여종.그중4책이동일본으로알려지고있었다.삼성출판박물관에소장중인삼성본(보물제758-1호),공인박물관에소장중인공인본(보물제758-2호),대구스님소장본(문화재신청중),개인소장본이그것이다.그러나이들을검토해본결과공인본은금속활자본이고,다른3종의책은금속활자본을번각한각기다른판본이었다.
참고로2017년에열린동산문화재위원회회의록을다시살펴보면,〈보고서②〉에서대구의개인소장본을“현존자료중에서가장앞선것이라는점에서그의의가매우크므로국가문화재로지정하여보존할가치가있다”고하였다.그러나1472년에쓴인경발문이고의적으로제거되었으므로지정은보류하는것이합당하다고하였다.그리고며칠전에삼성본은고려본이아니며,더구나15세기이전은아니라고이회의에서의견일치를보았다고믿을만한소식통에의해전해들었다.그렇다면1984년삼성본을지정할때1239년에판각하여후쇄한고려본이라고감정했기때문에〈최이지〉를목판번각본간행기록으로해석한것이었다.삼성본은고려본이아니라면권말의〈최이지〉는삼성본의간행기록이아닌것이된다.
그리고〈최이지〉는당시최초로주조한금속활자본의간행을축하한기록이다.

필자에게는이책을발간하지않을수없는이유와과정이있다.
이책은‘책을펴내며’에서언급한바와같이필자가근무했던문화재청의청장을역임하신분의소개를받고찾아오신스님의책을문화재지정을위한검토원고부탁으로생각하고시작한일이었다.정년퇴직이후에도일년이면2~3건씩문화재검토의견을부탁받고있었다.스님이가져오신책은공인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인데,많은학자들이목판번각본으로감정하고있으므로금속활자본이라는것을밝혀달라는부탁이었다.그러나예약된일이있어3개월후에검토해드리기로하고헤어졌다.그후가끔씩확인하면서20년만에만난(뒤에안사실이지만)스님에게왜금속활자본이아닌지를상세하게설명할수있는자료를만들어드려야겠다고생각했다.그런데검토과정에서목판번각본이아니라금속활자본임을알수있었다.
그런데곧이어이책은이미보물로지정되어있었다는사실도알게되었다.처음에는왜금속활자본이아닌가에대한상세한검토의견을써드려야겠다고생각하고시작한일인데문화재지정사실을알고몹시당황하였다.자다가몇번씩일어나고잠까지설치게되었다.오랜시간이흐르고난뒤에왜이런상황에도달했는지를처음부터다시파악하게되었다.그리하여먼저2012년에공인본이보물로지정되면서권말에〈최이지〉가삼성본과동일하게붙어있기때문에동일한판본이라고판단하였음을알게되었다.삼성본은1984년에보물제758호로지정하면서권말에붙어있는〈최이지〉를목판번각본의지문으로잘못생각하였던것이그원인이었음을알게되었다.당시삼성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고려본판식을지니고있는활자본의번각본인데,권말에붙어있는〈최이지〉를목판번각본의지문으로오해했던것이다.
그리하여〈최이지〉를처음부터다시검토하여보았고그결과금속활자지문으로판명되었다.뿐만아니라공인본은금속활자본으로서의특징을지니고있었는데,그것도금속활자주조초창기의활자가아니라면사용할수없는활자들로간행한것이기때문이다.다시말하면,공인본은금속활자발명초창기가아니면간행할수없는수준의금속활자본이었다.
그렇다면“1239년에왜《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금속활자를사용하여간행하였을까?”라는의문을갖게된다.공인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정상적인금속활자본이라고하기에는너무나문제가많고서툰금속활자로간행한많은흠을갖고있었기때문이다.반드시속사정을갖고탄생한금속활자본이었다.
여러각도로유추해본결과공인본은1239년에조계산수선사(현송광사)에서금속활자를처음으로주조하여최초로간행한판본임을알수있었다.당시최고권력자최이가금속활자발명을기념으로‘지’를써주었던것이었다.당시조계산수선사는보조국사이후고려선종의종갓집역할을하였고때마침초조대장경이불타버려(1232)전국각사찰의각수는모두남해대장도감으로대장경판각에동원되던시절이었다.이러한때당시무신정권과밀접한관계에놓여있던수선사에서는선종서적간행이필요하였고금속활자주조를시도하여1239년에겨우성공하였던것이다.그러나대몽항쟁이라는당시형편으로지방의사찰에서금속활자인쇄를지속발전시키기는역부족이어서도로목판인쇄로회귀할수밖에없었을것이다.
이러한고려시대금속활자에대해서선배들은어떻게생각하였는지궁금하였다.그리하여우리나라금속활자에대한논문을찾아살펴보았다.그결과한국의금속활자연구가이미1882년에영국의어니스트사토,1900년에프랑스의모리스쿠랑,1906년일본의하야시다이스케등주로외국학자들에의해상당한수준으로진행되었음을알수있었다.이러한외국학자들의논문을통해고려시대금속활자본에대한전후상관관계를정확하게이해할수있었고,공인본이우리나라금속활자발명직후에간행한초창기의금속활자본이라는확신을갖는데많은도움을받게되었다.
무엇보다우리가가장어려웠던시절에,외국인들이쓴논문은우리나라가세계최초의금속활자발명국이라는문화적인자존감을세상에널리알려주었다.이러한자존감은우리가모르는사이에형성되어현재의대한민국으로성장할수있는동력이되었다고필자는믿는다.
그러나역사의소용돌이속에서외국인에의해새롭게밝혀졌던많은사실들은우리가금속활자발명국이라는자부심만을앞세우며면밀한검토도없이성급하게주어담아역사문화적인사실을왜곡했으며,한걸음더나아가엉뚱하게추단하기도하였다.
이상과같이고려시대금속활자에대한선배들의연구업적을살펴본결과고려는1239년에금속활자를발명하고몇차례금속활자인쇄를시도하였지만,계속하여발전지속할수없었다고단언할수있었다.그후고려시대는금속활자의매력을못잊어몇차례시도해보았지만,성공적이지못했다.1377년청주흥덕사에서금속활자로간행한《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잘말해준다.1378년동일한시주자에의해서동일한책을간행하면서도금속활자번각이아니라판하본을다시써서목판본을간행했을정도였다.고려는금속활자를발명하였지만,지방의사찰이중심이되어간헐적으로몇차례금속활자를주조하여서적을간행해보았으나만족할수없었다는것을알려주고있다.그리고조선초기에는고려의금속활자나그주조기술이전래되어금속활자의꽃을피운것으로이해하고있다.그러나《고려사》에1392년1월서적점을서적원으로이름을바꾸어금속활자를만들어책을찍어내게하겠다는기록이나조선조개국공신정도전이금속활자주조를독려한사실은고려가금속활자인쇄가지속되지못했기에이의필요성을역설한사실이지실행한것으로착각해서는안된다.

이책은금속활자본인공인본과목판본인삼성본을비교ㆍ분석해서공인본이금속활자본임을상세히밝히고있다.먼저1장에서는《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어떤책인지,그리고현재남아있는판본이얼마나있는지를모두조사하여분석했다.2장에서는그동안《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왜금속활자본으로인정받지못하고목판본으로판명됐는지그과정과이유를자세히들여다보았다.가장논란이된〈최이지〉와‘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회의록’에대한재검토과정도모두담았다.결국최이의지문에대한오해로동일본이라하였으나동일본이아니었다.
3장에서는공인본과삼성본이동일한판본으로보물로지정되었지만,공인본은동일한목판본이아니라금속활자본임을밝혔다.그리고공인본에는금속활자본의특징을많이지니고있음을상세히밝혔다.그것도초창기의금속활자본에서나볼수있을정도로너덜이,획의탈락,광곽,보사(補寫),활자의움직임,뒤집힌글자,활자의높낮이에의한농담의차이등이금속활자본으로서는처음으로많이나타나고있다.공인본의이런점이금속활자발명이후처음으로간행한책임을알게해주었다.
4장에서는공인본의역사적위치가제대로밝혀지지못했던이유가무엇인지살펴보기위해우리나라인쇄술의역사를개괄해보았다.특히19세기말에서20세기에걸쳐영국,프랑스,일본,독일,미국등외국학자들에의해한국의금속활자가연구되면서우리나라가세계최초로금속활자를발명한국가라는사실이널리알려지게되었고,그로인해우수한문화민족으로자존감도갖게되었다.그러나해방이후자기역사와문화에대한면밀한검토없이외국인들에의해형성된성과에의해서금속활자종주국이라는칭찬에만더불어춤췄다.저자는고려가금속활자를발명했지만지방의사찰이중심이되어간헐적으로몇차례서적을간행했을뿐이며,그마저도만족할만한수준이아니어서다시목판인쇄로회귀했다고일침하였다.
마지막부록에는공인본의한글완역과영인본전문을실어,이책이낯선독자들이그내용을파악하고금속활자본의면면을오롯이살펴볼수있도록돕는다.이책은역사와문화를다시써야하므로불명확한부분은수정하게되었고,영문과일문의초록도넣을수있게되었다.출판사와여러인연덕분으로초판에이어바로재판할수있게되었다.

■가장논란이된〈최이지〉에관한해석
:최이가지문을써준것은최초로금속활자를발명하여인쇄가성공했기때문이다

1984년처음등장한삼성본권말에붙은최이의지문을번각본의간행지문으로오해한것이논란의시작이었다.최이의지문가운데목판본으로오해할수있는단초를제공한부분즉,‘어시모공중조주자본(於是募工重彫鑄字本)’인데,이를“주자본을다시주조하여”,“거듭주조하여”라는뜻으로밝혀졌다.여러차례거듭하여주조하였다는뜻이다.이사실을밝히기위해저자는우리나라최고한문학자이정섭교수를비롯한여러학자들의의견을수집하였다.그리고무엇보다당시최고권력자였던최이가굳이번각본에지문을쓸명분이없는것이다.
이외에뒤집힌활자한일자(一)에대해서는손환일교수가지적하여주었고,목판본에서흔히나타나는할렬ㆍ목리문등일반적현상들이공인본에서는보이지않는다고충북대학교목재종이학과최태호교수팀이과학적인분석으로밝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