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지은이:함석헌
일제하의민족운동가,그리고이후민주주의인권운동가이자종교·평화사상가로서끝없는실천의인생을산함석헌(咸錫憲)은아버지함형택(咸亨澤)과어머니김형도(金亨道)사이에서5남매의맏아들로태어났다.1916년에보통학교를졸업한뒤의사로서의진로를결정,경성의학전문학교를갈생각으로평양의관립인평양고등보통학교에진학한다.2학년이던1917년8월부모님의뜻에따라이웃마을에살던황득순(黃得順)과결혼을한다(슬하에2남5녀).3학년이되던1919년에당시숭실학교에서교사로재직중이었던친척형함석은이찾아와평안남북도학생운동의책임을그에게맡기고역사적인3·1운동을직접경험하게되면서의사를꿈꾸던함석헌의생애는크게바뀌게된다.
3·1운동참여이후학교를자퇴하게된함석헌은소학교에서교편을잡거나수리조합에서조합원일을하며2년간방황하다가,아버지의권유로일단학업을이어나가기위해경성으로가게된다.신학기시작을놓쳐입학할학교를찾지못했던그는함석규목사의추천을받아1921년정주의오산중학교3학년으로입학한다.
1923년오산학교를졸업하고도쿄로유학길에오른함석헌은고심끝에교육자로서의진로를정하고이듬해도쿄고등사범학교문과1부(甲組)에입학하게되었으나,당시일본식국가주의로무장된직업교사양성을목표로하는학교의수업과정에는큰흥미를느끼지못했다.대신,평생친구가되는김교신(金敎臣)과친분을가지게되고이어그가나가고있던우치무라간조의성경연구모임에같이참여하게되면서우치무라의무교회주의에많은영향을받게된다.김교신을포함해여기서만난조선인친구들(유석동,송두용,정상훈,양인성)6명은별도의모임을만들어성서연구를지속하면서1927년7월동인지성격의≪성서조선(聖書朝鮮)≫을도쿄에서창간한다.창간호(국판44쪽)에발표된<먼저그의를구하라>는활자화된함석헌의첫번째글이라고할수있다.
1928년도쿄고등사범학교를졸업한함석헌은귀국후오산학교에부임해역사와수신(修身)을가르친다.한편으로는≪성서조선≫을발행하면서‘성서조선독자회’를열고다수의글을발표하는등사회적활동을본격적으로하게되지만그의무교회주의방식의신앙운동은기존기독교인들에게배척을받기도한다.이에개의치않고자신만의종교사상을개척해나가던함석헌은1933년12월30일부터이듬해1월5일까지송두용의집(서울오류동)에서가진성서모임에서<성서적입장에서본조선역사>초고를발표하고토론을거친뒤2월부터1935년12월까지≪성서조선≫에연재한다.일제에의한조선의역사왜곡이본격화되던시기에우리의역사를바로보고자하는이글은그의대표작으로서큰의미를가지고있다.해방이후이글은일제당시검열로삭제되었던부분을포함해단행본으로출간되었으며(1950.3.28),이후에는‘성서적입장’을빼고대폭수정해≪뜻으로본한국역사≫(1962)로제목을변경·출간했는데민중의고난을중심으로하는이른바‘씨?사관’을보여주는그의중요한저술이다.
일제말기점점노골화되던식민지교육정책속에서창씨개명과일본어교육이강조되자더이상선생직을유지할수없다고판단한함석헌은1938년오산학교를그만두고,과수원을경영하기도했는데이해에자식둘을홍역으로잃는다.1940년평양송산리의송산(松山)농사학원을인수해거처를옮긴다.하지만전주인이었던김두혁(金斗赫)이도쿄로유학가서도쿄농과대학조선인졸업생들과만든소위‘계우회(鷄友會)’모임사건으로구속되었는데,함석헌도연루자로검거되어1년여동안평양의대동경찰서에수감되었다.결국농사학원은폐원되었고,아버지는옥살이중에세상을떠나게되어임종을지키지못하게된다.
1942년3월≪성서조선≫에김교신이쓴권두언을문제삼은일제의폐간조치와더불어함석헌역시연루자로지목되면서다시서대문형무소에서1년간복역한다.출소후,고향에서농사를짓고있던중오랜벗이자스승의관계였던김교신의사망으로인한큰충격과슬픔속에서해방을맞게된다.
해방공간에서여러자리에불려다니며평안북도임시자치위원회문교부장을맡기도하였으나,반소(反蘇)?반공(反共)시위인‘신의주학생사건’에연루되어소련군사령부에의해체포되어평안북도경찰부유치장에또다시50여일을감금당하고만다.석방된지얼마되지않아오산학교에뿌려진반정부전단의배후인물로지목되어또다시투옥된다.별다른용의점이없어한달만에석방되었으나,아버지에게물려받은땅때문에당시내려진‘지주숙청령’의대상이되었고이를피하기위해결국1947년월남을감행한다.1년여후아내와자식일부도월남했으나,어머니는내려오지못하고이산가족이된다.
월남직후오류동노연태의집에서지내면서YMCA강당에서일요종교집회를시작하고,유영모선생등과함께모임을가지던중한국전쟁이발발하면서대구,김해등지로피난을가게되는데이때가진한성서집회에서그간의무교회주의와결별하는신앙적변화를겪게된다.퀘이커(Quaker)에관심을갖게된것도이즈음으로여긴다.휴전이후다시서울에올라와강연활동과양계장을하며어렵게삶에정착해나가는가운데≪말씀≫,≪편지≫등의신앙잡지에여러글을발표한다.그중1956년≪사상계≫1월호에발표한<한국의기독교는무엇을하고있는가>라는글에서그는기독교의타락상과계급화를비판했는데,이글은그의이름을널리알리는결정적인계기가된다.이후에도함석헌은≪사상계≫에영향력이큰글들을발표하면서장준하와함께군사독재와치열하게싸우는길을걷게된다.한편으로는언제나꿈꾸어왔던‘이상촌’을위해기증(정만수장로)받은천안(봉명동)의땅에서교육과농사를함께하는공동체를운영하기도했다.이곳의이름을‘씨?농장’이라고했는데,후일에직접번역해책으로출간한간디의자서전을읽게된것도이무렵이다.
1958년8월호≪사상계≫에발표한<생각하는백성이라야산다>로국가보안법위반혐의를받아서대문형무소에20여일간구금되는,이승만정권시기대표적인필화사건을겪는다.함석헌의첫번째정치평론이라고할수있는이글로인한필화사건이후함석헌은오히려왕성하게글들을발표하면서,‘씨?농장’에서시국을참회하는단식투쟁을전개하는등사회적인목소리를높여간다.1961년≪사상계≫7월호에쿠데타를통해집권하게된당시군부정권을비판하는글<5·16을어떻게볼까>로인해사장이었던장준하와취재부장이중앙정보부에체포되기도했으나당시대중에게끼치는영향력때문이었는지정작함석헌을체포하지는못했다.
1962년2월미국무성의초청으로3개월예정방미길에오른다.귀국한직후7월에오산학교강당에서귀국강연회(오산학교동창주최)를,이어시민회관(지금의세종문화회관)에서≪사상계≫주최의시국강연회를연다.수많은인파가몰려들어미처입장하지못한시민들을해산시키기위해기마경관대까지출동한이강연회를함석헌은스스로‘사회참여의시작’으로보았는데,이후장준하와더불어활발한강연을통해군사정권의잘못을꾸짖는한편굴욕적인한일협정의비준을반대하는활동을한다.1965년에는이를위해각분야인사30여명이결성한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상임대표로선출되기도한다.
1969년박정희정권의3선을위한개헌을앞두고반대시위에앞장서는한편,1970년에는4·19혁명10주년에맞추어개인잡지성격의월간지≪씨의소리≫를창간하지만두달만에폐간조치를당하게된다.이후법정투쟁끝에승소해이듬해8월에야복간호로3호를발행할수있게되었다.
1971년에는이후1988년까지지속된≪노자≫와≪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