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 양장본 Hardcover)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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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유성호의 대화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은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유성호가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이다. 이 책은 임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두 번의 수감생활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현재의 생애까지를 집약한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 임헌영은 우리 문학사와 민족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문학평론가다. 그는 『친일인명사전』(2009) 출간에 앞장서며 근현대사의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두운 시대를 앞장서서 걸어간 현대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유성호가 대담을 이끌어가며 조명한 임헌영의 생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한줄기 빛과 같다. 광기와 야만의 세월을 살아낸 임헌영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역동적인 정치적 산물로서 문학작품을 바라본다. 그가 읽고 섭렵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기억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한평생 문학의 길을 걸어온 그가 말하는 문학은 역사 그 자체다.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명한 두 평론가의 대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저자

임헌영

任軒永
1941년경북의성에서태어나중앙대학교국어국문학과와동대학원을졸업했다.1966년『현대문학』을통해문학평론가로등단했다.1972부터1974년까지중앙대학교등에서강의했으며,1974년긴급조치시기에문학인사건으로투옥되었다.월간『다리』,월간『독서』,『한길문학』,『한국문학평론』등여러잡지의편집주간으로일했으며1979년부터1983년까지‘남민전’사건으로복역했다.1998년복권되어,중앙대학교국어국문학과겸임교수를지냈으며민족문제연구소장과문학평론가로활동중이다.『한국현대문학사상사』를비롯해『임헌영의유럽문학기행』『한국소설,정치를통매하다』등20여권의저서가있다.

목차

『문학의길역사의광장』으로초대하며·임헌영

1카산드라의비극
2이러려고나라를되찾았나!
3아버지와형의흔적을찾아서
4머리둘곳없는청춘이여!
55·16쿠데타학번의대학생활
6한국문단반세기훑어보기
7권력에길들여지는언론:『경향신문』시절
8박정희군부독재시기의월간『다리』
9유신시기의지식인들
10고문과간첩조작의기술자들
11민족정신사를담아내는한국문학정전만들기
12제국주의와민족해방운동
13국가폭력,당신을위한나라는존재하는가
14우리근현대사를제대로인식하기
15오늘의사상,한길사와더불어
16생활글쓰기운동과『한국산문』
17제2의반민특위,민족문제연구소와『친일인명사전』
18불확실시대의평화를위하여

치열한민족의식의언어로풀어낸대화록·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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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역사격랑속에서꽃피워낸문학의길
“문학은아주먼곳을그리워하는연정같은것”
임헌영은아주독특한이력을지닌문학평론가다.그는80년의세월동안식민지시대,해방과분단,독재와항쟁을끝없이경험하며역사의격랑을마주했기때문이다.다섯살때8·15해방을겪은그는먼친척인규순아재가입영영장을받아온집안이초상집분위기가되었던일을회상한다.가족들의걱정이무색하게아재가떠나는당일“해방이됐다!”는소식이들려왔고어린임헌영은김순남작곡가의「해방의노래」를신나게따라불렀다.그러나그해9월부터미국이한국방송과신문등여러매체에관여하면서한반도를빠르게장악하기시작했다.8·15이후남북을막론하고가장시급했던민족사적인당면과제는친일파청산과토지개혁이었지만우리는해방을미국에게도둑맞고만것이다.
그가초등학교3학년이되었을때1949년5월부터8월까지반민법제정에앞장서던이승만이미군조기철수를주장하던국회의원을제거하기위해‘국회프락치사건’을조작했다.결국그해6월26일에백범김구가암살되었다.그다음해보도연맹관련자검거령이내려그의작은아버지가감옥에갇혔고아버지는동생을구출하려고갔다가도리어옥에갇혀세상을떠나고말았다.임헌영은폭풍우같은역사속에서어린시절을마감했다.그의많은가족들이역사와함께저물어갔고아무것도모르는어린시절해방의노래를따라부를때부터그는역사의무게를몸소실감하고있었다.
그가안동사범학교에입학하던1956년5월15일에제3대대통령선거가있었다.상하이임시정부의기둥이자민주당후보였던신익희는반(反)이승만투쟁을위해범야권단일화를구축하려노력했다.그러나신익희는선거를앞두고5월5일심장마비로서거했고이로써민족적인양식을지닌야당은막을내렸다.이러한역사의소용돌이속에서임헌영은학우들과정치상황에대해토론하며문학의길을꽃피워나갔다.그는임대서점에서하루에책을한두권씩매일빌려보았다.대중소설,추리소설,전기문학을읽다가순수문학과세계문학에발을들여가장친한친구와늘다양한주제로논쟁하곤했다.사범학교졸업후에는어머니의권유로모교인조문초등학교에서교사생활을하다가4월혁명을겪은후1961년1월서울로올라가게되었다.
중앙대학교에입학한임헌영은박완서의소설『나목』에소개된그림행상아르바이트로생계를유지했다.미군이오후5시에일과를끝내고술집으로갈때쯤막사를돌며스카프,버클,라이터등에애인얼굴을새긴초상화를보여주며영업을했다.그러나두달만에군사쿠데타가일어나미군부대에출입이어려워지자그는아르바이트를접고학업에매달려대학원에진학했다.

불확실시대의평화를위하여
“촛불하나라도켜는것이어둡다고불평하는것보다낫다”
임헌영은대학원생이던1966년『현대문학』에조연현추천으로평론가로등단했다.대학원졸업후그는1968년『소년경향』에들어갔는데적자로폐간되어『주간경향』에서대중문화관련기사를썼다.그러던중최연소국회의원으로이름을알린김상현의원이설립한출판사범우사에서1970년대사회현실을신랄하게비판한잡지『다리』지를창간했다.제7대대통령선거를앞두고김대중후보의홍보활동을원천봉쇄하려는독제체제의음모아래『다리』지필화사건이발생했다.발행인윤재식,주간윤형두,필자임중빈이구치소에수감되었다.이사건의재판을맡은목요상판사는“고위층에서이사건에관심이많다”는압박을받았지만세구속자를모두직권보석으로석방했다.임헌영은필화사건이후1971년『경향신문』에서『다리』지로옮겨가많은지식인에게경종을울리는글을실었다.
『다리』지가폐간되고중앙대강사로일하면서임헌영은문학에전념하기위해노력했다.그러나얼마지나지않아‘문인61인개헌지지성명’에서명한일이그의발목을잡았다.이서명이언론에발표되자1·8긴급조치가선포되었고그는몸집이거대한남자들에게붙잡혀보안사서빙고분실로끌려갔다.그곳에서그는온갖학대와폭력을당하고밤에는잠한숨자지못하는고문을받아야했다.그들은그가재일동포교양월간지『한양』지에글을쓰고원고료를받았으며발행인과함께식사한것을문제삼았다.
임헌영은교도소에서다니자키준이치로의유미주의소설을탐독했다.그는고통을통해문학예술의심오한세계와아름다움이란얼마나소중한것인지를생생하게느낄수있었다.『한양』지와관련이깊은문인들이증인으로증언해주고나서야풀려났지만죄가있어서간첩이되는것이아니라조작될수있다는사실을직접경험했다.뿐만아니라그사건으로모든직책과사회활동을박탈당해출소했음에도그는아무것도할수없었다.정식으로복권된건57세가된1998년이었고,사건이발생하고44년이지난후인2018년8월에비로소무죄를선고받았다.
임헌영은숨막히는유신치하에서도자신이할수있는일이있으면발벗고나섰다.1975년‘2·28고문정치종식을위한국회의원선언’을김상현의원이주동했을때는동교동김대중사저에서선언문을직접작성하기도했다.김대중은뉴서울호텔에서기자회견을열어1972년10월17일국회가해산된후수사기관에끌려가서당했던온갖고문사실이낱낱이담긴‘고문정치의종식을위한선언’을발표했다.언론에서는국회의원들이당한고문사례를끔찍할정도로자세히다뤄큰파장이일었다.
해방후의흐름은주류문화와대항문화,친일문화와민족문화,식민주의잔재청산의움직임이길항하고갈등하며싸워온역사였다.임헌영은이러한1970년대의최전선에서있었다.그는출옥후번역으로생활을이어나가다가태극출판사에서민족정신사를아우를수있는『한국문학대전집』을기획했다.정치인,인문사회과학자들과독립운동가들도과감히포함하는‘민족사상대전집’을묶는것이그의꿈이었다.『월간독서』에1978년7월부터1년간주간을맡으면서‘이달의좋은책’을선정해독자들에게질좋은양서를소개하기도했다.또한2000년대초반에는한국근현대문학의정본을만들겠다는결심으로범우사에서‘범우비평판한국문학’을기획했다.
임헌영은유신독재후반기에남민전사건으로또한번옥고를치르게되었다.남민전은‘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약칭으로‘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하부조직으로두고있었다.그는그하부조직에가입해활동을시작했다.유신치하에서는민주화운동을하면극심한탄압을받았기때문에지하조직에서저항할수밖에없었다.
남민전사건에앞서제1,2차인혁당사건이벌어졌다.박정희가무모하게한일협정을체결하려는데대해범국민적저항이일어나자이를빨갱이짓으로조작한것이다.혁신계인사와언론인,교수,학생등을검거해중앙정보부에서엄청난고문을가해조작한사건이었다.그들은한국사법사상가장억울한희생자들이되었으며온갖고문을당해몸이성한곳이없어내의가피투성이가된채가족에게그대로전해졌다.
10월9일한글날,구자춘내무부장관이특별기자회견에서건국후반국가활동단일사건으로는최대규모인74명이가담한‘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사건총책이재문을위시한20명을경찰이검거했다는수사결과를발표했다.임헌영을포함한나머지54명에대한검거령이내려져그는관계기관에자진출두하겠다는의사를밝히고집앞에대기하고있던형사들에게붙잡혀치안본부남영동대공분실로연행되었다.
형사들은온갖증거물을압수해그를협박했는데,의논만하고실천하지않은일들도있어숱한고문을당해야했다.이과정에서임헌영의아내고경숙도구금되어대학교행정직으로일하던곳의사표를강요받았다.
그는2심이끝나는9월까지서울구치소에있었다.다음재판을기다리는동안그는독방신세를청산하고일반수들과합방해경제사범들방에배정되었다.그는이후광주와대구교도소를전전하면서그곳에서홍남순,송기숙,박석무,김남주,서승등귀중한인물들을만날수있었다.그는1983년8·15에특별사면을받아풀려나면서인생의한고비를넘겼다.

“나는증인으로남으련다.
나의증언을요구하는사람이단한사람도없더라도”
임헌영은1985년10월초민주화운동을더알차게추진하려면근현대사를다룰연구소가절실하다는대화를박원순과나누다가연구소를세우기로마음먹었다.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는비역사학자들중심으로만들어졌다.그는근현대사에더본격적으로다가서고싶다는의지하나로연구소를차렸다.그가제일먼저추진했던것은자문위원단구성이었다.그는전공을가리지않고한국근현대사와관련이있는모든분야의중견학자들을일일이찾아다니며참여를호소했다.박원순도사람다운세상은우선‘역사청산’에서출발한다고강조하며동참했다.강조하며연구소를도맡아운영했다.천희상의역할로연구소개소두달만에해방3년사와일제강점기사,곧이어문학사연구팀이막을올렸다.임헌영은여기서멈추지않고역사의대중화를위한학술강연을추진했다.대중강연의성격에심포지엄의요소를가미한행사로,참석자들이자발적으로‘바른역사모임’을만들어큰역할을했다.
그는연구소소속상근자들간의응집력을기르기위해송년의밤이나신년하례를거창하게치렀다.함께요리를하고대화를나누며화기애애한분위기를만들어갔다.그가또하나고집했던것은수련회였다.매년여름1박2일의수련회를가서특강을실시했다.이러한노력으로『역사비평』을창간하기에이르렀다.서중석교수의추진과원혜영선생의희생적인후원을시작으로『역사비평』을창간(1987)한것은사학계의일대혁명이었다.『역사비평』은역사의표준을제시했고,나아가금기시되었던사관과자료를접하게해준해방구같은역할을했다.조선로동당문제의최고전문가김남식이참여했던모임을누군가가밀고해해방3년사팀은어느날갑자기종로경찰서로연행되어곤욕을치르기도했다.
임헌영은한길사와도깊은인연을맺었다.1980년대후반학술문화운동을이끈한길사는역사강좌와역사기행을개최했는데임헌영은이자리에참석해비판적지식인들과함께심포지엄을벌였다.그는1990년에발행한잡지『한길문학』의편집위원을맡아기존의문예지보다한걸음앞선진보적색채를드러내는데집중했다.특히오장환의장시『전쟁』을발굴해게재한것은쾌거였다.그는일제강점기의생생한검열상이그대로보관된원고를고서점에서매입했는데이검열원고에는‘김성근’이라는도장이선명하게찍혀있었다.조사해보니8·15후국사편찬위원장을지낸‘김성근’과동일인물이라는사실을알아내기도했다.
그후임헌영은대학입시논술학원강사로일하며현대백화점압구정점에서‘생활글수필쓰기’강좌를개설했다.주부들이접근하기쉬운‘생활글’이라는단어를창안해누구나글을쓸수있도록독려했다.그의강의에점점사람들이몰려들면서나중에는대기번호를받아줄을서는사람도생겨났다.그는현대문화센터모든지점에서강의를하게되었고중앙대와동국대에서도강의를이어갔다.그의강의를듣고수필가로등단한사람이400명이나될정도로그는강의에매순간최선을다했다.2005년에는한국산문작가협회에세이포럼문학회를중심으로월간『한국산문』을창간해수필잡지의역사를새로써나갔다.
2013년박근혜정부시절블랙리스트파동으로임헌영은현대문화센터강의를접게되었다.민족문제연구소에서낸다큐「백년전쟁」이화근이었다.그는이일을계기로민족문제연구소에더욱헌신하며지냈다.그는연구소역사의3분의2정도되는세월을함께했다.1991년2월27일(강화도조약체결일)에4명이개소한연구소는현재상근자40여명에1만2,000여후원회원이함께학술연구와실천운동을병행하는단체로성장했다.연구소는2021년2월27일에창립30주년을맞았다.
연구소는그간여러업적을이루어냈는데가장독보적인활약은『친일인명사전』발간이었다.1997년IMF로연구소가큰타격을입자전국교수들의서명을얻어『친일인명사전』편찬지지선언을했고2001년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출범시켰다.편찬위원회가열리면항상치열한논쟁이벌어졌다.친일파의개념과범주에서부터이의신청의수용여부에이르기까지다양한주제로토론했다.수록자선정은개인적인호불호가아닌역사적인시각으로이루어졌기때문에모든관계자들이압박을극복하고펴낸『친일인명사전』의공정성과객관성은의심할여지가없다.이사전에는당시2,000만인구중4,000명정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