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장편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장편소설)

$17.00
Description
만약이라는 숙명적 우연이 빚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서사
예니 에르펜베크(Jenny Erpenbeck)는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상’(2001)을 수상한 21세기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서사적 소설가다. 그녀는 자신만의 확고한 역사의식과 특유의 여성적 목소리로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구축하며 “거장급의 맹렬한 서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작품은 완벽한 구성미를 보여주며 주술적일 정도로 언어의 음악성이 강하다. 에르펜베크는 『모든 저녁이 저물 때』에서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들며 독창적인 독일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기이한 고독과 죽음을 그려냈다.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짧은 소설. 예르펜베크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최면에 빠지는 것과 같다.
-『가디언』

에르펜베크의 문체는 감각적이고 감성적이지만 절제되어 있다. 그녀의 문장에는 특유의 숙연한 분위기가 묻어 있는데, 우리는 이 묵직한 울림과 죽음이 맞물릴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특정 인물의 진술이나 다른 형식의 글을 자주 인용해 우리를 더 몰입하게 한다.
『성경』『탈무드』『슈타이어마르크 지진 기록지』등 전혀 관련이 없을 법한 글들을 적절한 곳에 절제된 호흡으로 끼워넣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함은 물론 소설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에르펜베크는 문체뿐만 아니라 구조를 통해서도 소설을 견고하게 다진다. 그녀는 이야기를 다섯 권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각 권 사이에는 막간극이 있어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뮤지컬에서 다음 장면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막간극이 이 책에서는 ‘만약’이라는 전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각 권을 넘길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한 편의 강렬한 서사시를 읽는 듯하다.

신이 주셨고, 신이 거두어갔다.
할머니는 구덩이 옆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신은 주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이뿐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될 미래의 모습까지도 전부 저 아래에, 땅속에 묻혀 있다.
흙 세 줌 그리고 등에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땅속에 묻혀 있다. 아이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책가방은 계속 아래위로 춤을 추며 흔들린다.
저자

예니에르펜베크

21세기독일어권의대표적인서사적소설가예니에르펜베크는독일동베를린에서태어났다.훔볼트대학교에서연극학을공부하고한스아이슬러음악학교에서오페라연출을공부했다.
하이너뮐러,루트베르크하우스의가르침을받은그는베를린과오스트리아의오페라하우스에서수많은오페라작품을연출했다.
1999년『늙은아이이야기』를발표하고독일문단의호평을받으며작가로데뷔했다.2001년단편집『탄트』,2004년장편소설『사전』을발표했으며여러작품이14개국언어로번역되었다.
잉게보르크바하만심사위원상,예술가협회문학상,졸로투른문학상,하이미토폰도더러문학상,헤르타쾨니히문학상,리테라투르노르트문학상등을수상했다.현재베를린에살면서전업작가와연출가로활동하고있다.

목차

제1권
막간극
제2권
막간극
제3권
막간극
제4권
막간극
제5권

출판사 서평

배수아의손길로탄생한또하나의예술작품
배수아는작가이자독일어번역가로활동하며이전부터많은작품을한국에소개해왔다.배수아와에르펜베크의만남은2010년에출간된에르펜베크의작품『그속에집이있었을까』에서부터시작되었다.배수아는에르펜베크에대한이해를바탕으로『모든저녁이저물때』를번역했다.
그녀가번역한문장은어느것하나인위적이지않다.소설을꼼꼼하게살피다보면그녀가독일어와한국어의차이에대해깊이생각하고자연스러운문장에대해고민한흔적이여실히드러난다.

삶과죽음의경계를허무는날카롭고선명한이야기
『모든저녁이저물때』는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나치정권,소비에트시대,독일통일이후를아우르는격동의시대에서살아가는한여인이선택할수있었던다섯가지의삶과다섯번의죽음을추적한다.
예니에르펜베크는여자가갓난아기로죽었을경우,성인이되어낯선남자에게살해당하는경우,히틀러시대에억울하게스파이로지목되어처형당하는경우,중년에발을헛디뎌난간에떨어져죽는경우,노년에치매를앓다가요양원에서죽는경우를통해죽음의다양한양상을보여준다.
인물들은각권에서다른방식으로죽음을맞이하고막간극에서는숙명적우연을거듭하며생명을이어나간다.작가는막간극에서독자들에게끊임없이“만약그때그랬다면”“다른선택을했다면”어땠을까하고묻는다.
소설속에녹아있는20세기유럽의현대사는여자의선택과운명에지대한영향을미친다.여자는우연의우연을거듭하며새로운삶을얻는것처럼보이지만사실그녀의운명은역사,사회,정치,문화와맞물려교묘하고모호한형태로자리잡고있다.소설의배경이되는민족주의에서기인한반유대주의,히틀러와나치즘,제2차세계대전,사회주의혁명등은유럽의역사를뒤흔든거대한흐름이었다.그러나이러한흐름은모두인간에의해발생했고인간이만들어냈다.인간이주도한흐름이세계를형성하고이러한세계는또다시인간에게영향을미친다.에르펜베크는끝을알수없는연쇄작용으로사회와개인,삶과죽음의경계를모호하게하며우리를혼란스럽게한다.그녀는인물과세계의상호작용을포착하고둘사이의긴밀한관계를이어가며묵직한분위기를조성하는데,우리는그녀를통해살아숨쉬는인물과세계를만나게된다.그런지점에서독자들은작가가얇은실을겹겹이엮어촘촘하고짜임새있는작품을완성했다는느낌을받는다.

한사람의인생이저문다고해서,세상의모든저녁이저무는것은아니다

죽음은작품을관통하는하나의큰주제이면서작품에가장많이개입하는소재이기도하다.죽음의시점으로묘사된세계와감각은사건에앞서죽음의본질을들여다보게한다.에르펜베크는우리가끝내알수없는삶에대해이야기하며우리가운명이라믿는일들이어떻게형성되는지주목한다.
인간의마지막날을결정하는것은계단을향해내딛는발,얼어붙은길거리를피하기로한결정,날씨나옷차림같은미세한요소다.우리는이야기속에서그어떤것도확신할수없다.죽음의원인은불분명하고어디서부터시작됐는지알수없기때문이다.
그러나죽음은먼곳에있다가도어느날눈을뜨면바로우리앞에다가와있다.그러한죽음을목격하며매순간마주하는인물들은그들이사는세계와대결하듯팽팽하게맞선다.
소설속에서여자는늘예기치못한상황에서죽음을맞이하며자신이외에가족의죽음까지도마주하게된다.가족의죽음은개인의운명을또다른방향으로돌려놓는데,가족의죽음을대면하는인물들의감정은침착하고절제되어있다.에르펜베크는아름다운시적문장으로슬픔을표현해독자들에게전달한다.
묵직한서사속에담긴짓눌린슬픔은겉으로표출하는슬픔보다더강렬한이미지를남긴다.그모습은히틀러시대에남편의실종소식을들은여자에게서잘드러난다.여자는큰소리로울거나술에취하지않는다.그저평생동안남편을그리워하며그를찾을뿐이다.

나는지금남편을기다리고있답니다.호프만부인이말한다.
나는항상길모퉁이에서서,기다리고있었답니다.
일생동안나는길모퉁이에서서기다리고있었답니다.

여자는60세에난간에발을헛디뎌죽게되는데,우리는그녀의허무한죽음을목격하고공포를느낀다.우리는누군가가나의삶을알아주길원하며죽는그순간조차빛나길소망하기때문이다.그러나삶은때때로너무나허무하게저물기도한다.주위사람과가족의죽음을통해죽음의파편들을만나는여자는그들의죽음에자신의죽음을대입해보며자신을빗겨나간운명에대해서생각한다.인물들은자신에게특정한운명이있을거라고생각하지만그들의운명은언제어디서나시시각각변하며역사와정치속에함몰되어버리기도한다.우리는그런장면들을통해유동적이고유한한인간의모습을깨닫게된다.

일생동안그녀는,그것이마지막인지도모른채,셀수도없이여러번마지막으로무엇인가를했다.그러니까죽음은,한순간에일어나는것이아니라,일생에걸친전선인걸까?그러니까그녀는,지금단지이세상밖으로추락하는것이아니라,모든가능한세상밖으로추락하는걸까?

매순간죽음앞에놓여있는인물들에게는이름이없다.그들은각권에서다른이름으로불리며또다른운명을마주한다.우리는그들을보며서로다른인물이아닐까의심해보게된다.각권에서여자는서로아무상관이없는다른인물이라고보아도무방할정도로확연하게다른삶을살아가기때문이다.
각권이넘어가고막간극이시작되면그녀는삶으로복기하는데그삶은이전과는방식이다르다.우리는인물들을지칭할마땅한이름을찾지만그나그녀로대변되는인물들은그저한인간일뿐이다.
이렇게변화하는세계와삶의양상속에서도소설의사물들은처음부터끝까지유지되며우리에게안정감을준다.에르펜베크가설정한사물들은각권을넘나들며여기에서저기로옮겨진다.이사물들은저마다의기억을담고있다.
여자의일기장,‘동쪽으로소개됨’이라는스탬프가찍힌편지,아버지의금색외투단추,괴테전집등은긴호흡을유지하며제1권에서부터제5권까지유지된다.이사물들은약간의변주를동반하며한사람에게서다른사람의손으로전해진다.
인물들은이사물을통해타인의삶을기억하고가족과함께했던시절을추억한다.그들이단단하다고여겼던세계는균열을일으켰지만이사물들은유지되면서묘한안정감을준다.

역사속에함몰된여성성

우아하고서정적인이작품속에서우리를불편하게하는것이있다.바로역사속에함몰된여성이다.작품의여성들은어딘가일그러진형상으로나타난다.우리는혼자길거리를돌아다니거나낯선남자와우연히이야기를나누는여성들을포착하게되는데,이들이서로를대하는방식은조금다르다.
여성은남성을인격체로대하지만남성에게여성은그저성적대상일뿐이다.여성은서로동의한잠자리에서남성이건넨돈을받고전쟁과가난으로굶주린가족을위해몸을팔것을강요받는다.여성은노동현장에서조차여성이라는성으로존재한다.
남성동지들은여성을자신의동지가아닌여성으로인식하며여성은한집단에서여러번의임신과낙태를반복하다소모된다.그러나여성을바라보는이런건조한시선도시대가흘러감에따라변화한다.
여성은제4권에서야비로소사회구성원으로받아들여진다.여자는소련시를번역해인민에게아름다운문학을소개했고반파시스트활동을활발히전개하며평화와사회주의를향한열정을담은문학작품을발표했다.
그녀는제4권에서이러한자신의공로를인정받으며장례식을치른다.우리는이장면을통해시대가변했음을느끼게된다.

아마도그녀는아기를하나정도는더낳게되리라,그것도그의아이를.이렇게생각하는그녀의얼굴에미소가떠오른다.…머리를옷밖으로내민다음에야,그가내민손에지폐가들려있는걸발견한다.이모든시작이었던,건조하고도따뜻한그의손과지폐를바라보며,그녀는당장웃음을터뜨릴듯한얼굴로묻는다.이게뭔가요?하지만그는웃지않고,아마도이렇게말한다.네거야.또는아마도이렇게말한다.법석떨지말고받아.또는거스름돈은필요없어.또는귀여운것,넌이만한값어치를했어.이런비슷한말을그가한다.그녀는처음보는낯선사람인듯,그렇게그를바라본다.

H.동지는60세생일을눈앞에두고우리의곁을영영떠나고말았습니다.
그는화환가운데하나를가리킨다.
일생동안그녀는자신의모든능력을다해노동계급과당에헌신했습니다.
그녀를잃는것은프롤레타리아혁명예술의선두에서싸워온모범적인전사의상실을의미합니다.

에르펜베크는탄탄한구성력과시적언어를통해인간의삶과죽음을돌아보게한다.그녀가보여주는맹렬한서사가급격한상승곡선을그릴때우리는복잡한감정을느낀다.그녀가전해주는뜨거운감정과묵직하고흡입력있는문체,바로그것이우리가그녀의작품을사랑할수밖에없는이유다.

한남자가낡은한조각천으로겉옷을만드네.
겉옷이해어지자,그것으로조끼를만드네.
조끼가해어지자,그것으로수건을만드네.
수건이해어지자,그것으로모자를만드네.
모자가해어지자,그것으로단추를만드네.
단추로는,아무것도를만드네.
마침내마지막으로,아무것도로그는,이노래를만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