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 평전 :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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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고유섭 평전』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44)의 서거 80주기(2024년)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출간되었다. 고유섭은 빼앗긴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라고 하늘이 점지해 내려보낸 듯한 비범한 인물이다. 39세의 나이에 요절하듯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집필한 그의 미학·미술사 연구 업적은 100년을 산 학자보다 크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이 최초이고 광복까지 단 둘뿐이었다. 고유섭은 서화는 물론 도자기, 불상, 불탑까지 우리의 미술사를 학술적 체계로 정리해냈다.

저자 이원규는 소설가로 등단해 1990년대 이후 생생한 문체로 민족혁명가 김원봉, 조봉암, 김경천, 김산 등의 평전을 써왔다. 인천 출신 작가가 이번엔 인천이 낳은 석학 『고유섭 평전』을 펴낸 것이다. 저자는 3년 전 인천문화재단 요청으로 고유섭의 약전을 집필했는데, 그가 구축해낸 거대한 업적에 비해 연구서와 논문이 예상보다 적고 점차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다고 느꼈다. 고유섭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다시 펜을 잡았다.

『고유섭 평전』은 고유섭의 학문, 인천·경성·개성 등에서의 생활을 두루 다룬다. 부친 고주연의 생애부터 그려지는 조선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통문관·열화당 전집과 그 당시 신문 및 『진단학보』 『조광』 『신동아』 『문장』 등에 실린 1차 자료를 충실하게 담았고, 어려운 한자어는 풀어서 설명했다. 1910~20년대 인천시가지 지도를 실어 그 당시 실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미공개 자료인 고유섭 가문의 호적, 족보와 부모 및 고유섭의 졸업장 등을 수록했다. 고유섭의 일기와, 가족과 선후배의 증언, 동국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 우현의 육필원고와 답사노트, 삽화 등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생애를 오롯이 복원했다. 그렇게 복원한 고유섭의 짧은 생애는 조선 민족은 열등하고 문화예술에 독창성이 없다고 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예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일관되어 있었다.
저자

이원규

1947년인천에서출생,인천고와동국대국문학과를나와젊은시절교사로일했다.
1984년『월간문학』신인상에단편소설「겨울무지개」가,1986년『현대문학』창간30주년기념장편소설공모에베트남참전경험을쓴『훈장과굴레』가당선되었다.
인천과서해배경분단문제를다룬소설들을주로썼으며민족분단에대한진보적시각을온건하게표현한작가라는평가를받았다.
1990년대전반,역사에서지워진의열단ㆍ조선의용대등민족혁명과독립전쟁자료를찾고중국ㆍ러시아현장을여러차례답사해신문에르포를연재하고민족운동가들의평전을썼다.
창작집『침묵의섬』,『깊고긴골짜기』,『천사의날개』,『펠리컨의날개』,장편소설『훈장과굴레』,『황해』,『마지막무관생도들』,대하소설『누가이땅에사람이없다하랴1-9』등,르포르타주『독립전쟁이사라진다1-2』,『저기용감한조선군인들이있었소』(공저),평전『약산김원봉』,『김산평전』,『조봉암평전』,『김경천평전』,일제강점기무관15인약전『애국인가친일인가』,『민족혁명가김원봉』등을출간했다.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박영준문학상,동국문학상,한국문학상,우현예술상등을수상했으며,모교인동국대겸임교수로서10여년간소설과논픽션을강의했다.

목차

불멸의민족혼이된우현고유섭책을내면서

제1부출생과성장
민족수난기에태어나다
기차통학생문학소년
고미술사에눈돌리다

제2부젊은날의초상
경성제대의사각모자
철학도의삶
고독한학문의길
미술사연구의문

제3부아무도걷지않은길
박물관장이되어
본격연구의중심으로
감성과지성
생애의절정기

제4부최후의열정
조선의미는구수한큰맛이다
생애의위기가다가오고
39년생애,유성(流星)처럼지다
떠난뒤에

주요참고자료
우현고유섭연보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우리나라최초이자최고의미술사학자우현고유섭의평전
빼앗긴조국의미술사를개척하라고하늘이내려보낸인물고유섭
소설가이자전기작가이원규,고유섭의생애를복원하다

인천의첫경성제대생고유섭,
인천이낳은가장비범한인물이되다

우현고유섭은1905년인천싸리재한성길에서축현역으로향하는내리막길의끝자락큰우물거리중심(현동인천길병원자리)에서태어났다.인천이국가존망의격랑에휘말린시기였다.인천항에서하선한일본군3,000여명이축현역에서기차를타고한성으로이동해황제를겁박하여한일의정서를끌어냈고1905년11월을사늑약을맺어조선의지배권을손에넣었다.이당시인천은특히일본인들이득세한곳으로,조선인가구보다일본인가구가많았다.
우현고유섭은혼란의시기에동서양의문물과사람이들고나는개항도시에서자랐다.인천은서구문물을받아들이는창구였다.근대예술로는협률사(현애관극장)가있어연극이가장먼저들어왔다.표관이라는활동사진극장도고유섭의집에서멀지않은데있었다.양악은내리교회에서1919년김영환과홍영후(홍난파)등이연주한것이시작이었고,근대문학은1920년대고유섭이중심멤버로활동한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앤솔러지가처음이었다.고유섭은인천에서도경성에서도마음만먹으면여러근대예술을향유할수있었다.
우현고유섭은우각리에있던취헌김병훈의의성사숙에서공부했고1914년인천공립보통학교(현창영초)에들어갔다.이원규작가는여러자료를종합해고유섭과함께공부했던이들로조진만전대법원장,이승엽북한초대사법상,서예가검여류희강등이있었다고밝힌다.고유섭의수필을보면그는열살이었던이시기부터조선미술사를소망하는영특한소년이었다.3·1운동을한조선인편을들며일본보다우수한조선의미술을찬양했던일본미술평론가야나기무네요시신드롬과더불어인천지식인들의민족예술에대한자각에세례를받아고유섭은조선미술사를조선인이열어가야할미개척분야라고여긴것이다.
우현고유섭은1920년경성에있는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에입학하면서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문예부에들었다.보성은문인의산실이었다.염상섭,현진건등이선배였고마해송이동기생,임화,이상,김기림등이한두해후배였다.고유섭은활자화되어남아있는첫글인소풍기행문을학생잡지『학생계』에실었다.보성에는좋은스승도많았다.황의돈은제자들의정신에민족혼을불어넣었고,춘곡고희동은미술을가르쳤다.서화협회전시회도매년학교에서열려작품을감상하고고희동의해설을들을수있었다.개성,부여,경주,금강산등으로떠났던여러번의수학여행으로고미술과고건축을바라보는안목도길렀다.
우현고유섭은1925년보성고보를이강국과함께공동수석으로졸업했다.아버지의사업실패로고유섭은학비가싼경성제대밖에선택지가없었다.조선인차별로44명밖에입학하지못하는경성제대에고유섭은2회입학생으로당당히합격했고학교에서도천재로명성을날렸다.동기로소설가이효석,국어학자이희승등이있었다.그곳에서『문우』등에문학성이짙고문체에서정과슬픔이깔린시와수필을많이발표했다.
경성제대생들은느티나무세잎에‘대학’두글자모표가달린사각모자를쓰고교복위에망토를걸쳤다.조선인44명에게만허락된교복이라거리에나가면사람들이모여구경할정도였다고한다.고유섭은인천에서선망받는첫경성제대생이었고,이제는인천이낳은가장비범한인물,민족자존을지킨학자로평가받으며새얼문화대상1회수상자가되었으며그상금으로인천시립박물관에동상도건립했다.

경성제대최초의미학전공자
아무도가지않은길을선택하다

1927년23세가된우현고유섭은예과과정을마치고철학과에서미학을전공한다.당시미학전공자는고유섭한사람뿐이었다.광복까지20년동안미학전공자는고유섭외조선인은단둘뿐이었다.조선에는‘미학’은물론‘미술’이란말도없었다.저자는고유섭이미개척분야인미학의기초를쌓고조선미술사연구를개척하려는뜻이었을것이라고짐작한다.담당교수우에노나오테루교수와유일한수강생인고유섭이미학독일어원서를놓고강독수업을하는모습이『고유섭평전』에생생히그려진다.
고유섭은졸업후미학연구실조교로일했다.연구실과도서관에쌓인수많은미술사자료에파고들었다.규장각문헌등고문헌에서미술사자료를속속들이분석하고필사하고초록해서자신만의아카이브를만들었다.이때부터미학을떠나미술사연구로직행했다.근대적미술사연구방법론으로반가상의양식과흐름을분석하는논문「금동미륵반가상의고찰」을발표하자원고청탁이빗발쳤다.신문과잡지에다양한글을발표했다.조선탑파의기원을고찰하고분류하여분석하고,삼국~조선시대미술을미학적방법론으로분류하고그특징을기술했다.고유섭은조선인최초미술사학자로존재감을선명히드러냈고많은지식인이탄복하며그의글을읽었다.
1933년우현고유섭은우에노교수의제안으로미학연구실조수직을사직하고,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부임했다.일본인들의도굴과골동품수집으로가장큰피해를본곳이고려의왕도개성이었다.고려유적지와유물을수집·보존하기위해개성유지들이결성한개성보승회가박물관을세웠고고유섭의학문적명성을듣고관장으로초빙한것이다.고유섭에게도수학여행과답사로왔던개성이낯선곳이아니었다.고유섭은박물관을유물보관소가아니라개성의역사적전통과개성사람들의역사적삶의흔적을보여주는살아있는공간으로바꾸어갔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고유섭은자기학문을쌓아가는학자의길로들어섰다.조선미술사에대한지식을확장했고박물관연구조사예산으로직접탐사에나섰다.고유섭의제자로‘개성삼걸’로불린황수영·진홍섭·최희순(최순우)이박물관으로자주찾아와답사하러나가는고유섭을따라주말조수로나서기도했다.고유섭은진단학회발기인으로창립에참여해다양한연구자들과학술모임을하며미술사학자로서실증성을중시하고사회경제사학도적극적으로받아들였다.쏟아지는청탁속에서써낸신문·잡지글로명성을얻고다양한기획연재에도참여했다.

개성부립박물관장고유섭
최후의날까지한국미술사를남기다

1935년이후박물관장고유섭의삶은본격연구의중심으로흘러갔다.문헌자료를바탕으로철저한현장답사를하며개성의고적들을소개했다.또한고려화적,조선의전탑과그림,고려의도자,골동품,고서화등에대한글을발표해학계와언론의주목을받았다.고유섭은1,000년이지난고려초의철불석가여래상을총독부박물관에서돌려받아봉안식을여는큰과업도이뤘다.
경성제대동기이희승의부탁으로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미학및미술사’를,연희전문학교에서‘미학개론’을강의했다.잠시학문연구와논문쓰기를옆으로밀어놓고어린시절처럼문학에젖어본시기도있었다.이때발표한「애상의청춘기」「정적한신의세계」는감성깊고품격이높아자주인용되는한국문학의명수필이다.이후로도문학적서정이깊은기행문이나「아포리스멘」같은철학적화두를담은참신한수필을써내기도했다.자신의인생관과예술관을집약한그글의일부는고유섭의생애그자체를나타내는듯하다.

“나는지금조선의고미술(古美術)을관조(觀照)하고있다.그것은여유있던이땅의생활력의잉여잔재(剩餘殘滓)가아니요,누천년간(累千年間)가난과싸우고온끈기있는생활의가장충실한표현이요,창조요,생산임을깨닫고있다.…나는가장진지로운태도와엄숙한경애(敬愛)와심절(深切)한동정을가지고대하고있는것이다.만일에그것이한쪽의‘고상한유희’에지나지않았다면,‘장부(丈夫)의일생’을어찌헛되이그곳에바치고말것이냐.”(고유섭,「아포리스멘」)

학계에서는고유섭이남긴연구성과가운데탑파연구를가장크게여긴다.한국의문화유산중탑파가질적으로나양적으로가장우수한특징이있다.고유섭은탑이생성된삼국시대부터1,000년의변천과정을정확히짚어연구함으로써빛나는성과를남겼다.시대에대한고증과탑파양식을철저하게고찰해일본학자들과다르게시기를비정했다.고유섭은최고권위일본인연구자들을넘어우리나라탑파연구의결정판을써냈다.
고유섭은여러사전에인물열전을쓰기도했다.일본후잔바오가펴낸『국사사전』에는안견,안귀생,윤두서의열전을써보냈고,조광사가간행한『조선명인전』에는김대성,안견,공민왕,김홍도,박한미,강고내말,고개지,오도현등의열전을썼다.
고유섭을대표하는글로유명한것은「조선미술문화의몇낱성격」이다.그성격은상상력·구상력의풍부함과구수한특질,이렇게두가지를짚는다.순박한데서느끼는구수한큰맛,단순한색채에서오는적조미를‘조선의미’라고규정한것이다.당대지식인들은새롭고탁월한안목이라며동의했겠지만후학들에겐‘야나기의영향을떨치지못했다’는비판을받았다.하지만이것은식민사관을극복하고야나기의관점을넘어서려고쓴글이었다.
우현고유섭은오늘날보통명사가된‘분청사기’의명명자다.「고려도자와이조도자」에서고유섭은일본에서유행한미시마테의제조법과유래를분석하고청자의타락물이자변화물이라고규정한다.일본의다인들이유래도모르고붙인미시마테라는명칭보다는‘분장회청사기’라고부르겠다고선언했다.그것을줄인말이분청사기다.

“우리에겐독창적이며빛나는문화예술이있다.”
민족의예술혼을지킨고유섭

1941년우현고유섭은고추무역의수렁에빠져돌이킬수없는길에들어섰다.당시월급이100원이었던고유섭이아내몰래장인에게돈을빌려고추무역에1만4,000원을투자했다가4,000원을손해보면서병이났다.의사는간경변증으로진단했으며원인은술이라고했다.고추무역의실패는고유섭이쓰러지는직접적인계기였을뿐그의몸은연구로인해지치고거의망가져있었다.
병세속에서절필을예감하면서도고유섭은절필하지않고원고청탁을받아들였다.몸상태가좋아졌을때일본문부성초대로일본제학연구진흥위원회학술대회에참석해조선탑파를주제로발표하기도했다.조선인발표자는고유섭이처음이었다.고유섭의병세는금방다시나빠져복수가차오르고회복하기어려워졌다.그럼에도조선미술사완성이라는생애의목표를위해정신을집중해『조선탑파의연구』일본어원고를한줄한줄써내려갔다.토혈하며쓰러져죽을고비를넘긴후에도어느정도몸이회복되면초인적인의지로다시원고지를잡았다.
운명의날은1944년6월26일화요일이었다.39년의생애가유성처럼졌고곁에는부인이점옥여사와제자황수영이있었다.저자이원규는이렇게적었다.
“섬나라일본의보호국으로전락하던1905년역사의질풍노도가몰아치던개항도시인천에서태어나아무도관심갖지않았던조국의미술사를개척하기위해외로운길을걸었던우현고유섭은조국광복1년을앞두고그렇게떠났다.”
『고유섭평전』은고유섭이떠난뒤에제자들이유고를출간하고,고유섭의저술전반에대한본격적인해석과탐구가이루어지는과정까지다룬다.「경인팔경」의출전이나「애상의청춘기」「나의잊지못하는바다」제목등오류로굳어져온것들을바로잡기도한다.
고유섭은우리민족이조선의미가무엇인지알고,그것이중국을모방하지않고창조적변용으로독창성을획득했으며일본보다우수하다는걸알게해서땅에떨어진민족의자존심을세우고자했다.조선의문화예술은독자적이지않고하찮은것이라고천대받아모두가열패감에빠진시절에우현고유섭은짓밟힌민족자존을위해민족미술사를홀로개척해나간선구자였다.저자이원규는고유섭은가장비범했고가장열정적인개척자였으며가장고독했던문화독립운동가였다고말한다.그는민족의문화예술을지킨불멸의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