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육성 회고록 (양장본 Hardcover)

김대중 육성 회고록 (양장본 Hardcover)

$35.15
Description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 서거 15주기를 맞아 그의 육성으로 작성된 마지막 자서전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출간한다. 1924년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했을 때부터 2009년 서거하기 전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와 사상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마지막 일기를 남긴 위대한 정치가이자 정치사상가인 김대중은 역사의 퇴행을 온몸으로 이겨냈다.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국가 번영을 체험하고 선도한 인간 김대중의 회고를 통해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참으로 엄혹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그 현장을 우리는 이 책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전문 연구자들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된 유일한 자전적 성찰이자 기록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진들과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 42시간 26분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실이 바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다. 이 책에는 김대중 대통령만이 증언할 수 있는 경이로운 인간 실록이자 한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겪은 역사 풍경이 담겨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 해방 전후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통찰하는 그의 생각과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다룬다. 자유당과 이승만의 독재 시절, 4·19 혁명을 겪으면서 정치에 나서고,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 선포 속에서 죽음을 딛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한다. 다시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수난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큰 정치인 김대중의 행로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나 투옥과 망명을 통해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 사상은 찬란하게 성장한다. 감옥에서의 높은 수준의 독서, 망명과 유학을 통한 세계적 지성과의 교류와 토론은 그를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일으켜 세운다.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에 걸친 투옥, 3년여의 망명생활과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을 통해 세계평화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한다.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체득하게 된다.

김대중은 참으로 험난한 생애를 살았다. 이 책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대거 담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의 길을 걷는 김대중의 삶은 참으로 놀랍다. 그의 삶과 이론과 성찰이야말로 세계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유학 시절 스티븐 호킹과 이웃일 때 찍었던 사진 등 김대중도서관이 미공개한 사진 10여 장을 포함한 64장의 역사적 사진이 실려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QR코드를 넣어 김대중 대통령의 음성을 언제든 들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철저하게 준비하는 큰 정치가의 소명의식과 더불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한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의 전략과 사상을 읽게 한다. 불의에 단연코 저항하면서 펼쳐내는 그의 정치역정은 같은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겐 감동이고 축제 같은 것이다. 그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신군부의 온갖 유혹을 뿌리친다. 지지를 보내는 국민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평화전략과 평화정신은 국제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세계의 양심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한반도 평화를 구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특히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오늘의 혼탁한 한국 정치상황에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새로운 정치를 발전시키는 나침반이자 항해도가 될 수 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김대중의 정치적 리더십과 평화정책, 인권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전략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의 정치적 지혜와 전략전술 그리고 국정운영 철학과 실천은 오늘날의 어두운 정치현실을 타개해나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11월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여 설립된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도서관이다. 김대중도서관은 김 대통령 개인에 대한 자료와 그와 관련한 민주화운동, 정당사, 재임기 활동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전문적인 사료연구 기관으로,. 한국의 대통령기념사업 및 대통령학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목차

후세대들이 찾는 살아 숨 쉬는 기록물 |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펴내면서

1. 나의 고향 하의도와 목포
2. 혼돈과 역경의 시간들
3. 시련 속에서 꽃피운 의정활동
4. 민주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다
5. 유신독재에 맞서다
6. 서울의 봄부터 13대 대선
7. 13대 국회부터 15대 대통령 당선
8. 한국경제의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
9. 민주인권대통령
10.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작
11.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외교
12. 후배 정치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

감사의 말씀 | 김홍업ㆍ김성재
한국 정치의 나침반이자 항해도 | 류상영ㆍ장신기ㆍ박명림
김대중 대통령 연보
김대중 대통령 육성 연설 QR코드 목록

출판사 서평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까지,
하의도와 목포에서 얻은 정신적 자산

“내가 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질문지를 받으면 꼼꼼하게 살펴보고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당시 하의도는 농지 대부분이 기존 지주들의 탐욕에 의해서 결국 일본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농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었다. 저항 정신이 있는 지역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아버지는 마을의 구장이었다. 덕분에 『매일신보』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면을 열심히 읽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김대중 대통령은 공부를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7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의 항구도시였다.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김대중 대통령은 웅변에 소질을 보였다. 2학년 담임 무쿠모토 선생님은 “김대중의 웅변은 일본 대의사가 의사당에서 한 것에 못지않다”며 칭찬했다. 졸업 이후 목포 전남기선에서 일하다 해운 사업을 했다.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상업도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경영하면서 경제의 흐름을 배우고, 회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 지식까지 깨우쳤다. 이때의 경험은 국회의원이 된 후 정책 수립과 예산 심의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직후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것,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철수 전의 일본군과 학생들이 충돌했을 때 소방차를 타고 가서 중재했던 것,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목포 지역 정치적 라이벌의 무고로 구금당했던 것 등 다양한 젊은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사업 대금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강을 건넌 후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걸어서 목포까지 내려갔다. 생환 이후 사업을 계속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보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무소속으로 3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후 민주당에 입당해 소장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 인권과 평등,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신념으로 행동했는지를 회고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는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자다. 자유, 평화통일,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투신하고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던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입당 후 출마한 1958년 총선에서 불법적으로 후보등록을 취소당했고, 1961년 국회의원 첫 당선 3일 후 5·16 쿠데타가 발생해 선서도 하기 전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1969년에는 3선개헌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반대투쟁에 나선다.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했던 연설은 “15분 연설 도중 박수가 20번 가까이 나올 정도로 아주 큰 호응”을 얻었다.

“경제개발의 성과를 소수가 독점하다 보니 노동자와 농민은 희생되고 중산층 형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도 제대로 발전하기 힘듭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 대통령은 활발한 의정활동으로 박정희 정권에 타격을 줬다.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씨의 공화당 입당은 위헌이고 국회법 위반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 무효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본격적인 경계를 받기 시작했다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변인·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독재를 통한 경제발전을 비판하고, 진정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성과라고 인정받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이때의 불균형 발전에 기인”한다고 평가한다. 이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주장한 것은 지방자치제다. 부정선거를 막고,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높이며, 야당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 선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1990년에는 13일간의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지방자치 실시를 관철시켰다.

“역사를 길게 보면 결국 국민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패배한 경우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패배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바른 길로 진전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찾아왔을 때마다 온몸을 던져 투쟁했다. 두 번의 망명과 평생 6년여의 감옥 생활을 했다. 첫 번째 망명은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일본에서 다리 부상을 치료하던 중 국내 소식을 듣고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투쟁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해외 민주세력을 일깨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그때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살해를 당할 뻔했던 때의 증언을 생생히 담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국내에 귀환한 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침체되어 있는 유신독재 반대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이 사건이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자 부담을 느낀 유신 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대학교 감옥병실로 이감시켰지만, 회고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그곳에서 “창문을 모두 폐쇄해서 밖을 볼 수 없었고 햇빛을 쬘 수 없었다”는 “지옥을 체험”했다.
전두환 정권 때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투쟁은 계속됐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일으켜 김대중을 연행했다. 이때 김대중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광주시민이 100명 넘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협력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을 때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광주에서 죽은 수많은 시민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죽겠다고 결심”하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후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망명은 국제사회의 구명운동을 통해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때도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치와 인권유린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까지 만나 설득하며 미국 상하원의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을 더욱 압박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하려고 목숨을 건 귀국을 단행했다.

“나는 민주화운동이 목표로 한 것은 자유·인권·평화가 뿌리내리고 확산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권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자 가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있는 민주주의”를 민주화의 본질이라고 인식했다. 인권보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은 13대 국회의원 때부터 성과가 있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위해 평민당 총재로서 책임지고 총력을 다했던 것이다. 당내 남성 의원들도 달가워하지 않는 문제였지만 다른 당 총재들과 노태우 대통령까지 설득하여 간신히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노력을 이어갔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사상전향제를 폐지하고 양심수를 석방해 대한민국을 민주인권국가로 평가받게 했다.


■ 대한민국 최고의 국제공공재
‘김대중’의 평화외교

“전쟁은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하게 하고 고귀한 생명도 무수히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투옥되고 납치되고 망명투쟁을 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행보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대통령 당선 후 국가부도 직전의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지식정보·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보며 세계는 경이로운 눈빛을 보냈다. 북한·일본과도 화해하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격이 상승해 외교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외교는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1971년 7대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내세웠던 ‘4대국 안전보장론’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감안하면 남북한 사이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주변 4대국(미·일·중·소)과의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 평화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협력적 자주’의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협조’와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동안 반목과 대립을 해온 우리 민족이 스스로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에 나서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에 따라 남북관계를 발전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은 분단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남북한 사이에 이질감이 생겼기 때문에 즉각적인 통일이 아닌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1971년부터 주장해왔다. 이에 따라 대통령 임기에는 3단계 중 1단계인 ‘남북연합 구성’을 이루려고 목표했다. 남북연합의 핵심은 각종 대화와 상호합의였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