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임경섭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임경섭 시집)

$9.94
Description
“우리의 전부를 숨기지 못해서 우리는 좋았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무한히 확장되는 광활한 시편들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단의 주목을 받으며 꾸준히 시작활동을 해온 임경섭 시인의 신작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가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첫 시집 ?죄책감?(문학동네 2014)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두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 “세계를 향한 집요하고도 끈덕진 시선”으로 “삶 속에서 제 부재를 말하는 것들의 공간을 촘촘히 구축해”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기묘한 현실주의”(송종원, 해설)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형식의 시세계를 선보인다. 서사를 이루지 못하고 점멸하는 메마른 현실을 응시하며 “아무것도 없는 곳, 그 시간과 공간에 다시 서사를 기입”함으로써 “이방의 드넓은 아름다움”(김혜순, 추천사)이 오롯이 펼쳐지는 시편들이 자못 산뜻하다.

해가 지는 곳에서/해가 지고 있었다//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형이 슬퍼한 밤이었다//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형이 말했지만/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창문이 있는 곳에서/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처음의 맛」전문)
저자

임경섭

저자임경섭林暻燮
1981년강원도원주에서태어났다.2008년중앙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죄책감』이있다.

목차

제1부●아내는나에게얘기하지않았지만나에게아내는얘기하고있었다
크로아티아비누
플라스마
라이프치히동물원─슈레버일기
성토마스교회─슈레버일기
Bistdubeimir
호텔메이우드1
아파트먼트도나트─바다오르간
아파트먼트도나트─성도나트성당
라이프치히중앙역─슈레버일기

Mr.Vertigo
비행운

제2부●어머니가죽으니양복이생겨서그는좋았다
페달이돌아간다

귀향
처음의맛
반짝반짝
불붙은작은초아홉개
이모
빛으로오다
지평선
서막
개켜진검정재킷

제3부●눈이내리고있다고쓰면눈이내리고있는것이다
쏟아지려네
눈이내리고있다
일광욕
형의벌
형과벌
형벌
늘어진
사순절
원탁
프로파일링
비가와서
파도는파도로서
원형

제4부●우리의전부를숨기지못해서우리는좋았지
일리미네이터
기다리는것은기다리는것너머에있다
싸흑뗀느
바시코프스카의일흔여섯번째생일
바이세엘스터강?슈레버일기
백조호수?슈레버일기
싱그러움에게
알리바이
검은연기
풀다
반복했다

제5부●신은보이지않고
국경을넘는일
조지는리피강을등지고
엘리자,나의엘리자
귀항
늦여름
호텔메이우드5
까페메샬레
일몰
징그러움에게
적어도보이는펜스
매치포인트

해설|송종원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시집을펼치면우선은곳곳에등장하는외국인명들이낯설다.시인은통상적인시적화자인‘나’의자리에거의모든작품마다의도적으로낯선이름을집어넣는다.게다가시적공간도대개가“너무나먼곳”(「페달이돌아간다」)인이방(異邦)이다.그런데시에서관습적이름에가까운‘나’의부재가오히려‘나’와관계를맺는세계의존재감을더욱강화하면서,화자와관계를맺는모든존재와풍경들이더욱또렷하게모호해지는기묘한현실감을드러낸다.이로써시인은이름과내밀하게결속하던관계들이새롭게열리는다른차원의현실속으로우리를안내하며,“해가지기전에돌아오지못할수도있”(「페달이돌아간다」)는‘먼곳’의세계로나아간다.

난생처음지평선을마주한아이에게다니엘파울슈레버는말했다아들아나도지평선은처음이구나그러자아이가물었다지평선이뭐야?슈레버는곡식의낟알을살찌우는가을볕같은목소리로대답했다저기하늘과땅이맞닿아만든선그것이지평선이란다(…)그러자아이가되물었다지평선에가면지평선을밟을수있을까?슈레버는해넘이를등지고홀로날아가는홍부리황새의날갯짓같은목소리로대답했다지평선에가면지금의지평선은사라지고또다른지평선이멀리보일거란다그러자아이가또다시물었다그렇다면지평선에결국갈수없는거아냐?슈레버는끝이보이지않는밀밭에점점이흩어져이따금허리를펴는농부들의기지개같은목소리로대답했다다가가는만큼지평선은밀려나며멀어질거란다그러자아이가물었다그렇다면아빠가거짓말한거아냐?슈레버는느긋하게물결을만들다가사라지는곡창지대의여린하늬바람같은목소리로대답했다아들아나도지평선은처음이구나(「지평선」부분)

시인은‘나’로부터시작되었지만‘나’로부터멀리달아난삶의모습을그려낸다.그러나“멀어졌다가는다시돌아올것들”(?원탁?)이기에시인은멀어진삶을억지로당겨오지않고오히려더먼것으로만들어그거리를조절함으로써삶의실체를뚜렷이응시한다.“한치앞도보이지않는암흑”속을“달아날수록갇히고있다는사실”(「침」)을알기에멀어져야비로소보이는것이라고나할까.그렇다면“아무도없는곳엔아무도없는게아니었다”(「풀다」)고말하는시인에게세상은마치“끝이보이지않는계단”을오르듯,“하면할수록고민은계속과거가되”고“우리는결국현재를벗어날수없”(「아파트먼트도나트」)는환(幻)의세계일듯싶다.

나보다는몇곱절더먼길을가던아이가물었다/강은언제부터흘렀느냐고/네가태어나기훨씬전부터강은흐르고있었다고/나는대답했다/그럼강은그전언제부터흘렀느냐고아이가물었다/내가태어나기훨씬전부터강은흐르고있었다고/나는대답했다/태어나기도전의일을아빠는어떻게아느냐고아이가물었다/지금너에게처럼나도할아버지가알려주었다고/나는대답했다/그럼아빠는할아버지의말을모두믿느냐고아이가물었다(?바이세엘스터강?부분)

임경섭의시는반박자혹은한박자느린걸음으로서서히다가온다.시인은기존의언어가품고있는은유와문장이지니는실효성을찬찬히의심하면서자신의삶속에서유유히흘러가사라져버리는것들에대해끊임없이질문한다.“포도는건포도가될수있지만/건포도는포도가될수없다”(「Mr.Vertigo」)는시인의말은‘삶은언어화될수있지만,언어는곧삶이아니다’라는말과다르지않다.시인은관습적인사고에서벗어나“경계와경계들이놓여있는/경계의안쪽”(?라이프치히동물원?)을포착해내는정밀한새로운언어를찾기위해“계속새로운문턱을넘는”(「바시코프스카의일흔여섯번째생일」)다.시인은지금,‘이상한현실주의’를실현하는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