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손택수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손택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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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세월과 일상, 여유와 넉살로 빛난
손택수가 터득한 시적 경지
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힘들겠지만, 시집을 펴낼 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즐거움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경우 앞선 네 시집을 소개하는 문구들을 살펴본바 ‘가족과 고향’(?호랑이 발자국?) ‘민중적 시정과 대지의 삶’(?목련 전차?) ‘도시적 삶의 애환’(?나무의 수사학?) ‘삶의 안팎을 성찰하는 사유’(?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였다. 강약의 변화와 시정의 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 여정을 거쳐, 다섯번째 시집에 이른 손택수는 한결 여유롭되 넉살이 늘었고, 힘은 빼되 간결함은 더한 시편을 써내려갔다.
시인의 여유와 넉살을 두고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송종원은 ‘무구함’으로 읽어낸다.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냉이꽃」)가 나이 쉰이 되어서 깨달은 것은 비록 하잖을지라도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일 터이다.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시집의 쓸모」)하는데, 시인은 책을 슬쩍 밀어버려 ‘고소한 복수’를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지만 결국 뜨끈한 된장국처럼 ‘상한 속’을 달래주는 시집의 ‘쓸모’에 공감한다.
송종원은 이번 손택수의 시집을 설명하는 몇가지 키워드 중에 ‘기쁨도 슬픔도 아닌, 아슴아슴 있는 일’이라는 표현을 택하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묵직하고 진지하게만 바라보던 시선이 한결 가벼워진 덕이라고 해석한다. “못물에 꽃을 뿌려/보조개를 파다//연못이 웃고/내가 웃다//연못가 바위들도 실실/물주름에 웃다”(「연못을 웃긴 일」)와 같은 시구들은 시각적인 단출함뿐 아니라 독자들조차 슬며시 웃게 만드는 상상력을 보이되 시로써 ‘삶의 풍요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미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시인이 터득한 경지에 은근슬쩍 독자들을 청하는 시인의 ‘너스레’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경지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과 끝을 알 수 없는 소재들은, 중견에 이르러 으레 도달한 ‘먼 곳’을 가리키는 수사학이 아니라 손택수 특유의 유순하지만 당당한 시선을 증언해준다.
저자

손택수

1970년전남담양에서태어나1998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
시집『호랑이발자국』『목련전차』『나무의수사학』『떠도는먼지들이빛난다』,동시집『한눈파는아이』등이있다.

목차

정지
찬란한착난
석류나무와함께
나뭇잎흔들릴때피어나는빛으로
오리나무의측량술을빌려서
있는그대로,라는말
먼곳이있는사람
아홉귀에들다
물받이통을비우며
곰취나물에꽃니자국
연못을웃긴일
차경
잊는일
먹기러기
백이날다
명옥헌
산색
파미르고원
지게體
한켤레의구두
쌀암
서리가돋는아침
백일장과짜장면
흉터필경사
검은혀
붉은빛
눈빛
가만히맥박처럼짚어보는누군가
저녁의소리
자작시
백경
지축을지나다
파이프오르간
알람브라궁전의추억
비둘기일가
칼새
기도와잠
아침의신부
망원동
시집의쓸모
강화의사랑
행복에대한저항시
날씨없는날씨
물의뼈

골법(骨法)
세한도
죽은돌
제주
애월
아픈섬
응달
점자별1
점자별2
점자별3
수백페이지의혀를가진바람
수풀떠들썩팔랑나비의작명가에게
수연수진
우표의맛
성냥갑동물원
평강눈종이공장에가고싶다
물바퀴를달다
터치
채석강
석양의제국
풀과양들의세계사
신록의말
뒷짐을지고크게웃다
냉이꽃
저무는돌

해설|송종원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무시무시하다그리움이여
지워지지않은눈빛이여”
세상의모든눈빛들과일상의먼지들조차감싸안는손택수의신작시집

▶본보도자료에는시인과의서면인터뷰내용이추가되어있습니다.

등단20여년동안네권의시집을상재한중견시인으로,탄탄한시세계를펼쳐보이는손택수시인의신작시집?붉은빛이여전합니까?가출간되었다.농경사회적상상력과민중적삶의풍경을담금질해냈던손택수는이번시집에서현실의간난신고나일상의먼지같은순간들조차빛나게하는따뜻하고살뜰한시선을보내는데,단순히세월과연륜의결과로만해석할수없는시적경지에이르렀다평가할만하다.여백의아름다움,간결함의미학,풍성한시적리듬의실험등다채로운시적향취를선보이면서도현실과시인의삶,혹은삶다운삶에대한궁구를게을리하지않는시정신이돋보이는시집의탄생을목도할수있다.

▶손택수시인과의짧은인터뷰(질의:편집자)

-이번시집을묶으면서각별히집중했던주제나이야기가있으셨는지요?
시는그늘에서와서그늘로가는장르라고생각합니다.언어는명명되는순간에사물들을소외시키기쉽고,존재는누구나이력서나약력따위로는정리될수없는저마다의비밀들을갖고있기마련입니다.세계도그렇겠죠.이미노래했지만정간보에기록할수없는울림이라는것이있을테니까요.제가좋아하는시중에오마르카이얌의「루바이야트」중“개념너머에들판이있다”라는구절이있는데우리가당연하게받아들인제도와질서혹은개념들이망각한들판의말들을받아쓰고싶었다고나할까요?시가그런그늘들을오래주시하면뻔하게나열된질서들을재구성하는힘이생깁니다.자연스럽게리듬과분위기,의미화의욕망을부추기면서도거기에저항하는독특한소리의자장권이형성되죠.이런경험들을통해서사전이나지식검색으로는도무지알수없는유일무이한감각적사건에시가닿기도하는겁니다.반복할수도없고복제할수도없는그런집중,어떤무한의경험이라고나할까요,살아있는혹은함께살아있고자하는그마음을나열적인일상의먼지들속에서살아보고싶었던것같습니다.시인이어떤주제나기획의도를가지고시를쓰게되면수학공식같은게되기쉬운데시집을묶고나서보니까저도모르게그런흐름이잡힙니다.

-시전반의정조에서변화가느껴진다.삶에대한태도의여유랄까,너스레,뭔가달라진듯한느낌이다.단순한나이탓은아닐거같다.
시는항상‘영원한현재’의편이니까시에서연륜이느껴진다고하면시인으로선다소당혹스러울수있는데다행입니다.책임편집에디터의느낌을존중합니다.15년전에두번째시집『목련전차』를편집해주셨죠.그때오자하나없어서황홀했던기억이새뜻하네요.(웃음)그사이에두권의시집을더냈는데『나무의수사학』과『떠도는먼지들이빛난다』입니다.초기에꼬리표처럼붙어다닌‘자연’이나‘농경문화적상상력’혹은‘서정’이나‘오래된미래’같은수식들을은근히즐기면서도깝깝했던게사실이거든요.그래서그두권의시집은도시공간을전경화하면서일상을살아가는소시민들의자의식을돋을새김해보려고했어요.그게30~40대제삶의모습이기도했으니까요.말하자면기억에의한시쓰기가‘지금,여기’로옮겨온거죠.그러면서삶의중력에짓눌리거나찌든언어들이틈입해들어왔습니다.저로서는매우고통스러운시간이었어요.삶도언어도다만신창이가된것같았으니까요.아마도그런통과의례뒤의시들이어서그런것이아닐까짐작해봅니다.조금다른이야기를드리자면,구양수는시가가장잘떠오르는세곳으로‘말잔등,침실,화장실’을꼽았죠.이세곳이이성이아닌몸에가장가까운장소들이잖아요?시인은말잔등을타고여행을하고침실에서꿈꾸고화장실에서시름을내려놓듯이끝없이움직이고꿈꾸고자신만의내밀한영역을만들어가려고애쓰는거죠.이런공간들도일상은일상인데사실비일상에더욱가까운일상이라고할수있을거예요.미당이「시론」이란시에서“제주해녀도제일좋은전복은님을생각해서부러따지않고바닷속에부러놓아둔다”고했습니다.일터인바다를사랑이나신화같은비일상의공간으로바꾼비법이거기에있는거죠.일상속에서비일상을살아가는것이시인이라는이야기입니다.저의비일상은이번시집에선‘애도’나‘상실’과관계가있을것같아요.농경문화시대를상징하는할머니와근대화세대라고할수있는아버지를떠나보내고나서보낸애도의시간이그리움의세계를열어주었으니까요.아시다시피그리움은슬픔이긴하지만마음을맑게씻어주는거울과같은역할을합니다.그거울에사물들이더잘비추인거겠죠.슬픔의선물이아닌가합니다.

-작년에는첫번째동시집을출간했다.동시로도등단했으니당연할수있는데,어떤마음이었나?
우리의시사가증명하듯이정지용과백석,박목월과윤동주,오규원,최승호,안도현,함민복등좋은시인들은하나같이동심을간직한분들입니다.동심을저는질문할줄알고아파할줄알고공감할줄알고부끄러워할줄알고작은잘못에도죄스러워할줄아는능력같은것이라고생각합니다.제시는아니고초등학교1학년아이가쓴‘송아지’라는동시를소개해볼게요.

“송아지눈은크고맑고슬프다/그런데송아지국물은맛있다/나는어떡하지?”

재밌고아름답죠?아이는송아지의눈앞에멈춰서서그골똘한정지속에여린것의아름다움을발견합니다.그러다어느순간자기모순을고백하죠.그러고는질문을던집니다.‘나는어떡하지?’이단순한질문은사실인류의참스승들이인간은자연과어떻게관계할것인가를두고던진화두와같은무게를가지고있다고생각됩니다.멈추고,고백하고,질문하기!좋은글쓰기의모든것이이안에다담겨있습니다.이런게동심인거죠.피카소는그래서“모든아이들은예술가로태어난다”고말했습니다.예술가란자기안에깃들어있는존재의시원을잊지않으려는사람들인데자라면서자기안의예술가를망각하게됩니다.피카소식으로말하자면,동시는내안에숨어있는,그러니까많이알지도못하고가진것도없지만송아지의눈을들여다보는가난한마음의아이를찾아내게해줍니다.세월호만바다에침몰해있었던게아니라우리모두자기안의바다에그런아이를수장시키고있는줄도몰라요.어른이되기위해‘가만히있어!’라고강제한뒤망각한저마다의동심을회복하면지금의일그러진우리얼굴이보이겠죠.그래서저는동시를시의오래된미래라고말하는것입니다.이번시집에도그런아이의눈빛이담겨있을거에요.

-해설은송종원평론가가,추천사는김민정시인이썼다.가깝고인연이많은분들이신데?
좋은귀명창들이죠.분에넘치는글들을받아서좀얼떨떨하기도합니다.작가의손을떠나는순간작품은읽는이를통해재창조될자유가있으니까,오독의권리까지를포함해서저는그분들의감상을고스란히다시곱씹는독자로서만족하려고합니다.여기에서또어떤대화적관계가형성되고제작업에영향을주는새로운길이열리게될지알수없는일이죠.작년에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만난퓰리처상수상시인포레스트갠더의말이인상적이었습니다.그는네루다를이야기하면서,사랑의시인인네루다가군부의총탄에죽어가는소녀를묘사할때그끔찍한장면에서습관적으로쓰는은유의아름다움을저만치저버리고여의는모습속에서어떤윤리감을의식한다고했어요.제시에서그런걸이야기할수있다니좀충격이었습니다.예전에현대시동인상을수상할때축사를오신김춘수시인께서“손군의시는너무소박해”라고얘기한이후처음이었던것같아요.물론저는“선생님,저의소박은방법적인겁니다”라고답하긴했지만그런말씀들이오래오래나침판역할을하더라고요.앞으로그런귀명창들을만날기대로벌써부터가슴이두근거립니다.마치첫시집을내는것같아요.(웃음)

-노작문학관관장을맡고계신데,앞으로의계획은어떠신가?강단에선다거나,후배들을가르친다거나하는계획은없으신가?
문학관뒷산에노작의유택이있어서‘나는눈물의왕이로소이다’니까눈물의릉을지키는능참봉일을하고있는셈입니다.말못할사정은이번시집엔싣지않았는데「누릉」(?창작과비평?2018년겨울호)이라는시로발표한바있습니다.노작이「나는왕이로소이다」에서‘눈물이있는곳이면다자신의왕국’이라고선언했잖아요?저는그걸문명과자연,언어와사물,삶과죽음,성과속사이에서균열을온몸으로견디면서작고여린존재들의편에서살아가야하는근대적인시인의운명으로이해하고있습니다.처음에는인연이없는곳이라망설였는데죽음을마주하는천직이라생각하고새스승을한분모신다는마음으로일하고있습니다.노자도딱한번출사한적이있는데그게그당시의‘도서관장’이었다고그러더라고요.저에게그런인연을허락해주신분들께감사드릴일이죠.여기서연극제도하고,잡지도내고,출판학교나창작강의같은과정들을기획하고있습니다.공부하는방법중의가장좋은방법이가르치는거라고하는데그런기획들도어느정도는가르치는일이아닌가스스로위안을삼아봅니다.당분간은여기서일상에집중하고다음시집준비에가장우선순위를두려고합니다.어떤시가저를기다리고있을지궁금하기도하고요.

[시인의말]

거위와점등인의별에서

스물다섯에늦깎이대학생활을시작했다.연극판을기웃거리다가철지난포스터처럼뜯겨져서거리를떠돌아다닌뒤의일이었다.상처투성이였다.게다가친구들은졸업을준비할나이였으니낙오병이라는자괴감이없지않았다.
‘그래도늦은건없어.낙오한자만이볼수있는풍경도있겠지.’지금도크게달라진것이없는나의낙천주의는경쟁을외면하는습관에서온다.남쪽바닷가소도시의산골마을에짐을푼나는무엇보다만(灣)으로둘러싸인바다를교정으로거느린캠퍼스가좋았다.산등성이에서내려다보면섬을품은바다를산들이어깨를겯고호수처럼아늑하게품어주었다.그바다가바로임화의시「현해탄」의바다였다.
바다가캠퍼스라면소라와게들,말미잘과교우관계를맺으며시를쓸수있을것같았다.마치병들어남행한임화처럼나는치자향이좋던가포와장지연열사의유택이있던현동과덕동바닷가를떠돌며자취생활을하였다.일부러도시외곽을선택해서버스를타고통학을하는불편이있었지만불편을복으로삼을줄아는은자(隱者)의후예라도된것처럼은근한긍지가나를제법오똑하게했다.
강의를마치면학교에서야간수위아르바이트를했다.‘근로장학생’이라는좀멋쩍은딱지가붙은나의첫임지는대학원건물이었다.청소를하시던아주머니들이퇴근을하고나면아주머니들의쉼터가초소로바뀌었다.책상하나와목제침상그리고낡은갓등이있는오두막에서나는틈틈이책을읽고습작을하였다.혼자서하는습작에진척이있을리만무했다.나의습작방법이란그저더많은책을읽고좋은시집을만나면필사해보는것뿐이었다.오른쪽검지에펜혹이생길때까지필사를하다보면뻐근해오는어깨에말의근육이생겨나는것같았다.서로길이가다른투수의팔처럼나는글쓰기신체로몸을바꾸는변신의고통을달게받고싶었는지모른다.
나의수더분한선임들이었던정문의수위아저씨들은야경주독하는모습을대견스럽게여기셨던지출근과동시에수위실에틀어박혀소설책이나파고있는나의해태를매번눈감아주었다.뜻밖에내가근무를제대로서나안서나꼬장꼬장한잣대를들고삼엄하게감시한선임은따로있었다.학교연못에터를잡은그는쉴틈없이순찰을돌았다.도르래소리같기도하고마치녹슨철문을열었다닫을때처럼쇳소리가나는그의독특한허스키보이스는진폭이꽤나커서그가바로이대학의터줏대감임을능히알게하였다.하긴,한밤에조금이라도수상한소리가나면득달같이그요란한호각을불며출동하였으니내수위업무의태반은그가본것이나다름없다.가을밤창문밖을온몸으로하얗게프레시를비추며걷는그를보면적이안심되는것도사실이었다.그는심지어깊은수면에빠져있을때조차하얗게깨어있을줄알았다.경비를위해태어난존재라고나해야할까.
그경이로운수위선임은거위였다.노을이지면나는뒤뚱거리는거위와함께저물어가는교정에가로등을켰다.멀리섬들에도접선신호처럼불이들어오고하늘에도개밥바라기별이켜지면나의대학도어느새점등인의별이되었다.새벽이면서리에으슬으슬입술을깨물고떨고있는별들에게이제질때가되었다는신호로스위치를내리기위해눈을비비며일어났다.그때도거위는나와함께였다.가로등스위치오르내리는소리를따라천체가회전하는것같았